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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92화 (92/125)

제92화

잉그레드에서 휴양하듯 시간을 보내던 중에 달력을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더 빠르게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하는 게 시간이 잘 가는 게 아니었다. 죽을 둥 살 둥 힘들게 노력하다가 퍼진 게 원인이었다.

이제 며칠 후면 연금술 협회에 방문해야만 했다.

수개월 전, 연금술 협회에서는 나와 비숏에게 공동으로 코미 상을 수여하겠다고 연락했다.

코미 상.

그 해, 연금술의 발전에 기여도가 가장 높은 이에게 시상하는 상이었다.

상을 받는 건 나와 비숏이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든 덕이었다. 본래라면 이렇게 지엽적인 부분에서의 성과는 평가에서 손해를 보는 데 오랜 시간 앓아왔던 문제를 해결한 게 컸다.

코미 상의 시상식, 그 날짜가 다음 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할까?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 아이작 영지를 방문할 수는 있었는데, 그렇게 한다면 일정이 촉박했다.

영지로 돌아가 봤자 얼굴만 비춘 후에는 다시 또 이동해야 하는데, 구태여 두 번이나 이동하는 건 불편했다.

협회로 바로 가자.

생각이 난 김에 바로 아가레스에게 가 말했다.

“대공님, 내일 중으로는 영지를 떠나려 합니다.”

“흠, 이미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으니 말라지는 않겠네. 그럼 오늘은 마지막을 기념해 죽을 때까지 마시지. 자네도 오늘만큼은 괜찮겠지?”

“노력해보겠습니다. 대공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죽지 않도록요.”

주량은 마실수록 늘어나는 법인데, 나는 영 그렇지 못했다.

이게 정신 상태와도 연관이 있는 걸까? 몸의 본래 주인인 라파엘은 술꾼이었는데, 나는 왜 이럴까?

아무리 술을 마셔대도 영 주량이 늘지 않는 탓에 아가레스와 마실 때는 늘 속도를 조절해야만 했다.

그는 취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식탁에 머리를 박으며 잠잘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만은 예외였다.

“자, 그럼 들지!”

“예!”

아가레스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아니, 정확히는 밤새도록 잔이 오가기는 했다. 나는 금세 뻗었다.

다행히 몸의 회복력이 좋아 뻗어서 잠시 자고 나면 몸이 벌떡 일어났다.

반면에 아가레스는 내가 자든 말든 관심도 주지 않고, 술잔을 들며 제 할 말만 했다.

아마 그도 취한 듯했다. 그렇게 아침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마셨다.

해가 떴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이 달려들었다. 괜찮다. 잠시만 버티면 몸은 회복될 거다. 익스퍼트에 오르며 내 몸은 초인에 근접했다.

물론, 이 상태로 말을 모는 건 무리인지라 아가레스에게 마차를 빌렸다.

그는 나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조만간 또 볼 테니 거창한 말을 하지 않겠어. 잘 지내게. 늘 자네가 이곳으로 오는 게 마음 쓰이니 다음에는 내가 가지.”

“예, 그때 뵙죠. 대공님도 건강하시길.”

그렇게 아가레스와 인사를 한 후에 마차를 출발했다. 마차는 제국의 수도로 향했다. 비숏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 * *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있을 수도 있으니 잉그레드에서 일찍이 출발했다.

도로를 공사한다거나 산적을 만난다거나 확률은 낮아도 절대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운이 좋게도 아무런 사고가 없었던 덕에 며칠 일찍 수도에 도착했다.

아마 비숏도 이미 근처에 와 있기는 할 거다. 이런 점에서는 확실한 성격이니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그녀를 찾고자 하지 않았다.

화해는 했어도 우리가 서로 그리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사흘 동안 주변을 둘러보며 여관에서 휴식한 다음에 약속 장소로 나섰다.

비숏은 방학 기간에도 아카데미에 남아 연금술을 공부하고 또 실험할 거라 말했다. 이렇게 밖으로 나온 건 순전히 연금술 협회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의외네.”

“뭐가 말입니까?”

“실험복을 입고 올 줄 알았는데.”

비숏은 황당하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당황하는 게 더 어색했다.

그녀는 무도회고 뭐고 늘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착용했다. 복장에 대한 고집이 워낙 센 듯해서 남들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오늘만큼은 그래도 어울리게 정장을 차려입었다.

“저도 눈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무도회에서는 왜 그런 거야? 튀고 싶었나? 아니면 이제 눈치가 생긴 건가?”

“조용히 해주시죠. 제가 뭘 부탁할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무서운 게 없나 보죠?”

그녀에게 우리가 화해했다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로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분위기가 가벼웠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심 불편한 분위기 속에 협회까지 함께 이동할까 걱정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협회 앞에서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도 했는데, 기우였다.

서로 방학 때 잘 지냈느냐 하고 안부를 나누었고, 비숏이 말했다.

“시상식에는 클리멘도 참석한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클리멘? 그게 누구인데?”

“아니, 어떻게 클리멘을 모를 수가 있습니까?”

이런 자리에서 이름이 툭 튀어나오는 걸 보아하니 아마 연금술에서 뭔가를 이룬 사람이겠지, 싶었는데 그게 맞았다.

클리멘은 연금술 협회의 소수 간부를 제외하고는 이름값 하나로는 제일인 연금술사였다.

오래전부터 인기 주제였던 마법으로 금을 만들면 그 비용이 얼마나 손해일까, 따위의 질문에 답을 내놓으며 연금술에 무관심한 이들의 주의까지도 끌었다.

“제프린은 요즘 뭐 한대?”

“기사단에서 훈련하고 있다 합니다. 조만간 소드마스터에 오른다고 하더군요.”

“잘 지내는 거 같네.”

전이라면 비숏의 말에 긴장했을 수도 있었다. 제프린과 싸워야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를 따라 덩달아 나도 밀리지 않게 맘을 졸이며 수련했겠지. 이젠 아니었다.

“그보다 연금술은 왜 놓은 겁니까?”

“전에 말했었지 않나?”

“이해가 안 가서 그럽니다. 재능이 있는데, 그걸 썩힌다는 게.”

“음···. 나는 재능 있는 분야가 많아서 거기 하나하나 다 시간을 쏟을 수는 없다고 해둘게.”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에 협회로 이동했다.

연금술사들은 마법사들에 크게 밀리지 않게 돈을 벌었다. 따라서 협회 건물도 퍽 호화로웠다. 자그마한 규모의 마탑에 지지 않았다.

협회 건물에 입장해 수상 전에 여러 사람을 만났다.

연금술에 관심이 있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관심이 없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비숏의 뒤를 따라다니며 아는 체만 했다.

그들을 우리를 칭찬했고,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한다며 덕담했다. 같이 연구 혹은 사업을 하자는 이들도 있었다. 비숏은 은근히 내 눈치를 보며 하나하나 거절했다.

그중에는 비숏이 말했던 클리멘 또한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내 옆에는 비숏이 있는데도 그러했다.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외모인 그녀를 무시한 채 내게 걸어와 엘제닉 병의 치료제와 관련해 대화했다.

“재밌는 연구였습니다. 꼭 엘제닉 병의 치료제를 만들겠다는 발상이 아니라 그 기술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는데, 그중 하나가 엘제닉 병의 치료제였다는 게 보였죠. 기술을 응용하면 몇 가지···.”

클리멘은 알아듣기 힘들 소리를 주절거렸다. 내 옆에 비숏을 힐끗거리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멘이 귀족이라는 의미였다.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적당히 말을 끊고 도망치기도 어려워 비숏의 뒤에 숨었다.

“치료제를 만드는 데 기여는 이 친구가 더 큽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이 친구를 통해서 해주시길.”

“하하, 농담도. 기술을 만든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그 친구는 잡일을 했을 뿐이고요.”

“잡일이라뇨?”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 누가 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일을 잡일이라 말하는 건 당연하지요.”

클리멘은 놀랍도록 비숏을 무시했다. 옆에 그렇게 서 있는대도 못 본 것마냥 그녀를 대했다. 그는 진심으로 비숏이 치료제 개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간주하는 듯했다.

“아닙니다. 이 친구가 없었다면 치료제가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아, 그 마음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늘 제 아침을 차려주는 하인들과 연구실을 청소해주는 직원들에게 감사하고 있죠.”

나는 다시금 비숏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클리멘의 신분이 그리 높지 않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을 상대로는 최소한의 예절은 지킨다. 하지만 그는 선을 넘었다. 더군다나 비숏의 비위를 맞춰주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경우가 없으시네요.”

“예?”

“말씀 참 개같이 하신다고요. 자기 분야에 자신 있으신 거, 나름대로 철학이 있으신 거 알겠는데, 듣는 사람 기분 나쁠 소리는 하지 말아야죠.”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죠.”

“불쾌하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그, 똑똑하신 분 같은데 멍청하신 거 같기도 하네요. 죄송합니다 하면 끝날 거, 뒷말을 왜 붙입니까?”

나는 몇 번인가 더 클리멘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보통 같으며 비숏에게 사과하라 요구할 텐데, 눈치를 살피니 그마저도 피하고 싶어하는 듯해 넘어갔다.

클리멘이 떠나고도 비숏은 침울해 눈을 깔았다. 그녀는 나와 둘이 남자 말했다.

“역시 저는 상을 받지 말 걸 그랬습니다. 다들 알고 있습니다. 이번 치료제를 만드는 데 제 기여도가 낮다는 걸요. 수상하려는 건 제 욕심이었나 봅니다.”

“내가 이쪽으로는 잘 몰라서 말이야. 이거 상은 1번밖에 못 타는 거야?”

내 딴소리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비숏은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수상에 횟수 제한은 없으니까 몇 번이고 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네가 노력해서 혼자 타는 거로 하자. 이렇게 공동 수상 같은 게 아니라. 그래서 저 개 같은 놈 콧대를 눌러주자고.”

“위로 고맙습니다.”

비숏은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에 내쉬었다.

“네, 그래야죠. 자신 있습니다. 이미 생각해둔 것도 많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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