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96화 (96/125)

제96화

“아카데미는 자퇴하려고.”

“네?”

“거기서 더 얻을 게 없는 거 같아서 그래. 다른 귀족들과의 인연이라면 지금도 충분하고, 검술을 배울 선생도 더는 없으니까. 물론, 내 검술이 이만하면 충분하기도 하고.”

코로망은 손으로 턱을 짚더니 잠시간 망설이다가 말했다.

“지금 영지에 영주님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니 가능하면 아카데미는 졸업하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건 제 바람일 뿐이니까요. 틀린 말씀 하나 없으시니··· 네. 알겠습니다. 아카데미는 자퇴하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아카데미에 바로 알릴까요?”

“아아.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미리 말해둔 거야.”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코로망은 간단하게 나를 이해해줬다. 쉬울 줄은 알고 있었다. 근래에 들어선 내가 뭘 해도 코로망은 무한한 신뢰를 보내줬다. 한 달쯤 침대에 누워만 있는데도 그랬던 걸 보면 뭐가 됐건 간에 이유만 붙여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듯했다.

또 이게 그녀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막 라파엘의 몸에 빙의했을 때는 코로망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주 자리가 위태위태하고, 코로망이 날 떠난다면 터질 문제가 너무 많았다.

지금은 다르다는 이야기.

내 영주 자리는 더할 나위가 없이 확고했다. 물론, 그렇다고 코로망이 없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제일 힘들 때 편을 지켜준 인물이었고, 누가 뭐라 해도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계속 내 옆에 있어 줘야지.

나는 저택에서 영주 생활을 시작했다. 영주로서 알아야 할 것들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은 새로 코로망에게 차근차근 배웠다. 남을 시키더라도 할 줄 알고 시키는 것과 할 줄 모르면서 맡기는 건 천지 차이였다.

그 과정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이 배경에는 넉넉한 재정 상황이 있었다. 수십 년간의 영지 수입을 보니 최근에 들에 몇 배로 증가했다. 아이작 가문의 소득이야 영지에서 걷어 들이는 세금이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빙의하고부터 변했다.

여기저기에서 돈이 들어오니 빡빡하게 영지를 굴리지 않아도 괜찮으니 기본만 지키는 거로 충분했다.

이거 영지를 잘 운영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원작의 내용을 떠올려 어디 돈 벌어올 구석 없나 고민하는 게 나을듯했다.

* * *

아카데미에 자퇴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 몇 주가 지났다.

라파엘은 동생, 제리코에게 개인적으로 검술을 가르쳤다. 둘 사이의 원한 때문에 제리코는 한사코 거부했으나 라파엘에게 지도받을 때마다 눈에 띄게 발전하는 실력 탓에 그를 이용할 뿐이라 변명하며 검술을 배웠다.

“가문의 비전까지 건들지는 않을 거야. 그건 네 중심이니까. 나는 약간의 교정만 할 거니까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아이작의 검술은 타고난 마나량을 이용했다. 아아작 가문의 사람들은 많은 마나를 타고나 신체 능력이 탁월했다. 해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칼의 주인을 대신에 칼을 직접 때려 주도권을 가져오는 검술이었다.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야. 그런데 너는 너무 거기에만 집착한단 말이야. 급소를 노리는 척만 해줘도 상대 반응이 달라지는데 말이야.”

라파엘이 제리코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데는 별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한 번씩 봐주는 것만으로도 그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니까. 그가 암만 성장해봤자 제 상대가 못 될 테니까.

둘 사이에 검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 이상의 교류는 전혀 없었으나 둘의 관계는 전보다 화목했다. 적어도 제리코가 라파엘을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

제리코는 아이작 가문에 태어나 무력의 가치를 날마다 들었다. 라파엘의 힘을 인정하고 나니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또한 제리코는 속으로 라파엘을 인정했다.

‘라파엘이 나보다 강한 건 카타리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야.’

과거의 패배 이후 그렇게 변명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자존심을 지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에게 교정을 받고 나니 검술을 보는 눈이 다름을 깨달았다. 라파엘이 강한 건 카타리나한테 특별한 비전 검술을 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재능이 있었고, 노력한 덕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검술은 상대를 밀어붙이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칼을 치는 검초는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이를 멈추고 목이나 심장 따위를 노리면 그간 따놓은 점수를 잃는 꼴입니다.”

라파엘은 제 주장을 제리코가 반박하자 피식 웃었다. 그의 반박을 비웃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반문한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꼭 칼로 충격을 줘서 중심을 흔들 필요는 없어. 그게 가장 편한 수단인 거지.”

라파엘은 제리코의 목을 향해 가검을 내밀었다. 제리코는 몸을 뒤로 기울여 가검을 피했다.

“이렇게. 검을 밀기만 해도 상대는 몸의 축이 밀리니까 중심을 다시 잡기는 어렵겠지?”

“알겠습니다···.”

제리코와는 그랬다.

이블린에게는 영주의 권한을 조금씩 공유했다. 과거였다면 코로망이 처리했을 일을 그녀가 건드릴 수 있도록 했고, 이에 이블린은 크게 만족했다.

아직 이블린을 믿기는 이르니 인사와 관련된 일 따위는 뒤로 미루었으나 그녀가 건드릴 수 있는 분야가 넓어졌다.

이블린은 라파엘에게 가신으로서 충성할 것을 맹세했고, 더 나은 영지 관리를 위해 교육을 받으러 유학을 떠나겠다고 했다.

“영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또 제리코를 봐주시는 것도요.”

“알면 됐어. 됐으니까 고개 들어.”

“그때 실패하고,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아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남매간에 관계를 정리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내쫓을 수도 있었으나 그래도 이왕이면 좋게좋게 가고자 시도했다. 워낙 하는 일마다 잘 풀린 덕에 마음이 유해졌다.

라파엘은 대부분의 시간을 제 영지에서 보냈는데. 놀랍게도 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제리코를 가르치는 것 말고도 홀로 칼을 휘두르며 수련했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필요에 의해 칼을 잡았으나 제법 적성에 잘 맞은 편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훈련할 때는 몰랐는데, 이건 꽤 즐거웠다.

성장한다는 감각이 좋았다.

반드시 자신 또한 소드마스터에 올라 카타리나를 놀라게 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었다. 카타리나와 나눴던 마지막 대련을 매일 같이 복기하며 조금이라도 더 성공하고자 노력했다.

전보다 나이가 든 코로망은 슬슬 은퇴를 준비했다. 제가 바란 것 이상으로 영주의 가족들이 잘 자랐으니 제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을 거라 예감했다.

“조금만 더 있어 줘. 이블린이 더 자랄 때까지만.”

“아아, 당연하죠. 제가 떠날 수 있다는 걸 인지하셔야 하니까, 미리 말씀드린 거뿐이에요. 바로 떠나지는 않을 거에요. 제가 가르쳐 드려야 할 게 많은데 어떻게 바로 가겠어요?”

“고마워.”

그 후 아카데미는 새로운 학기를 맞이했고, 라파엘은 제 영지에서의 삶을 만끽했다. 홀로 검술을 수련하고 영주로서의 일을 다시금 배웠다. 이전의 코로망이었다면, 왜 다 배웠던 걸 까먹었는지 의아하게 여겼을 텐데, 그간 보여준 라파엘의 행실에 다르게 생각했다.

‘이미 다 알지만, 한 번 더 확인하는구나,’

라파엘은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재산을 불릴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과거 별 쓸모가 없다고 간주한 정보지만, 잊기 전에 메모해둔 정리를 다시금 확인했다.

떡볶이, 치킨을 빼고도 시도해볼 만한 요리가 뭐가 있을까 궁리한 건 덤이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간장이 있어야 해.

뭔가를 떠올릴 때마다 간장이 제 길을 막았다. 언제 한 번 제국 전역을 여행하며 간장과 비슷한 향식료를 찾아봐야지 다짐했다.

한 통의 편지가 온 건 그러던 중이었다. 라파엘은 발신인에 나비에 러브원이라 쓰인 이름을 보며 드디어 카르테아와 결혼이라도 하나 기대하며 편지의 봉투를 개봉했다.

편지의 잉크는 번져 있었다. 자국을 보아하니 물방울이 스며든 듯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빠르게 편지를 읽었다.

“아?”

그는 그대로 자리에 정지했다. 편지가 땅에 떨어졌다.

* * *

루인 제국에는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치러야 할 의식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초대 황제가 인간으로 변하기 전, 용이었을 시절에 사용한 둥지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루인 제국의 황손에는 용의 피가 흘러 용력이 뛰어나다 해도 만일을 대비해 호위를 대동했다. 나는 그 호위에 참여해 카르테아를 따랐고, 그때 일로 아미칸보의 칭호를 받았다.

그때 내가 카르테아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그가 이안에게 관심을 보였다. 마탑주씩이나 되는 놈이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니 누구라도 궁금할 거다. 나는 카르테아에게 이안과 있었던 일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이야기의 소재 중에는 제국일극단이라는 극단을 찾아가 공연을 봤다는 것이 있었다.

그게 카르테아에게 인상이 남았나 보다. 카르테아가 직접 그곳에 행차해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게 프리실라였다.

프리실라.

다른 작품에 악녀 캐릭터. 시간대가 달라 이미 퇴장한 후에 생계를 위해서 극단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봐줄 건 얼굴뿐이고, 발성이나 노래 실력이 형편없어 맡은 배역이라고 해도 비중이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왜? 어떻게 된 걸까?

“아아···.”

내가 망쳤다.

카르테아는 프리실라가 마음에 든 듯했다. 나비에가 보낸 편지에 따르면 최근, 나비에와 카르테아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올해 아카데미의 신입생으로 프리실라가 입학했다고 했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자. 아카데미로.

카르테아를 막거나 프리실라를 죽이던가 뭐라도 해야 한다. 이렇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비에와의 의리도 의리지만, 이를 위해서 내가 투자한 시간, 노력, 돈이 무너지는 걸 어떻게 가만 보겠는가.

전에 아가레스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죽일 놈은 죽이는 게 옳다고.

이 프리실라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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