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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87화 (87/125)

제87화

아가레스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돌아와서는 말했다.

“다 끝났네. 다 자네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릴 거야.”

그의 성품을 감안하면 일을 질질 끌지도 않을 거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은 피할 거라는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뭘 어떻게 한 겁니까?”

내 황당함에 은근히 기분이 좋은듯했다. 아가레스는 답지 않게 히죽거렸다.

“내가 말했지 않나? 귀족들이 다 자네 같은 건 아니라고. 보통은 내가 좋게좋게 말해도 다들 들어주지.”

“그래서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냥 찾아가서 말했네. 소문을 정정하고, 사과하라고.”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아가레스가 위협하며 협박했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지금이야 나도 아가레스가 다소 편해졌어도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가 꺼림칙했다. 그가 내게 협박했어도 받아들였겠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빈말이 아니라 진심인데, 별거 아니었어.”

아가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술병을 꺼냈다. 여태 그가 나와 마실 때 가져온 술은 큼지막하고 투박한 병에 담긴 물건이었는데, 오늘은 얇게 세공된 유리병이었다.

“그럼 먹지.”

약속한 대로 닭을 튀기라는 주문에 그를 데리고 주방으로 이동했다. 나는 금세 손질된 닭을 꺼내 가루를 묻혔다.

“나는 이번 학기가 끝이야. 곧 있으면 졸업이지. 내년부터는 내가 없을 텐데 자네 외로워서 어떡하나?”

“대공님을 제하고도 친구는 있습니다.”

“그 마법사 놈?”

“예.”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자네를 위해서 말하는 거니 귀담아듣게. 사람은 친구를 가려 사귈 줄 알아야 해. 때론 주변에 사람 하나 없는 게 못난 놈 하나 데리고 있는 것보다 낫네.”

닭을 튀길 준비하며 아가레스의 말을 흘러들었다.

그가 왜 이렇게 이안을 욕하는지는 대충 유추가 됐다. 그는 걸핏하면 이안에게 맞았는데, 정작 본인은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했다.

벼락을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나야 맞아본 적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꽤 따끔해 보였다. 보통의 벼락도 아니고, 마력으로 강화한 벼락이라 특별히 더 아플 거다.

아, 그래, 이안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뭘 할까.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할 아가레스라면 그래도 계획이 있겠지 싶어 말했다.

“대공님께서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이렇다 할 계획이 있으십니까?”

아가레스는 뭘 그런 걸 무어보는 양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없네. 그럴 게 난 영주이지 않나? 내 영지를 관리하는데 몰두해야지.”

나는 아가레스와 잡다한 대화를 하며 닭을 튀겼다. 여태까지의 나는 다른 양념을 쓰지 않은 채로 닭을 튀겼다.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후라이드 치킨이었다. 하지만 계속 후라이드만을 먹으니 양념이 된 치킨이 떠올랐다.

뭔가 여기에 어울리는 양념이 없을까 곰곰이 떠올리고자 노력하는데, 마요네즈가 괜찮을 듯했다.

마요네즈만을 찍어 먹는 건 어색할 수 있으니 고추를 다져 양념을 만든다면 어울릴 거다. 거기다 아가레스는 거주지가 북부이다 보니 신맛에 익숙할 테니 그와 함께 먹는다면 시도해 봄 직했다.

오늘은 아니고 다음에.

떡볶이를 자주 먹는 덕에 고추는 있어도 마요네즈는 아니었다. 이곳에 와서 마요네즈를 먹어본 적은 없어도 아마 이곳에도 있기는 할 거다. 혹 없다고 해도 만드는 게 어려운 양념은 아니니 할 수 있겠지.

나는 닭을 튀긴 후에 아가레스에게 대령하며 말했다.

“여기에 어울리는 양념이 따로 있을 텐데, 다음에는 그와 함께 먹어보죠. 지금은 양념을 구하는 게 어려워서.”

“좋네. 그러지.”

치킨의 맛을 아는 덕에 닭보다는 아가레스가 가져온 술에 먼저 관심이 갔다. 나는 아가레스가 먼저 치킨을 집어 들 때 그가 챙겨온 술의 맛을 보았다. 레몬 향이 강했고, 달달해 알코울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자네도 마시기 편할 거로 가져왔네. 그것보다 음식의 맛이 제법이야. 이쪽에 소질이 있는 듯해.”

“아뇨. 뭘.”

누가 해도 맛이 좋을 음식을 내가 했을 뿐이었다. 이런 거로 칭찬을 들으니 괜히 멋쩍었다.

“그럼 자네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는 뭘 할 건가?”

아까 내가 그에게 했던 질문이 그대로 돌아왔다. 아카데미를 졸업? 그거 해야 하나?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순전히 비숏을 따라서였다. 입학할 때에 목표 두 가지. 그녀와 화해하거나 다른 남주와 이어지지 못하게 막는 것.

둘 중 하나라도 이룬다면 더는 아카데미에 재학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아카데미를 자퇴할까? 자퇴하더라도 졸업한 후의 생활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다.

“저도 대공님과 비슷할 겁니다. 아마 영지에 있겠죠.”

“그럼 이렇게 얼굴을 자주 볼 날은 얼마 안 남았겠어. 영지가 꽤 멀지 않나?”

“예, 뭐 그럴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한 번은 내 영지에 와주게. 주방장에게 음식 하는 법을 가르쳐줘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리 하죠.”

아가레스는 이번 학기가 마지막.

이를 떠올리니 순식간에 1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원작에서도 후반부였다. 이제 이 이후부터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했다.

괜찮다. 내 상황은 더할 나위가 없이 순조로웠다.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게 어색할 정도. 하던 대로만 하자.

* * *

해가 진 밤에 비숏은 홀로 실험실에 남아 있었다. 제프린이 떠나고부터 실험실에 머무는 시간이 더더욱 늘어났다. 잠을 자고,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진 온종일 실험실에서 살았다.

최근 새로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드는 일을 해냈지만, 이를 순수하게 제 능력이라 여기지 않았다. 치료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의 착상은 라파엘이 해낸 것이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새로운 일에 발을 들이밀었다.

너무 막막하고, 깜깜해서 오히려 더 의욕이 솟았다.

그녀는 곧바로 연금술 연구소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오늘 읽고자 모아둔 책이 수두룩했고, 하기로 정해둔 실험이 가득했다. 하룻밤을 새워도 부족했다.

그리고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는데, 책을 한 권 쓰고 있었다. 마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연금술은 큰 비용이 드는 학문이었다.

마음껏 공부하거나 실험하지 못할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연금술의 접근성을 키우기 위한 책이었다. 이번에 그럴듯한 일 하나를 해냈지만, 자신의 경력이나 연차 등을 감안하면 벌써 책을 펴낸다는 게 내심 창피하기도 했다.

“안에 있습니까?”

그러던 중 모리스가 실험실의 문을 두들겼다. 그가 누구를 시킨 게 아니라 직접 행차했다. 내심 놀라면서도 관자놀이부터 두통이 발생했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는 비숏과 눈이 마주치는 즉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영애께서 그분과 미래를 함께할 사이인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빠르게 소문은 모두 정정하겠습니다. 그간 입으신 피해를 보상하고 싶은데, 원하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빨라도 너무 빨랐다. 라파엘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채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일이 깔끔하게 해결했다.

라파엘이 과연 뭐라고 했을까? 뭐라 말했길래 모리스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와 사과하는 걸까?

비숏은 궁금한 게 많았는데, 모리스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불편해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보상은 필요 없으니 일을 끝내주십시오.”

“사과를 받아주셔 감사합니다. 죄송했습니다.”

모리스는 비숏에게 눈을 깐 채 물러났다. 그를 보며 비숏은 생각했다. 그분과 미래를 함께하다니? 라파엘이 자신을 위해 나섰으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리스가 오해했다고 쳐도 라파엘이 모리스가 그리 어려워할 급은 아니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말자.’

아카데미 이후 라파엘의 행보를 보면 뭐가 됐건 간에 의도한 바는 아닐 거다. 지금 몰두 중인 일에 에너지를 쏟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 *

나는 아가레스와 헤어지고 비숏과의 일을 깨끗이 해결한 후에는 어떡할까 고민했다.

점점 더 그 미래에 가까이 다가갔다. 곧 있으면 현실이 된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놀고먹어야지 상상만 했는데, 막상 뭘 하며 놀고먹을지가 의문이었다. 뭘 하지? 이를 한 명씩 붙잡아놓고 의견을 나눴는데, 마침 이안도 나와 상황이 비슷했다.

그도 카테인이 죽기 전까지 힘썼던 일을 마무리하고자 노력했는데, 정작 본인이 즐기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우리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즐길 거리가 없으면 삶이 평탄하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해서 시간이 날 때면 종종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먹어본 적 없는 새로운 음식을 맛보았고, 공연 따위를 관람했다.

오늘도 그러했다.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이라는 이유로 생소한 식당에서 식사했고, 본 적 없는 종류의 공연장을 방문했다.

공연을 본다는 데 의의를 둔 거라 내용은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속으로는 다른 감상을 품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

비숏과의 관계는 원만하다 볼 수 있었고, 그녀가 어느 남주와 이어지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굳이 가능성 있는 인물을 꼽자면 제프린이었는데, 그와 한 약속이나 그의 부탁을 들어줬던 걸 감안하면 별일 없을 거다.

언제 한 번 날을 잡고 말해볼까?

그가 비숏과 이어진다면 그게 다 누구 덕분이겠는가? 다 내 덕이었다. 내가 다른 경쟁자들을 치워줬기 때문에 제프린이 잘 된 거 아니겠는가? 만약에 제프린이 비숏과 이어진 후에 나를 공격하거나 그런다면 그는 정말 정말 나쁜 놈이었다.

이제 대부분의 일이 다 마무리에 들어갔다. 막 이곳에 떨어졌을 때 세웠던 목표에 근접했다. 더 바랄 게 없다.

얼마 남지 않은 끝.

내심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사이에 공연은 끝이 났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중간고사를 최악으로 보낸 탓에 낙제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말고사만큼은 신경 써야 했다. 귀족을 위한 학교인 덕에 어떤 점수를 받더라도 유급을 하거나 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기본이란 게 있지 않나?

중간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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