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연금술 협회에서 상과 상금을 받았다. 상금의 액수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신에 기념품으로 메달을 받았다.
현대에서는 이런 메달을 경매장에 내놓으면 억만금에 팔리던데, 이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당연히 괜한 상상이고, 메달을 팔지는 않을 거다. 그랬다가는 비숏이 불쾌해할 게 뻔하지 않은가?
우리는 메달을 챙긴 직후, 바로 연금술 협회 밖으로 나왔다. 연회나 인터뷰 같은 여러 가지 이벤트가 많이 남았는데, 참여할 기분이 아니었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카데미로 돌아갈 겁니다. 하던 일들이 있어서 마무리를 해야 하거든요. 거기에 이번 일 때문에 의욕이 솟아서 바로 착수하고 싶습니다.”
“꼭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실험할 필요는 없지 않아? 저택에 하나 마련하면 편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아카데미에 재학할 것도 아닌데.”
내 말에 비숏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예,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비용이 문제니까요. 치료제를 판매한 수익금을 분배받기는 해도 돈이 들어오자마자 다 써버릴 만큼 안일하지는 않습니다.”
“그거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데. 나한테 부탁해.”
비숏은 피식 웃더니 어림도 없다는 턱끝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끼고 아낄 겁니다. 할 수 있다면 평생 들고 가야죠. 당신 마음 불편하게 하려고 든 수단인데.”
얘가 뭘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비숏과의 약속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미 현실적인 선에서 부탁하기로 정해뒀고, 또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걸 티 내지 않으려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알았어. 그렇게 해.”
“네. 아하하···.”
웃음소리가 어색했다. 아무래도 협회에서 클리멘이 떠들어댔던 게 여전히 거슬리는 듯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더 신경 쓸 게 뻔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있자 비숏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요? 남은 방학 기간에는 어떻게 하십니까?”
“아직 안 정했어. 아마 영지에 있을 거 같은데.”
“그러면 이걸로 작별이겠네요. 내년에 아카데미에서 다시 뵙도록 하죠.”
“잘 지내. 성과가 있기를 바랄게.”
그렇게 비숏과 헤어졌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카데미의 다음 학기였다.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수도 있고.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재학했던 건 순전히 비숏 때문이었다. 그녀가 남주들과 이어지지 못하게 막고, 가능하다면 그녀와 화해하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이젠 그만 놔주어도 괜찮았다.
아카데미를 자퇴할지 말지 고민하며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바깥의 풍경을 구경했다. 아카데미가 방학한 지 1달이 넘었는데, 이제야 영지로 돌아왔다.
마차가 조금씩 저택에 다가갈수록 가슴이 콩닥콩닥 두근거렸다. 그렇게 고대해왔던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꿈꿔왔던 목표.
나를 둘러싼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어도 괜찮은 생활을 구축하는 것.
이를 완성했다.
“오셨어요?”
저택에 도착하자 코로망은 몹시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입이 귀에 걸렸다.
“어서 와요.”
“오랜만이네. 반가워. 잘 지냈어?”
“네. 아주 잘 지냈죠. 별일 없으셨고요?”
“그야, 그렇지.”
코로망에게는 미리 편지로 아카데미가 방학한 후에도 왜 영지로 돌아가지 않는지 일러둔 터였다. 연금술 협회를 방문해 무슨 상을 받고 말고는 그녀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한 가지 특출난 일이 있었다.
아가레스에게 개인적으로 초대받아 손님으로서 그의 영주 성에 머물렀다. 아마 코로망이 보기에 이것만큼은 특별히 대단한 업적일 거다. 그러니 이렇게 눈빛이 초롱초롱하지.
“피곤하시죠?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잠부터 주무실 건가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 일단은 좀 쉬고 싶네. 오늘은 다 거를 테니까 다들 준비하지 말라고 전해줘.”
“알았어요.”
북부에서의 생활은 호화로웠으나 내 집만의 안정감은 부족했다. 방으로 돌아와 몸을 씻은 후 코로망이 준비해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가 날 끌어안았다. 눈을 감자 세상에 침대와 나 둘만이 남은 듯했다.
다시금 다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제 평생 이러고만 있어도 좋았다.
영지의 관리야 믿을 수 있는 코로망이 해결해줄 거고 또 그녀가 아니라도 걱정할 거리는 전혀 없었다. 문제가 터져봤자 재정과 관련된 일일 텐데 내 수입은 차고 넘쳤다. 잠만 자고 있어도 계좌에 돈이 쌓였다.
이제 쉬자.
나는 그래도 된다.
* * *
코로망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오늘도 라파엘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제 영지로 돌아온 라파엘은 매일 같이 온종일 잠을 잤다. 침대와 한 몸이라도 된 듯 생리 활동을 할 때를 제하고는 누워서 보냈다. 이따금 책을 읽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그 모든 게 침대 위에서였다.
과거의 코로망이었다면 이와 같은 실태에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괜찮은지 의심했을 것이다.
과연 라파엘이 영주의 자격이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필요하다면 이블린 혹은 제리코가 영주 자리를 빼앗을 수 있게 조력했을 것이다.
이젠 아니었다.
코로망은 아카데미의 방학이 시작되고 1달여간 라파엘이 무엇을 한지 알고 있었다. 잉그레드에 가 무려 북부의 대공과 친분을 다졌다.
아가레스를 둘러싸고 있는 무성한 소문들. 그게 거짓임을 알면서도 아가레스가 결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란 것도 알았다.
라파엘이라고 다를까? 아니다. 그도 아가레스를 불편해할 거고, 두려워할 거다. 그러한 괴로움을 견디면서 아가레스의 곁에서 1달여를 머물며 비위를 맞췄다. 어느 영주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라파엘은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필요하다면 해낼 수 있는 영주였다.
코로망은 라파엘을 무한히 신뢰했다.
지금이야 나태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침대에서의 생활이 1달이 가까워지는 시기부터는 어딘가 꺼림칙하기도 했는데, 때마침 방문객이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마탑주로 활동했으나 최근에야 이름을 알린 마법사였다. 라파엘과 같은 해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동기기도 했다.
이안.
그가 보따리`를 들고 라파엘의 영지를 찾았다.
* * *
나는 이안이 무슨 일로 그리 보따리를 싸 왔는지 궁금했는데, 그게 다 마나핵과 관련된 물건이었다. 마나핵 본체와 마나핵을 사용해 작동할 수 있는 아티팩트 따위였다. 마나핵은 마석과는 달리 아티팩트에 부가적인 충전기 따위가 필요해 부피가 컸다.
“벌써 마나핵을 완성했다는 거야?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대단한데?”
“내가 손을 덴 부분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다 카테인이 한 거니까 그렇게 놀랄 거 없어.”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이안이 가져온 마나핵을 손에 든 채 훑어보며 감탄하는 척했다.
사실 이렇게 봐도 마나핵이 뭔지 잘 모른다. 대충 보통의 마석보다 효율이 좋은 마석. 딱 그쯤으로 인식했다. 이걸 만든 게 왜 대단한 거고, 어려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이안이 뿌듯해하는 거 같길래, 자랑스러워하는 거 같길래 적당히 반응했다.
“마나핵도 다 만들었는데,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다들 그거를 묻더라. 마나핵을 어디에 써먹을 거냐고. 그건 아직 못 정했어. 카테인이 하려 했는데, 하지 못하고 죽은 걸 완성한다는 데 의미를 둔 일이니까.”
그의 말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저게 억만금을 벌 수 있는 기술이라는 건 인지했다. 마석은 아주 고가의 물건인데, 그거 비슷한 걸 양산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괜히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자 넘어갔다.
“그래서 그거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비슷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몇 가지 있고.”
“뭔데?”
“이제 뭘 해야 할까?”
“꼭 해야할 게 있어야 해?”
“어. 나는.”
흐음.
턱을 괴고 신음했다.
이안은 목표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목표는 모두 카테인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유는 카테인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 후에는 카테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디마겐을 죽이는 데 열중했다. 이게 이전 학기에 그가 아카데미에서 한 일 대부분에 해당했다.
그리고 카테인의 복수까지 완수한 후에 손을 덴 게 마나핵이었다.
마나핵, 카테인이 하고자 했던 마지막 일, 거기까지 이안은 성공해냈다. 더는 그에게 남은 게 없었다.
원작에 이안은 어땠을까?
그의 곁에 비숏이 있었다. 암만 꼬시려 해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써가며 다른 남주들과 경쟁했다. 그게 그의 목표였다.
지금은 달랐다. 비숏이라는 목표가 없으니 이안은 새로운 목표를 원했다.
“그냥 좀 쉬는 건 어때?”
그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고 한들 끝끝내 이룰 거다. 이안의 능력과 배경을 생각하면 어지간히 힘든 목표가 아닌 이상이야 금세 성공하고 또 새 목표를 찾아 헤맬 거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에 참견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거 너무 피곤하지 않나?
결국에는 또 지금 같이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시간을 직면해야 했다.
“그냥 좀 쉬자고.”
“나는 그런 거 잘못해.”
“그거 잘됐네. 이거 잘하게 되는 걸 목표로 삼자.”
그렇게 이안은 내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에게 방 하나를 내주었고, 저어도 하루에 14시간은 침대에 누워 있도록 강제했다. 책을 보는 정도의 활동은 몰라도 누워서 마법을 쓰거나 하는 일체의 활동은 금지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어. 괜찮아.”
이안은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걸 힘들어했다. 여기에 휴대폰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달랐을 텐데. 누워서 할 수 있는 게 너무 적었다.
그래도 밀어붙였다.
좀 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