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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90화 (90/125)

제90화

황태자의 약혼식.

이게 아카데미가 아니라 황궁 따위에서 열렸다면 정말 온갖 사람들이 다 몰렸을 거대한 사건이었다.

카르테아와 나비에의 고집 때문에 둘의 약혼식은 아카데미에 열린 탓에 사람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

아카데미의 재학생과 교수진. 거기에 나비에와 카르테아 둘의 지인 일부만이 약혼식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기껏해야 수천 명의 사람이 광장에 모였다.

그 무리의 중심에는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길 꽃길 하나가 있었다.

각양각색의 꽃잎으로 만들어낸 길이었다. 저마다 다른 색의 꽃잎은 다른 꽃잎과 조화를 이루며 제 미모를 뽐냈다.

잠시 힐끗 보고 즉시 눈을 감아도 그대로 망막에 남을 강렬한 색감.

그 길을 밟으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돈을 바른 나비에가 등장했다.

입이 떡 벌어지게 풍성한 드레스는 아가레스가 떠올랐다. 마치 갑주를 두른 듯 프릴이나 레이스 따위가 꽉 찼고, 옷의 색감도 볕을 받아 쨍하게 번쩍였다. 푸른색 옷감이 거울처럼 빛을 반사했다.

저걸 하려고 구름을 지운 거구나.

머리털에도 천과 보석을 가져다 대 장식했는데, 오늘따라 햇빛이 강해 사방으로 빛을 반사해댔다.

얇은 머리카락 사이로 하늘에서 눈처럼 내리는 꽃잎이 머물다 흘러내렸고, 일부는 사이에 끼였다.

각지의 기술자들이 달라붙어 만들었을 얼굴도 위아래에 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인형 같았다. 화장 기술만 따진다면 현대에 결코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카르테아 쪽도 근사했다. 현대에 제복 같은 옷에 수를 놓고, 여기저기 번쩍거리는 걸 보면 비슷하게 돈을 쓴 듯했다.

하늘에서 꽃이 삐라처럼 쏟아졌다. 대체 누가 꽃을 뿌리고 있는 걸까? 꽃이 떨어지는 높이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 걸까 궁금했으나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저 높은 곳에서 구름도 없이 꽃잎이 흘러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역시나 마법이었다.

투명화 마법은 극단적으로 어려운 마법인데, 인식은 좋지 않아 배우는 이가 드문 마법이었다. 마법사 중에서도 고급 인력이었다.

그런 마법사가 하늘에서 꽃을 뿌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은 기본이고, 챙겨간 꽃 가방까지 마법을 걸어 꽃잎을 뿌릴 때마다 그 꽃잎에만 마법을 해제했다.

지금 보니 꽃도 평범한 꽃이 아니었다. 저것들도 사방으로 빛을 뿜어댔다. 무슨 도구를 써서 꽃잎 하나하나를 코팅했다. 그게 아니라면 코팅하는 액체가 든 통이 있어서 저걸 그대로 다 넣었다 뺀 거겠지.

뭐가 됐건 간에 어마어마한 수고가 들어간 작업이었다.

약혼이 이런데, 결혼 때는 대체 뭘 하는 걸까?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역시 돈 지랄 하나는 화끈하구나.

내가 경매장 때부터 알아봤다.

둘의 약혼식은 축제보다 더 축제 같았다. 축제 때는 학부생 수준의 팀을 불러다 곡을 연주했는데, 오늘은 오케스트라 하나를 통째로 데려왔다. 건반에도 마이크 같은 뭔가를 달아서 연주자의 터치마다 음이 웅장하게 울렸다. 이를 관악기 혹은 현악기 따위 등이 받았다.

나비에는 꽃길을 걸으며 카르테아에게 걸어갔다. 눈의 위아래에 그려놓은 그림이 워낙 화려해서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는데, 두 눈에 힘이 빡 들어갔다. 안구 주변 근육이 긴장했다. 아까 미리 눈물을 쏟아낸 게 효력이 있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카르테아에게 걸어갔다. 둘은 눈을 마주치더니 서로를 보고 피식 웃었다. 괜히 보고 있기 힘든 장면이라 시선을 돌리니 이안이 날 툭 쳤다.

애는 언제 왔냐 싶었는데, 그가 말했다.

“괜찮아?”

무슨 이야기인 알고 있어서 더 골치가 아팠다. 내가 뭐라고 떠든들 이안은 믿지 않을 거다. 이걸 설득하려면 내 치부까지 들춰야 하는데, 그럴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냥 오해 좀 하라고 두지 뭐.

“괜찮으니까 그만 좀 해. 이젠 지겹다. 진짜.”

“미안. 화났구나?”

은근한 어조로 놀리는 꼴을 보아하니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재밌는 듯했다.

나는 대충 콧방귀를 낀 후에 머리를 흔들었다.

때마침 카르테아가 나비에한테 반지를 내밀었다.

처음 약혼식 때도 반지를 준다는 말에 뭔가 의아하기도 했다.

그럼 결혼식 때도 반지를 주는데, 약혼식 때 반지를 미리 줬다가 약혼식이 끝난 후에는 돌려받았다가 결혼식 때 다시 주는 건가?

아가레스에게 무식하다는 비난을 듣고서야 그냥 반지를 2개 주는 거라는 걸 알았다.

카르테아가 내민 반지는 휘황찬란했다.

결혼반지와 달리 약혼반지는 기념품 같은 느낌이라 더 그러했다. 일상에서도 끼고 다니는 결혼반지와는 달리 약혼반지는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는 장식품이었다.

다른 장신구 혹은 의상과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았고, 실제로 착용하고 다니지도 않으니 센터스톤 따위가 암만 큼직해도 무리가 없었다.

그래도 저건 과한 게 아닐까?

뭔지 모를 커다란 보석에 또 자그마한 알갱이들이 덕지덕지 박혀 있는데, 각 보석의 안에 발광체가 들어있는 듯 은은하게 빛을 뿜었다.

뭐 본인이 아주 기뻐하니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 후 몇 가지 과정을 더 거쳐서 나비에와 카르테아가 입을 맞추려는데, 누가 내 눈을 가렸다.

누군지는 뻔했다. 놈의 손을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도 간단했다.

하지만 귀찮았다.

그래, 그래라. 나도 보고 싶지 않았다.

* * *

카르테아와 나비에의 약혼식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원래라면 어제부터 짐을 쌌을 텐데, 오늘 있는 이벤트 때문에 하루를 더 머물렀다.

어차피 가져가도 보지도 않을 책 따위는 그대로 남기고, 몇 벌 되지도 않는 옷도 남기니 짐이랄 게 없었다.

그냥 몸만 움직일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지금 바쁘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야?”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부로 방학이니 떠나시기 전에 말하고 싶습니다.”

비숏이었다.

금일 오후에는 황태자의 약혼식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는데도 그걸 무시하고 연금술에 몰두했나 보다.

그녀는 실험실에서 입던 하얀 가운을 입은 채 내 기숙사를 방문했다.

“시간은 괜찮아. 무슨 이야기야?”

“오래 걸릴 거 같은데, 잠시 자리를 옮겨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어디로 갈까?”

“카나로 가죠.”

비숏의 입에서 의외의 장소가 나왔다. 별건 아니고, 아카데미 주변의 카페였다.

카나가 있는 곳은 아카데미 밖의 건물이라 조금 더 다양한 종류의 음료와 다과를 팔았다. 보통 혼자서는 잘 안 가고, 친구가 있는 학우들만 가는지라 비숏이라면 그 존재도 모를 줄 알았다.

어쩌면 아카데미에 친구가 한 명쯤은 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카나를 향해 걸었다. 비숏은 여전히 실험용 가운을 입은 채였다.

카페에 들어서는 비숏은 알코울이 들어있는 음료를 주문했다. 내심 의외였는데, 애도 귀족이니까 집안에서 교육을 받았겠지, 하고 같은 종류로 따라 주문했다.

“요 며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카데미 입학 전의 당신과 입학 후의 당신은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아 됐습니다. 아카데미 이후로는 당신에게 받은 것밖에 없어서요.”

비숏은 다소 평소보다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떠드는 사이에 종업원이 음료를 가져와 나와 그녀 앞에 내놓았다. 나는 음료를 홀짝인 후에 답했다.

“그래서?”

“그렇다고 과거에 있었던 일을 저 혼자 덮기에는 억울해서요. 명확하게 하고 싶습니다. 저희 관계를요.”

“그럼 화해할까?”

내가 은근한 어조로 말하자 비숏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걸 보니 가능성이 있는 듯도 했다.

“네, 저도 그걸 생각하고 찾아왔습니다.”

“응?”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신다면 과거에 있었던 일 모두 없던 거로 해드리죠.”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뭐든지 해줄 준비가 끝냈다. 워낙 관심이 가는 일이라 저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쏠렸다. 대가리를 살짝 내미니 그녀가 웃었다.

“무슨 부탁? 뭐든지 말해봐.”

“약속한 겁니다. 뭐든지 들어주시는 거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리한 게 아니라면.”

“네. 그 범위 안에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뭔데? 뭐길래 그렇게 머뭇거려?”

비숏은 음료를 홀짝이더니 또 킥킥거렸다.

“제가 생각해봤습니다. 당신과 있었던 악연을 끊는 대신에 저 나름대로 만족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이왕이면 당신도 마음고생 좀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내가 눈만 깜빡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해두면 당신도 제가 언제 무슨 부탁을 할지 모르니까 찜찜하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화해하는 건 좋아요. 그런데 당신도 한 번씩 괜히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걱정거리가 생기기도 했으면 하고 바라서요. 그래서 떠올린 방법이 이거에요. 당신한테 빚을 하나 남겨두는 거요. 받아들이실 건가요?”

“당연하지.”

나는 활짝 웃었다.

원작을 읽어서 그래도 비숏의 본성이 선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 일은 없을 거다.

“네. 그럼 우리 화해한 거네요.”

비숏이 손을 내밀었다. 뭐하자는 건가 하고, 얼굴을 힐끗거리니 그녀가 말했다.

“화해한 김에 악수 한 번 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발끝에서부터 혈류가 혈관을 타고 질주하며 머리로 치솟았다. 심장이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일했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혈액 순환이 잘 돼서도 아니었고, 알코울을 마신 탓도 아니었다. 그렇게 염원했던 순간이었다. 죽을 것처럼 짜릿했다.

나는 살아남았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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