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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94화 (94/125)

제94화

침대 속 생활이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이안이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이불을 걷어찼다.

“고마워. 덕분에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겠어. 더는 이렇게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이 생황을 관둬 주니 솔직히 고마웠다. 이안에게는 호기롭게 말했으나 나도 슬슬 이 생활이 질리는 참이었다. 내 기준으로도 백수는 2달이 한계였다. 잉그레드에 있었던 시간까지 포함해도 고작해야 2달.

최근 1주는 괴롭기까지 했다.

나까지도 이렇게 하루하루를 누워서 보낼 필요는 없었다. 진짜 휴식이 필요하고, 진정해야 할 건 이안 뿐이었다. 그런데, 그만 내버려 둔 채 나는 바쁘게 움직인다면 그가 이상하게 볼 게 아닌가?

함께 백수 생활에 들어가고 며칠이 지나서 어딘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백수 생활을 하기 위한 백수 생활은 그 본질에서 어긋났다. 목적 없는 삶이어야 백수라 할 수 있는 법인데, 우리는 거기서 벗어났다.

진짜 중요한 건 여유였다. 무언가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마음가짐에 유의해야만 했다.

나는 나비에와 나눴던 대화가 일부 떠올랐다. 그녀는 내게 특별히 솜씨가 좋은 식당 몇을 일러주었는데, 이참에 그곳들을 탐방해볼까 싶었다.

이를 이안에게 말하니 그도 좋다고 대답했다.

* * *

해서 우리는 오래간만에 영지에서 벗어났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장시간 마시니 머리가 상쾌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덕에 까먹고 있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카데미는 어떻게 할 거야?”

이안은 아카데미를 재학하던 중에도 계속해서 자퇴할지 고민했다. 아카데미에서 얻을 게 없었던 탓이었는데, 이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카타리나의 검술 가르침이 있기는 했어도 이젠 검술의 필요성이 많이 떨어졌다.

아카데미를 계속해서 다닐까, 혹은 자퇴할까, 이안의 의견을 참고하고자 질문하니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학기 단위로 자퇴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고 졸업을 하지도 않을 거 같아. 그건 너무 멀잖아. ”

“그건 나도.”

“그래도 다른 이유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번 학기에는 출석하겠지.”

나도 그와 비슷했다. 한두 학기는 더 아카데미를 다닐지는 몰라도 졸업은 관심이 없었다. 아카데미를 다니자니 그 명분이 부족했는데, 그렇다고 또 자퇴하자니 애매했다.

고민은 입에 음식을 넣는 순간 사라졌다.

“이거 맛있네.”

나와 이안은 나비에가 준 명단의 식단들을 노선으로 만들어 하나씩 맛을 보았다.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다. 굳이 거대한 목표 하나를 두고, 그곳을 향해 경주하듯 뛸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침대가 좋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런 사소한 즐거움을 알려주는 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나도 실내에 워낙 오래 있다 보니 산소가 부족해 뇌가 안 돌아갔던 듯했다.

아마 아카데미의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보내지 않을까?

조금씩 입에 음식을 넣었다. 좋은 재료로 정확하게 만든 음식이었다. 소고기를 알코울이 들어간 양념을 써 익혔는데,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분명 그러했다. 맛은 좋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이안이 그대로 말했다.

“맛이 다 비슷해.”

그랬다. 나비에가 추천한 식당은 모두 평판이 좋은 곳이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그녀의 입맛에 맞는 곳이었다. 맛이 다 비슷할 수밖에. 거기다 식당들이 목표로 하는 바도 유사했다. 똑같은 걸 해도 남들보다 더 잘하려 했지 남들과 다른 걸 하려고 하지 않았다.

“저런 거 할 시간에 음식이나 신경 쓰지.”

이안은 불만 사항이 또 있나 보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게의 인테리어나 피아노 연주자 등을 가리켰다. 그의 의견에 내심 동의했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맛이었다. 똑같은 맛이라면 분위기 따위를 따질 수도 있었으나 똑같은 맛일 수가 없었다.

가게의 주인이 쓸 수 있는 시간과 재화는 한정되어 있었다. 이안은 맛 이외에 다른 부분에 쓸 에너지를 그대로 맛에 담았어야 했다고 불평했다.

“네가 해준 게 나아.”

“설마··· 이상한 소리 하지마.”

“적어도 지금은 네가 해준 게 생각 나.”

“자주 먹으면 질리는 맛인데?”

“질릴 때마다 더 맵게. 먹으면 되지.”

“잘 먹지도 못하면서.”

내 말에 이안은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그게 좋은 거야. 넌 술을 취하려고 먹는데, 아무리 먹어도 안 취해. 그러면 어떻겠어?”

“싫겠지.”

“매운 것도 똑같아. 매운 걸 느끼려고 먹는데, 암만 양념을 부어도 안 매우면 어떻겠어? 똑같이 싫은 거야. 그러니 매운 걸 잘 먹는다는 건 자랑스러워할 게 아니라 부끄러워할 일이지.”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확실히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돌아갈까?”

“돌아가서 떡볶이를 먹자.”

이게 매운맛의 묘미인가보다. 다른 음식이 질리면 꼭 매운 음식이 떠올랐다.

* * *

아카데미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기 1달쯤 남았을 시기.

슬슬 휴학을 하거나 자퇴를 한다면 아카데미에 알려야 했다. 개학을 하기 전날에도 자퇴 등을 하는 게 가능은 했지만,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는 꼴이니 이왕이면 빨리 결정하는 게 좋았다.

이안은 그래도 한 학기는 더 아카데미를 재학하겠다고 했다. 대신에 무언가 목적을 달성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나도 그와 비슷했다.

아카데미를 다닐 필요까지는 없어도 얻을 게 하나 있기는 했다. 거기서만 배울 수 있는 것. 바로 카타리나의 검술이었다.

이 때문에 재학과 자퇴 사이에 고민하고 있는데, 청첩장 하나가 왔다. 드디어 길버트와 카타리나가 결혼한다고 했다.

이안은 내버려 둔 채 나 홀로 떠났다. 청첩장에는 결혼식의 구체적인 규모는 나오지 않아도 장소가 크지 않은 교회인 걸 보면 친구랍시고 아무나 데리고 갈 자리가 아니었다.

결혼식의 장소는 카타리나의 고향인 콜린이었다. 콜린은 수도를 기준으로 남부에 시골 마을이었다.

이동 수단이나 각 지역끼리의 거리가 멀어 청첩장은 결혼식이 있기까지 거진 1달을 남겨두고 날아왔다. 본래 같으면 2, 3주는 기다렸다가 콜린으로 출발할 텐데 미리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방학은 내내 마차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아쉬움이 들었다. 내 마차가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았어도 아가레스에게 빌렸던 그 물건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다. 조금 더 덜컹거렸고, 조금 더 흔들렸다.

다음에는 좋은 거로 하나 새로 사야지.

* * *

콜린에 도착하자마자 카티라나부터 찾았다.

카타리나도 약혼을 앞둔 나비에만큼은 아니라도 그녀 나름대로 싱글벙글할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결혼식이 있기 2주 전에 온 나를 보며 떨떠름하게 웃었다.

“너는 뭐 이렇게 빨리 왔어? 당일에 와도 될 텐데.”

“에이, 제가 어떻게 그럽니까? 스승님의 결혼식인데.”

“그래··· 와줘서 고맙다.”

“예, 결혼하시는 거 축하합니다.”

“어.”

나는 준비해온 지도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선물이요.”

카타리나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거기에 답했다.

“생각하시는 그거 맞아요.“

아카데미에서 나는 카타리나에게 별장을 사주겠다고 말했다. 카타리나는 소드마스터로서 얻은 명성과는 다르게 그리 부유하지 못했다. 소드 마스터라는 이름값을 살린다면 돈 벌 방법이 무수히 많을 텐데 무시하고 그를 다 무시하고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맡은 탓이었다.

그녀가 용병으로 뛰거나 어느 기사단에 이름만 올려두어도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돈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데 거부감이 있는 거겠지. 살아가는 데 그리 유리한 성품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호감이 갔다.

”정해보죠. 어디에 지을지.“

나는 준비해온 지도를 펼쳤다. 제국 전체를 표시한 지도이다 보니 상세한 걸 알 수는 없어도 대략적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뭘?“

”별장요. 다 아시면서 빼시네.“

카타리나는 털털한 척하면서도 남의 눈치를 많이 살폈다. 그냥 나였다면 얼마까지 써줄 수 있냐고 물은 다음에 원하는 방식으로 요구할 텐데 말을 빙빙 돌리면서 자꾸 찔러만 봤다.

”그냥 원하시는 걸 말씀하세요. 몇 층으로 갈까요? 자재는 뭐로 쓸까요?“

”건축 쪽으로는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서 말이야···.“

”그럼 원하시는 위치는요?“

”콜린은 날씨가 따뜻하지. 한동안은 여기서 지낼 거 같은데, 기후가 다른 쪽으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북부로 갈까요?“

카티라나가 거절할 걸 알면서도 그녀를 놀려보려 물었다. 북부 쪽은 다소 집값이 낮은 탓이었다.

”아니, 거기는 너무 멀잖아. 동부 혹은 서부가 괜찮을 거 같은데.“

땅값이 비싸기로는 동부가 제일이었다. 서부보다 동부를 먼저 말한 걸 보아하니 원하는 바가 확실했다.

”네. 그러면 동부로 하죠. 동부 중에서도 원하시는 곳이 있을 텐데 어디가 괜찮으세요?“

”한두 푼이 드는 일이 아닌데, 진행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예?“

”밥부터 먹자. 길버트도 같이. 집을 보여줄게.“

카타리나의 고향 집. 어려서부터 그녀가 자라온 자택이었다. 집은 소소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집. 주변에 소작농들이 모두 이와 같은 집에 거주했다.

”어! 왔어? 올 줄은 알았는데 엄청 빠르네!“

길버트가 웃으며 나를 맞았다.

”네··· 하하, 반갑습니다. 그리고 결혼 축하합니다.“

”고마워.“

카타리나는 내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주방으로 이동했다. 나는 길버트와 둘이 남자 괜히 그가 부담스러웠다. 내가 연금술에 손을 뗀 터라 더 그랬다.

다행스럽게도 이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길버트도 내가 불편한 듯했다. 내가 연금술을 관둔 이상 더는 그와 관해 이야기하는 게 실례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와 나의 공통 관심사는 연금술 하나였으니 이제는 대화 소재가 없었다.

우리 둘은 묵언 수행이라도 하듯 입을 다물며 카타리나가 오기를 기다렸다.

카타리나는 새로 요리라도 하는 듯 주방에서 30분은 더 지나서야 우리를 불렀다. 그녀는 직접 요리해 음식을 내주었다. 뜻밖에 솜씨가 좋았다. 카타리나의 고향 집은 협소했고, 주방은 좁았다. 조리도구도 상등품이라 할 수 없었는데, 이만하면 실력이 훌륭했다.

”맛있어요. 실력이 좋으시네요.“

”손으로 하는 건 대체로 그래. 그럼 먹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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