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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89화 (89/125)

제89화

나비에와 카르테아의 약혼식이 기겁할 만큼 빠른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황제의 건강이 나쁘기도 했고, 약혼식이 있기까지의 나비에가 받을 스트레스 때문에 카르테아가 배려한 영향도 있었다.

최근 수십 년간 러브원 가문의 힘이 다소 커졌다고 해도 중앙에서 힘을 쓰는 소수 귀족과 황족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단숨에 황후를 배출하는 가문으로 러브원이 성장하니 여러 곳에서 사람이 붙고, 공격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로 나비에가 드러내지는 않아도 꽤 괴로워할 걸 카르테아가 신경을 쓴 듯했다. 약혼식 이후라면 어지간한 귀족과 황족들은 다 잠잠해질 테니 말이다.

나는 나비에가 선물로 준 과자 세트와 함께 기숙사로 돌아와 책을 보며 과자를 씹었다. 나비에가 내 취향을 아주 잘 때려 맞췄다.

그게 아니면 워낙 고가의 다과라 그런지 누가 먹어도 맛있는 걸 거다.

다양한 종류의 과자 하나하나가 기가 막혔다. 그렇게 과자의 맛에 즐거워하며 기말고사를 대비하려 했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간 있었던 일들의 감상이 들었다.

어떻게 하는 일마다 이렇게 잘 풀릴까?

최근 몇 달간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니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없었다.

갑작스럽게 비숏이 마음을 달리 먹고 나를 공격해오기는 했어도 오히려 이마저도 결국에는 내게 이롭게 풀렸다.

만약에 비숏이 계속 잠잠히 있었다면 평화롭기는 했어도 내심 불안이 자랐을 거다. 언제 그녀가 변할지 모르니 조마조마하게 그 일만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더 좋았다.

그녀와의 은원 하나하나를 직접 풀며 변수를 줄인 셈이었다.

와그작.

과자 하나를 더 씹으며 몇 달만 더 이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아니, 몇 달씩도 필요가 없다.

비숏과의 은원 몇 가지만 더 풀어도 만족할 텐데.

* * *

기말고사 시험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내용을 점검했다.

시험을 준비하며 잡은 목표는 중간쯤 하는 것이었는데, 암만 봐도 그건 어려울 듯했다. 중간이라도 가려면 시험에서 반타작은 해내야만 했다.

수강생 대부분이 귀족들이라면 반타작보다 다소 점수가 낮아도 괜찮았으나 검술학부의 수업은 달랐다. 대다수가 평민이다 보니 다들 시험 성적에 연연했다. 여기서 받은 성적이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탓이었다.

중간고사의 시험 점수가 0점에 가까웠으니 기말고사가 만점에 가까워야 반타작이라도 해낸 것인데, 영 자신이 없었다.

뭐 망치면 어떻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시험장에 들어가 문제를 풀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과목마다 두세 문제씩은 생소한 걸 보아하니 망한 듯했다.

괜찮아. 이미 틀린 걸 뭐 어쩌겠는가?

훌훌 털어버리고는 기숙사로 돌아가 푹 잤다.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비에의 약혼식을 맞이했다. 나비에의 소망과 카르테아의 고집 덕에 둘의 약혼식은 아카데미의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약혼식이 거행되기 전 구경을 한답시고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은 성대했다.

나비에가 카르테아에게 꽃을 선물했던 그 축제처럼 꾸몄는데, 그때보다 더했다. 그날은 축제라는 명목 때문에 아카데미 전체를 꾸민 데 반해 오늘은 그 재화를 모두 광장에 쏟아부었다. 광장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 온갖 색상의 꽃이 즐비했다.

약혼은 결혼을 약속하는 행위.

진짜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돈을 써댄 걸 보면 결혼 때는 대체 뭘 할 건지 눈알이 핑핑 돌았다. 결혼이야 황궁에서 할 텐데 황궁을 꽃으로 뒤덮을 건가?

그렇게 한참을 놀라고 있을 때였다. 지팡이를 든 장정 수십 명이 이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아가레스가 습격받은 일을 계기로 생긴 일회용 출입증을 가슴에 붙인 걸 보아하니 아카데미의 학부생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팡이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지팡이는 마법사가 자기 수준 이상의 마법을 쓸 수 있게 보조했는데, 워낙 고가의 물품이라 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뻗은 후 주문을 외웠다.

뭐지?

뭘 하려는 걸까?

기대감을 품고, 잠시간 기다리자 그들의 지팡이 끝에서 새하얀 탄환이 날아갔다. 각자 쏘아낸 탄환은 하나로 뭉쳐 크기를 합치더니 가속했다. 탄환은 그대로 구름에 부딪혔다. 그러자 구름이 그대로 소멸했다.

와.

이거 하러 왔구나.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기는 했다. 하지만 색상이 새하얀 걸 보아하니 적어도 비가 내리지는 않겠다 싶었는데, 저게 불안했던 건가?

아니 어쩌면 햇빛이 쨍쨍하지 않은 게 불만이었을 수도 있었다. 제국은 태양신을 섬기고, 햇빛은 태양신의 축복이니 그 축복을 많이 받고자 하는 걸 수도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특별히 햇빛이 쨍쨍해야 했겠지.

마법사들은 그대로 입구 쪽으로 가며 가슴에 붙인 일회용 출입증을 뜯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약혼식을 보고 갈 만도 하려 만 저대로 떠나니 그거대로 기이했다.

정말 저거 하러 여기까지 왔구나.

완드가 아니라 스태프 형태의 지팡이를 만드는 데는 정말 많은 노력과 값비싼 재화가 들어 마법학부에서도 가진 이들은 교수급쯤 되는 이들뿐이었다.

아카데미에 방문한 마법사 하나하나가 스태프 형태 지팡이를 들고 있는 걸 보아하니 어디를 가도 알아주는 이들이었을 텐데, 구름을 지우려 여기까지 몰려왔다.

어우.

굉장하네.

스케일이 대단해.

황태자쯤 되면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 * *

약혼식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비에였다.

라파엘은 나비에를 찾던 중에 발을 멈췄다. 그는 멀리서 나비에를 보고는 얼굴을 갈아 끼운 듯하다고 느꼈다. 지난번 축제 때도 무시무시한 화장을 해내더니 오늘은 그때보다도 더했다. 돈을 2배로 더 줬겠지.

그녀는 어느 여성과 대치 중이었다. 나이는 30대 초반에서 50대 후반 사이. 입은 의복과 장신구를 보아하니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의 부인이었다.

‘아, 누군지 알겠다.’

그녀는 나비에의 친모였다. 원작에서도 직접 등장하기보다는 설명만으로 나왔던 인물. 나비에보다 확연히 키가 컸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아르바이트하는 중에 눈 마주치면 시선을 깔고 싶게 만들어지는 인상.

나비에와 그녀의 친모, 둘은 화기애애하게 떠들었다. 표정도 밝았다.

그런데 멀리서 보고 있자니 괜히 몸이 긴장됐다.

대화하던 중, 나비에가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는 친모의 손을 탁 쳐냈다.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는데, 둘은 말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웃었다.

나비에의 변명하듯 말하는 목소리가 커 여기까지도 들렸다.

“머리 장식이 망가질까 봐요. 하하. 다들 고생해서 만져주신 건데, 그러면 아깝잖아요?”

나비에의 동의하라는 어투에 친모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몇 가지 말을 더한 다음에 멀어졌다.

라파엘은 혹시라도 나비에의 친모와 엮이게 된다면 몹시 피곤해질 것을 예감해 한참을 텀을 두고 나비에를 찾았다.

나비에는 라파엘과 눈이 마주치자 좀 더 편히 웃었다.

“기분이 어때?”

“좋아요. 아주 좋아요. 제가 얼마나 기쁜지 말씀드려도 이해 못 하실 만큼.”

나비에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괜히 더불어 찡했다.

“방금 대화한 그분은 어머니셔?”

“아마도요.”

“아마도라니?”

“음··· 제가 어릴 적에 그렇게 냉혹하게 대하시다가 오늘 같은 날에는 꾸역꾸역 얼굴을 비추시는 걸 보면 제가 입양한 자식일 수도 있다 싶어서요. 제 어머니가 아니실 수도 있는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네요.”

나비에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줘가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쌓인 게 많은 듯했다.

“아버지는?”

“그러게요. 제 덕이라도 보시려면 오늘 같은 날이라도 잘 보이셔야 할 텐데 소식이 없네요. 아마 진짜 결혼식도 아닌데, 무거우신 몸을 움직이는 게 불편하셨나 봐요.”

“좋은 날이잖아.”

“네! 아주 좋은 날이죠. 그래서 저도 무척 기분이 좋아요.”

더는 건드리는 게 좋지 않을 거다. 화재를 돌리고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그거 기억나? 황태자님께서 도와줬다고 한 거.”

“아, 제가 말씀드리는 걸 잊고 있었네요. 카르테아 님이 저를 어떻게 도와주셨는지요.”

“뭔데?”

나비에의 표정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황제는 카르테아와 나비에를 호출해 이야기했다.

다소 권세가 약한 영애를 황후로 맞이하는 게 어째서 힘든 일인지,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지 따위를 설명했다.

황제의 입에서 말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나비에는 장기 하나하나가 찢어지는 듯했다. 지금까지의 노력과 고생이 허투루 넘어가나 걱정되기도 했다.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게 밀어붙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고통을 감내하게 했으면서 여기까지와서 발목을 붙잡는 건지 화가 났다.

감정을 통제하고자 시도했다.

여기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황제에게 나쁜 인상을 줄 게 뻔하니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뭘 해야, 무슨 말을 해야 황제에게 호감을 심을 수 있을까?

그러던 때였다.

카르테아가 나비에의 손을 잡고 귀에다 말했다.

‘너 없이 나아가는 게 쉬운 길이라면, 나는 기꺼이 어려운 길을 택하겠다.’

그는 이를 황제에게 다시금 똑같이 말했고,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나비에는 그날의 일을 라파엘에게 말하던 중에 아랫입술을 질끈 씹었다.

“괜찮아?”

“네.”

해냈다. 이루어냈다. 어려서부터 현재까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보내왔던 나날이 의미가 있었다.

“괜찮아요. 좋아서 그래요. 좋아서 우는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화장.”

“아아··· 마법으로 미리 처리해놨어요. 어차피 울면 망가질 게 뻔하잖아요. 울 것도 뻔하고.”

라파엘은 참 별 게 다 있네, 하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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