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이곳에 떨어진 이후, 어느 하루도 지금처럼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비숏과 화해했다.
최초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간 나를 괴롭혔던 공포,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물리쳤다.
비숏과 악수를 하고 수십 분이 지났는데, 아직도 얼떨떨했다.
이게 되는구나.
이제 학교를 뜰 준비를 하는 중에 아가레스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잉그레드에 가 그의 주방장에게 두 음식의 레시피를 가르쳐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난 집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아가레스를 찾았다.
“자네 영지를 먼저 들리지 않아도 괜찮겠나?”
“네. 아카데미에서는 차라리 북부 쪽이 더 가까우니까요.”
“거리만 따진다면 그래도 길을 감안하면 이쪽이 더 오래 걸릴 텐데.”
“왔다 갔다 하기 힘듭니다.”
“그래, 그러면 좋네. 바로 가지.”
아가레스는 거듭해서 자기 주방장에게 레시피를 가르쳐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내 음식 맛이 괜찮다는 칭찬쯤으로 여겼는데, 그게 반복되니 진심이란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의 학기가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앞서 아가레스와 함께 북부로 향했다. 그 이유는 앞선 대화처럼 집에 갔다가 잉그레드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가는 동선 낭비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는 마음 놓고 쉬다가 가게. 지난번에 토벌 이후로는 마족 혹은 마물 따위가 나타나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어. 나도 칼을 들고 나서기보다는 저택에 있을 테니 자네도 더 편할 거야.”
“이번에는 손님으로 맞아 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그러니 며칠 더 머물게. 지난번보다.”
“예, 그러죠. 저도 다른 일이 없으니까요.”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어쩌면 이번이 아가레스를 만나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꼭 나중에 연락하고 만나자고 약속했던 친구와 연이 끊기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들보다야 나와 아가레스 사이가 가까웠으나 그만큼 거리가 멀었다.
나와 아가레스 모두 영지의 영주였다. 지금이야 이렇게 영지를 비워두고 오랜 시간 떠나 있기는 해도 나이가 들고 자리를 잡으면 또 변할 거다. 현대와 달리 휴대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니 서로 연락하기는 더 힘들 거고.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심으로 그와의 친분이 그렇게 끊어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 관계를 그렇게 친구로만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나도 그도 꽤 힘이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귀족이었다.
아가레스는 북부의 대공이었으니 더 말할 게 없고, 나도 꽤 부자였고, 어린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에 올라 꽤 유명했다. 살다 보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할 날이 또 올 텐데 그날을 대비해서라도 아가레스와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북부로 가는 길.
지난 방문은 여름 방학 중이었다. 일 년 중에 가장 따뜻할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휙휙 불며 피부를 베었었다. 반면에 지금은 겨울 방학 시기. 일 년 중 가장 추울 때니 그만큼이나 북부의 바람이 냉혹하리라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여름보다도 기온이 높았다.
“이 땅에도 뭔가 변화가 있기는 한 가봐.”
그랬다. 전에 발을 디딘 이곳에 땅은 단단했고, 풀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잡초가 무성했고, 어떤 데는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잉그레드 영지가 농사를 짓지 못한 건 냉혹한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고작 기후 때문이라면 감자 따위를 키울 수도 있었다.
잉그레드가 작물을 뽑지 못한 건 땅의 힘이 약해서였다.
바람이 차갑고, 기온이 낮고,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 건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작물이 자란다는 건 어딘가 근본적인 변화가 있음을 뜻했다.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원작에서도 없던 일이었을뿐더러 내가 관여하지도 않았다. 아가레스 혼자서 해냈다는 뜻인데, 그가?
아가레스는 보면 볼수록 모자란 구석이 나타나 거구의 체구와 무시무시한 얼굴에도 위압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가 이런 일을 해냈다니 놀라웠다.
“의도하고 한 건 아니야. 전에 내가 말했었지. 여기에 마계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다고. 거기서 행패를 부린 게 도움이 됐나 봐. 그 이후로는 모든 일이 다 술술 잘 풀리더군.”
역시, 아가레스가 의도하고 한 일은 아니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그럼.”
잉그레드로 가는 길에 아가레스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처럼 많은 상비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 그들 중 오랜 시간 고생한 이들을 뽑아 소작할 수 있게 땅을 빌려주었고, 또 농사를 지어본 경험 없는 이들이 바로 잘할 수는 없는지라 외부에서 농사꾼들을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잉그레드에 도착했다.
“환영하네.”
“예.”
* * *
아가레스는 전에 예고했던 대로 날 손님으로 잘 대해주었다. 며칠간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잘 먹었고, 잘 쉬었다. 내 영지가 크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했던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체감했다.
푹 쉬었다.
여기서 늘어져서 쉬고 있자니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후에 영주 성의 주방장을 만났다. 이곳에서 요리하는 이가 한 둘은 아니지만,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반갑습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독특한 요리에 능하시다면서요? 오늘은 잘 배워보도록 하죠.”
주방장은 자그마한 키의 여성이었다. 이름은 차드. 아가레스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곳에서 일했다고 하니 그 경력이 족히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녀는 아가레스에게 미리 들었는지 오늘 해볼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준비해두고 나를 기다렸다.
“어려운 거는 없으니까 그냥 레시피만 알아도 바로바로 다 할 수 있을 거야.”
“네. 대공님으로부터도 그리 들었습니다.”
주방장의 앞에서 떡볶이를 먼저 했다. 이건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니 내가 보여준 후에 바로 그녀도 할 수 있을 듯했다. 그녀가 준비해둔 재료를 하나씩 이용해 떡볶이를 만들며 차드를 살폈다.
별거 아닌 일에도 그녀는 유심히 집중했다. 그럴 거 없는데. 그냥 준비해둔 재료를 다 한 데 섞으면 되는 거니까.
쉬이이이익!
양념이 끓으며 그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주방장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더니 바닥에다 재채기를 뱉었다. 혹시라도 침이 요리에 튀거나 내가 불쾌하게 여길까 걱정한 듯했다.
“음식의 향기가 참··· 강렬하네요.”
“향기가?”
보통은 냄새라고 할 텐데.
차드의 말에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고춧가루를 적게 쓴 탓에 그리 맵지는 않았다.
우리는 내가 만든 떡볶이의 맛을 보았다. 이곳 사람들에게 매운맛은 익숙한 게 아닐 텐데, 그녀는 크게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잘도 떡을 씹고 삼켰다. 나이가 들어 혀가 둔하거나 그녀 나름대로 다양한 음식을 먹은 듯했다.
“으음··· 대공님께서 왜 이 음식을 배우라 하셨는지 알 거 같아요. 독특하네요.”
떡볶이를 가르치는 일은 정말 별다른 게 없었다. 워낙 간단한 요리이다 보니 그녀는 곁에서 지켜본 것만으로 바로 비슷하게 떡볶이를 해내었다.
“가르치시는 데 소질이 있으시네요.”
“레시피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다음은 치킨이었다. 나는 전에 했던 것처럼 마법을 이용해서 불 조절을 했는데, 여기서 차드의 안목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른 도구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장작만을 이용해서 비슷하게 불의 세기를 맞추었다.
마법적인 불과 자연의 불은 그 온도도 달라서 불의 크기만 맞춘다고 될 게 아닌데, 이를 해냈다.
“눈썰미가 좋네.”
“제가 일한 경력이 있는데요.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그것보다 이런 음식은 어디서 배우신 건가요? 제가 그래도 이쪽 분야에 오래오래 일하면서 다양한 음식을 맛봤는데, 이런 건 처음이라서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역시 떡볶이보다는 치킨 쪽이 반응이 좋았다.
“맛이··· 기가 막히네요.”
“그지?”
레시피를 알려주는 건 하루도 채 안 돼서 끝이 났다. 애초에 주방장의 솜씨가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출중했다. 누가 해도 맛이 비슷한 음식이니 별 차이는 안 나도 몇 달만 지나면 나보다 더 맛좋게 음식을 할 듯했다.
애초에 상대가 차드였다면 이렇게 직접 와서 보여줄 것도 없이 종이에다 글로 써 알려줬어도 충분히 비슷한 맛을 냈을 거다.
레시피를 알려주는 걸 끝내고, 나는 배정 받은 방으로 이동하며 창문을 통해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의 분위기가 많이 유해졌다.
일단 이곳 사람들을 위협하는 마수 따위가 극도로 줄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거다. 이제 농사를 지을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소식도 한몫했을 거다.
경계서는 병사들이 서로 마주 보며 떠드는 걸 보면 확실히 그러했다.
“아, 끝났나? 수고했네. 내가 음주에는 취미가 있어도 미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자네 덕에 변했어. 살아가는 데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는 법인데 말이야. 아주 고마워.”
“오늘도 한잔하십니까?”
“그래야지. 자네가 떠날 날도 며칠 안 남았으니까. 이거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둔 게 아닌지 몰라.”
“방학 때는 계속 영지에 있을 테니 이 정도야 괜찮습니다.”
이곳에 머물면서 아가레스에게 술을 배웠다. 원래의 라파엘이라면 당연히 알았을 술의 브랜드 몇몇을 듣고, 맛보았다. 어떤 술이 어떤 음식과 어울리는지를 학습했다. 아가레스는 이게 다 영주로서 손님 대접할 때 꼭 필요한 덕목이라며 내게 술을 내밀었다.
“1시간 후에 찾아오게나. 내 아껴둔 걸 꺼내지.‘
“예, 기대되네요.”
그렇다고 내가 또 음주에 취미가 생기거나 즐기는 건 아니었다. 그냥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까, 나름대로 즐거우니까, 술은 곁다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