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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86화 (86/125)

제86화

놀랍게도 아카데미는 평화로웠다. 내가 입학한 이후 몇 번의 사소한 사건이 있기는 했어도 원작의 정말 다사다난했던 사건 사고를 떠올려보면 무던하기 그지없었다.

그 이유는 내게 있었다. 내 덕에 아카데미는 무탈했다.

원작에서는 왜 그렇게 많은 사건이 터졌을까? 그 원인은 비숏이었다. 그녀가 여러 남주 캐릭터들과 어울리며 마찰을 빚고, 남주들을 움직이게 한 탓이었다.

그녀가 남주들과 얽히며 여러 적을 만들었고, 그 적으로부터 공격받으면 남주들이 경주하듯 앞다투어 폭발했다.

내가 그러한 사건들을 미연에 방지했기 때문에 오히려 비숏은 안전하게 아카데미 생활을 보냈고, 또 아카데미 건물도 대체로 무사했다.

대신에 딱 한 가지 비숏에게 위험한 점이 있었다.

현재 비숏의 주변에는 그녀를 지켜줄 사람이 전무했다. 카르테아, 아가레스, 이안 등과는 인연 자체가 없었고,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제프린마저도 수련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아카데미에서 그녀는 혼자였다.

원작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사건, 그것들 대부분은 남주와의 관계 혹은 그들의 애정 공세 때문에 생긴 것이었으나 모든 게 그러했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터프한 성격, 물불 못 가리고 할 말은 해야 하는 성품이 일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번에 발생한 일이 딱 그러했다. 원작에는 주변에 괴물 같은 것들이 득실거리는데도 종종 있었던 사건인데, 왜 조용하나 했다.

일이 생겼다. 이번 일을 짧게 요약하면 돈 많은 귀족이 비숏에게 구애했고, 비숏은 거절하는데, 말을 기분 나쁘게 해서 그 귀족이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보복을 하려 들었는데, 그래 봤자 뭐가 있겠는가?

일이 소문이나 봤자 자기가 욕먹을 일이었고, 아카데미에서 사람을 시켜 괴롭히기도 어려웠다. 혹 비숏 주위의 사람들을 부려 외톨이로 만들 수는 있겠으나 이미 비숏은 친구 하나 없으니 그마저도 불가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일을 무시했다.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방관했다.

제프린이었다면 물가에 애를 내놓은 부모처럼 사소한 거 하나하나 보살피려 들었겠지만, 비숏이 애도 아니고 성인인데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내가 안일하게 있는 동안 소문이 이상하게 났다.

소문이 비숏에게 아주 불리하게 났고,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그 소문을 믿는 듯도 했다.

아, 이쯤 되니 제프린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위험이 생기면 도와주기로 했는데, 이 정도쯤이면 움직여야만 했다.

* * *

나는 비숏에게 찾아가 말했다.

“도와줄까?”

“당신은 그 소문을 믿지 않는 겁니까?”

원작을 읽은 나였기에 듣자마자 콧방귀를 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얼마나 눈이 높은지 내가 잘 아는데.

황태자나 북부대공, 마탑주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던 거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봐왔는데, 소문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주 이상한 추문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유행할 그런 가십거리였죠. 그런데 왜 일이 생기자마자 진위를 따져보지도 않고 저를 도와준다는 겁니까?”

원작을 봐서 알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별로 관심 없어. 그래, 네 말대로 사실일 수도 있겠지. 난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야. 그런데, 그냥 제프린이랑 약속해서. 그냥 그런 거야.”

“제가 도움을 요청하면 무엇을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너 괴롭히는 놈 찾아가서 그러지 말라고 말하겠지.”

비숏은 잠시간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저는 보답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과거의 일을 조금만 더 잊어주면 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잊길 바라십니까?”

원작에서 구태여 언급하지 않은 일들이 라파엘과 비숏 사이에 있었다. 이를 내가 언급할 수는 없으니 그녀에게 먼저 제시하라 요구하며 협상했다.

* * *

그렇게 협상을 끝낸 후에 아가레스를 찾았다.

아가레스가 고문의 대가였기 때문인데, 나는 고문을 하는 게 싫었던 탓이었다. 아가레스는 고문에 능하니 고문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그는 내 설명을 듣고는 왕자님이 따로 없다며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아가레스에게 놀리지 말라고 부탁했고, 그는 내 부탁에 더더욱 크게 웃었다.

“으음. 자네 말대로 상대도 귀족이니 고문을 가하는 건 어려울 법해.”

“귀족이 아니라도 저는 그런 짓 안 합니다.”

“아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고문이 만능은 아니라는 거였네. 나도 고문을 쉽게 하고 그러지는 않아. 때와 상대를 가린다고.”

아가레스는 턱을 문지르더니 흐음, 숨을 뱉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 결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자네가 어려운 일을 약속했어.”

“예, 맞습니다.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방법이 마뜩잖더군요.”

“상대도 그냥 귀족이 아니라 영지도 있고, 재산도 꽤 모았다면 압박을 넣기도 어려울 거고, 칼부터 휘두를 수도 없으니 자네가 합법적인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네.”

그의 말을 들으니 비숏에게 괜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나 싶었다. 주변에 무식한 애들뿐이라 똑같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는데, 그렇게 풀릴 일이 아니었다.

“혹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대신 해결해주겠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귀족들이 다 자네 같은 건 아니라서 말이야. 다들 날 얼마나 좋아한다고. 말 한마디면 다들 깜빡 죽지.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는데, 이번 일을 터트린 놈도 비슷하지 않겠나?”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가레스는 자기만 믿으라는 양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툭툭 쳤다.

“일이 끝나면 자네가 그 마법사 놈한테 해주는 닭 요리나 같이 먹지. 술은 내가 준비할 테니.”

“그러죠. 준비해놓겠습니다.”

* * *

북부의 영주들은 대대로 험한 소문이 뒤따랐다. 영토 문제가 잦았고, 매일 같이 외부의 위협을 대비하며 맞서 싸워야 했다. 그 탓에 잔혹한 결정을 내렸고, 피에 익숙했다. 아가레스는 그중에서도 유별났다.

어린 나이에 영주 자리를 물려받아 본래라면 아버지가 했을 살생을 직접 해나가며 컸다. 나이에 맞지 않게 빠른 발육과 소년티를 벗지 못한 얼굴로 피칠갑을 쓰고 다니니 그리 기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마데우스와 계약한 후에는 무서울 게 없다는 양 윗대에서부터 앓아왔던 문제들을 손수 나서 과격한 방식으로 풀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귀족, 그중에서도 영지를 가진 자들은 아가레스의 소문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왜 그런 소문이 붙었는지, 소문의 배경을 파악했다.

소문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가레스는 정말로 사람을 죽인다. 연민 따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망설이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

원작이었다면 한 번 등장하고 말 삼류 악당.

라파엘이 온갖 악당들이 등장할 여건 자체를 지워버린 덕에 겨우겨우 행패를 부린 놈.

이름은 모리스라 했다.

아가레스는 모리스의 팔을 꺾었고, 손톱을 붙잡았다. 아가레스는 제 이름을 이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고문은 상대에게 고통을 가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데 의의가 있었다. 고통은 공포를 주기 위한 도구지 고문의 목적이 아니었다.

톡톡.

아가레스는 모리스의 손톱을 밑에서부터 가볍게 두들겼다.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모리스는 이 몸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고 지레 겁을 먹었다.

아가레스는 담담한 어조로 모리스에게 말했다.

“내가 부탁 하나를 받았어. 자네가 마음씨 못난 사람처럼 구니 혼을 좀 내주라더군. 내가 친밀하게 지내는 이가 몇이 없는 탓에 꼭 좀 들어주고 싶은데, 내 마음을 이해하겠지? 자네 이게 무슨 일인지 알겠나?”

모리스는 아가레스가 호출할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무 접점 없던 공포의 대공이 자신을 불렀다. 왜? 암만 긍정적으로 보려 해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 제가 벌린 일과 관련 있을 게 뻔했다.

‘거짓말이나 말장난이 통할 상대가 아니냐. 어쩌면 소문이 사실인지도.’

아가레스는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놈이었다.

모리스는 아가레스를 마주하니 숨이 가빠오는 걸 느꼈다. 근육이 경직되고 입술이 말라 갔다. 피부가 겹치는 곳에는 땀이 맺혔다.

“예. 왜 저를 찾으셨는지까지 압니다. 죄송합니다.”

모리스는 곧바로 잘못을 시인했다.

아가레스의 기분이 상하는 순간 손톱이 하나씩 뽑힐 거다. 모리스는 비숏과의 일을 후회했다. 그래, 그 미색이었다면 누군가의 눈에 들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마 그 상대가 아가레스였던 거겠지.

‘내가 멍청했어.’

조금 더 알아보고 구애했어야 했다. 미색에 눈이 팔려 성급하게 굴었다. 모리스는 이를 깨닫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북부대공의 여자를 건드렸으니 죽을 수도 있다고 간주했다.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시는 모든 걸 드리겠습니다.”

아가레스는 이래서 명성이 있는 게 편하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자네가 할 일을 일러 주지. 소문을 제대로 정정하고, 잘못을 저지른 본인에게 직접 사과하게나.”

“그거면 충분합니까?”

“물론이지. 내 말을 그대로 따라준다면 자네에게 위협이 가는 일은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모리스는 귀를 의심했다. 믿기 힘들 정도로 관대한 처분이었다. 적어도 눈알 하나, 귀 한 짝쯤은 포기할 걸 각오했다. 재수가 없다면 자신의 목뿐만이 아니라 가문에까지 여파가 미칠 거라 예상했다.

“감사합니다.”

아가레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빠르게 일을 맞춰야 한다. 모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의 이마와 딱딱한 바닥이 부딪히며 꽈앙! 소음을 냈다.

“감사합니다! 내일까지 모든 일을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가레스는 모리스의 대처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이 쉬울 거로 예측하기는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이야 미처 알지 못했다.

“그래, 믿고 그만 돌아가 보지. 잘하게.”

“예! 반드시 원하시는 결과물이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모리스는 멀어져가는 아가레스의 등판을 보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했다. 아가레스는 아주 온화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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