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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88화 (88/125)

제88화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건 예상보다 험난했다. 1학기 때 시험을 워낙 수월하게 보낸 터라 이번에도 시간만 좀 투자하면 양호하겠지,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제가 있었다.

지난 시험을 던지다시피 놓았는데, 기말고사 시험 범위에 직전 시험의 범위가 포함되었다. 공부해야 할 분량이 2배로 늘었다.

하루에 남는 시간 없이 책을 편 채 펜을 잡고서 보낸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시간을 갈아 넣으면서도 더 중요한 일은 해야만 했다.

아카데미 시험보다 확연히 비중이 높은 일.

마요네즈였다.

주말에 시간을 내 마요네즈를 구해왔다. 이를 설명하니 아는 사람은 종종 있었는데, 대중화된 양념은 아니라 발품을 팔아야 했다.

이건 아가레스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하는데, 기말고사가 끝나는 즉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자리를 갖기로 했는데, 그 식사의 메뉴가 바로 치킨이었다.

아가레스도 치킨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전에 지나가듯이 말한 어울리는 양념과 함께 치킨을 먹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이를 들어주고자 시장에서 마요네즈와 고추를 샀다. 이번에는 고추를 빻는 대신에 잘게 썰어 마요네즈에 넣어 나름의 양념을 만들었다.

아가레스에게 내주기 전에 먼저 양념의 맛을 확인하니 상상한 것 그대로였다. 너무 맵지 않고 딱 좋았다. 양념을 완성한 후에 아가레스를 호출했다. 막 튀긴 후에 먹어야 제맛이니 닭은 튀기기 전이었다.

“준비는 다 홨는데, 닭은 튀기기 전이라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이렇게 신경 써줘서 고맙네. 가기 전에 한 번은 먹어보고 싶었어. 자네가 아니면 또 어디 가서 이런 음식을 먹어보겠는가?”

“아뇨, 뭘. 수고가 많이 드는 일도 아닌데요.”

전에 말했다시피 아카데미의 시험 성적은 순전히 자기만족이었다. 여기서 받은 성적은 내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달랐다. 힘센 귀족인 그와의 인연은 끝까지 나와 이어질 텐데 마지막까지도 좋은 인상을 남겨야 했다.

나는 닭에 기름에 튀겼다. 이제는 이것도 내심 능숙해져 손에 익었다. 불의 세기 조절도 몇 번 하고 나니 더 적합한 온도를 찾았다. 닭을 튀기면 튀길수록 더 바삭한 치킨을 만들어냈다.

가끔 치킨을 먹으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거로 식당을 차려 장사하면 잘 될 텐데.

확실한 돈벌이 수단이 있으니 내심 써먹고 싶기도 했는데, 드는 품이 컸다. 그에 비해 내가 이미 벌어들이고 있는 수익에 비할 바는 아니니 구태여 일을 벌이기는 귀찮았다.

그렇게 왜 내가 치킨집을 차리지 않는지 정당화하는 사이에 치킨이 완성되었다.

준비해둔 양념과 함께 치킨을 내미니 아가레스가 조각 하나를 들어 양념에 푹 찍었다. 그는 양껏 양념을 붙인 치킨 조각을 먹었다.

그의 입에서부터 닭 씹는 소리가 바삭거리며 새 나왔다. 그의 눈썹이 왼쪽 오른쪽 꿈틀거리고, 저작 활동이 빨라졌다. 그는 닭을 다 씹어 먹은 후에 말했다.

“확실히 양념이 잘 어울려. 떡볶이를 만들 때 쓴 양념이 들어간다고 하길래 내심 매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끝에는 혓바닥이 따갑기는 해도 손이 계속 가는 맛이야.”

“하하, 예.”

“그래서 내 영지에는 언제쯤 방문해줄 건가? 언제 내 주방장에 음식을 알려줄 거야?”

“제 솜씨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방학 중에 시간이 나는 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거 좋군.”

나는 내 과제였던 치킨을 마친 후에 아가레스의 주변을 훑었다. 그가 가져온 술병의 숫자를 훑어보며 내심 기겁했다.

그는 오늘이 나와 술을 마시는 마지막 날이랍시고 어마어마한 양에 술을 챙겨왔는데, 도수도 아주 높은 물건이었다.

“이걸 다 마실 생각입니까?”

“으음, 그럼.”

아무래도 닭 한 마리로는 부족할 듯했는데, 아가레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안주 없이 술만 마시는 게 익숙한가 본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술을 마시며 치킨을 먹자 닭은 금세 동났고, 우리는 술만 홀짝였다. 아가레스가 1병을 비울 때 나는 고작해야 절반쯤 마셨는데, 속에서부터 열이 올라왔다.

이제부터는 자중하자.

아가레스와 술을 마실 때마다 이렇게 취하면 꼭 한 번씩 헛소리를 내뱉고는 했다. 늘 입을 조심하며 할 말 안 할 말 구분하며 살았는데, 술이 들어가면 그게 자중이 안 됐다.

“자네에게 말해줄 게 있네. 이전의 나는 사람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했네. 아니, 정확히는 이득을 취한다는 쪽이었지. 명분만 있다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였어.”

거기에 뭐라 해줄 말이 없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도 그게 잘못됐다고 여기지는 않아. 해야 할 일이었지. 그런데 자네가 그토록 내가 사람 죽이는 걸 싫어하니 궁금해서 말이야. 자네는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나?”

“죽는 게 낫다 싶은 놈들도 있죠. 죽여야 할 상황도 있겠고요. 그러면 저도 죽일 겁니다. 그런데 제가 대공님께, 음··· 사납게 굴었던 건 그거죠. 그 선이 너무 낮아서요.”

“선이라?”

“지나가다가 어깨 툭 부딪힐 수 있는 건데, 대공님은 부딪힌 사람을 죽이러 들지 않습니까?”

아가레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고는 표정을 찌푸렸다.

“누가 지나가다 날 어깨로 친 적이 없어 사례를 들지는 못해도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겠어. 그게 무슨 괴상망측한 소리인가?”

“예, 뭐 말도 안 되죠.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겁니다. 별것도 아닌 거로 과민하게 사람을 죽이신다고요.”

“죽이는 게 편해서 그래. 어중간한 위협이나 협박은 반발만 사네. 죽이지 않고 살려두면 복수한답시고 덤벼들지. 나는 영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이 주제로 아가레스를 설득할 수 있다고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내가 틀린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워낙 불편한 소재라 말을 돌리고자 다른 이야기를 했다.

“전에 그거 기억하십니까? 제가 어떻게 아마데우스의 이름을 알았는지.”

이건 좀 흥미로웠는지 아가레스가 눈을 빛냈다. 반대로 나는 자책했다. 여기서 이걸 왜 들먹였지? 일단 화제부터 바꾼다는 마음에 되는대로 입을 놀렸다.

이게 문제야.

자꾸 계획에 없던 일을 벌리네.

“그··· 이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게 되면 대공님께 제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 그 말은 아는 이가 자네밖에 없다는 거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그거 고맙네.”

어차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이런 약속쯤이야 맘껏 남발해도 좋았다.

* * *

아카데미는 더할 나위가 없이 요란했다.

귀족들답게 수군거리고 떠드는 걸 좋아했는데, 오늘은 그 소음으로 아카데미가 꿀렁꿀렁 울렸다.

황실에서 나비에가 돌아왔다. 황태자와의 약혼을 약속받은 채 돌아왔으니 금의환향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소문의 주인은 아침부터 나를 찾아왔다. 얼굴은 어느 때보다 윤기가 났고, 얼마나 표정을 관리하고 다녔는지 가만히 있는데도 입꼬리가 광대에 걸렸다. 그게 아니면 순수하게 그만큼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환영해.”

나비에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눈썹과 눈, 코, 입 따위가 각기 다른 벌레인 듯 움찔거리며 자유분방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흐어흐어흐하하, 하고 웃으며 내게 황실에서 받았다는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준비해온 건 이거보다 많은데, 일단 맛부터 보시라고. 또 선물은 손으로 주는 게 기분이 나니까요. 아마 드셔보신 적 없는 맛일 거에요.”

선물을 받으면 늘 그렇듯 상대가 만족할 수 있게 반응해야 하는 법. 나도 그녀처럼 눈, 코, 입을 분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아무래도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한 모양. 평범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어떻게 됐어?”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만을 보고 황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 실상을 물었다.

정말 카르테아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게 아니라 그녀가 기분 좋게 자랑할 수 있게 멍석을 깔았다.

“그게 있죠? 정말 잘 됐어요···. 폐하의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거든요? 아. 아니, 이게 폐하의 건강이 나쁘다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알고 있던 사실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런 설정이 있었다. 황제가 죽기 전에 카르테아의 혼사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 카르테아가 아카데미 졸업 전에 배후자를 찾으려 하게 된 배경이었다.

“알아, 무슨 뜻인지, 빨리 황태자님의 아내를 찾아야 한다는 거잖아.”

“네네! 맞아요. 그거죠. 그래서 황실로 가 여러 시험을 받았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준비해둔 시험이라 대체로 정답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자신이 있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제 가문이요.”

나비에의 가문, 러브원은 백작가였으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다. 근래에 들어 사업으로 제법 큰돈을 벌기는 했어도 예비 황후의 씹을 거리로는 충분했다. 황후 자리에 자신의 친인척을 꼽으려는 이들은 수두룩하니까.

“그때 카르테아 님이 도와주셔서 잘 해결됐죠.”

“도와주다니, 어떻게?”

내 말에 나비에의 눈동자가 위로 굴러갔다. 그때 일을 상상하는 듯했다. 그녀는 히죽거리더니 말했다.

“이건, 너무 길어서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아카데미로 돌아오자마자 찾아뵌 건 제일 먼저 이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였거든요. 줄 선물도 있었고요. 하하··· 오늘은 이만 쉬러 가고 싶어서요. 조만간 날을 하루 잡죠.”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 않은 내용이라 내심 잘 됐다 싶었다. 냉큼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래, 그러자.”

“그럼 다음에 봐요.”

그렇게 인사하고 나비에와 헤어졌는데, 깜빡한 게 있었다.

“그래서 약혼은 언제야!”

“다음 달이요!”

머리 안에 달력을 만들어 날짜를 세어보니 기말고사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아카데미의 방학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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