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프리실라는 좋아하는 게 많았다. 달콤한 음식을 좋아했고, 반짝이는 보석을 좋아했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걸 좋아했고, 남들이 자기를 질투했으면 하고 바랐다. 집은 넓었으면 좋겠고, 가구는 호화로웠으면 좋겠다.
어느 무리에 끼더라도 자신이 가장 값비싼 의상을 입어야 했고, 가장 화려한 장신구를 둘러야 했다. 언제나 무리의 중심이어야 했다. 무수히 많은 것을 원했고, 바랐다.
그리고 그러한 제 욕망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했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전에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선택을 받아 함께 천국을 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포악한 성정을 들켜 퇴장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살아가야 했다. 그녀에게 남은 건 평민이라는 신분가 텅텅 빈 호주머니였다.
평범한 평민처럼 살아야 했다. 먹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만 했고, 좁은 집에서 냄새나는 가구에 둘러싸여 스스로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차려 먹고, 씻는 지옥 같은 삶은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이 끔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다. 어떻게 해야 성공한 삶을 쟁취할 수 있을까?
그녀가 남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얼굴이었다.
그녀의 가장 큰 무기. 하늘로 올라가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아직 하나가 남았다.
배후자를 잘 만나 인생을 피는 것.
프리실라는 이에 자신이 있었다.
남들이 제 외모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고, 어떻게 해야 그걸 잘 이용할 수 있는지까지도 능숙했다. 그녀가 극단에서 일을 시작한 계기도 그러했다. 공연을 보러 오는 건 대개 귀족이거나 돈 많은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괜찮은 상대를 고르고자 했다.
그녀의 눈이 카르테아를 포착한 건 그러던 중이었다.
후드 따위로 변장한답시고 얼굴을 가렸는데, 프리실라는 그의 눈만 보고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카르테아가 얼굴을 가린답시고 입은 후드부터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사치를 부리기 위해서는 더 좋은 것, 더 고급진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했다.
카르테아가 입은 후드는 디자인은 평이했어도 재질, 마감 따위가 비범했다.
이는 후드를 쓴 이가 어마어마한 부자란 뜻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 돈을 아무 데나 쓰지는 않는 법이었다. 값비싼 옷감과 실력 있는 디자이너에게 잠옷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누구나 사교회 따위에 나갈 때 입을 옷을 주문한다.
후드를 쓴 이는 그 규칙을 깨부쉈다.
비 오는 날, 혹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할 때나 입을 옷에 저리 투자한다는 건 돈이 썩어 넘친다는 뜻이었다.
카르테아의 정체를 확신한 계기가 눈동자였을 뿐이었다. 붉은 눈동자를 진 억 소리 나는 부자는 한 명뿐이었다.
제국의 황태자, 카르테아 사비 이니에스피.
그는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는 황제에 즉위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프리실라는 제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혈액이 혈관을 타고 뛰어다니며 그녀를 흥분시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퇴장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빨리 수를 써야 해.’
프리실라의 눈에는 힘이 있었다. 자신과 장시간 눈을 마주치면 사람을 매혹할 수 있었다. 물론, 사람을 뜻대로 조종하고, 휘두르는 그런 힘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 더 사람에게 더 호감을 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프리실라 본인도 알지 못했다. 거울을 보면 남들보다 외모가 출중한데, 그중에서도 눈이 특별하다는 것뿐이었다.
깊은 보라색 눈. 눈에 보석을 박은 듯 조명을 받으면 반짝이면서도 그 빛을 흡수했다. 그 눈을 옆에서 흘겨보면 명도가 높아 반짝이기만 했는데, 정면에서 들여다보면 갈수록 깊어지는 눈은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독하게 커야 했다. 그 탓에 제 눈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카르테아를 꾀는 데 이 힘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주의를 끌까?
공연 중에 그 기회가 찾아왔다.
제국일극단의 극장은 귀족을 대상으로 만든 건물이었는데, 종종 시즌이 바뀌고 새로운 극을 준비할 때면 다른 팀에게 건물을 대여해주고는 했다. 꼭 극단이 아니라 해도 해당 건물을 쓰는 탓에 공연장과 객석의 구분이 독특했다.
카르테아는 여러 좌석 중에서도 배우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을 택했다. 그렇다면 기회가 있었다.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데는 순서가 있었다. 특히 상대의 신분이 고귀하다면 더욱 그러했다.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어필하는 것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뽐내는 게 주요했다.
높으신 분들은 외모만으로 그 대상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하고는 했다. 귀찮더라도 돌아가야 한다.
프리실라는 거기서 방법을 찾았다. 고통을 각오하고 숨을 들이켰다. 전진했다. 그녀는 과격하게 발목을 꺾으며 쓰러졌다.
연기가 아니라 발목 인대가 다칠 걸 무릅쓰며 쓰러졌다. 공연이 끝난다면 단장한테 욕 좀 먹겠지. 어쩌면 짤릴 수도 있었다. 자신의 역할은 정말 별거 아니었으니까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극단의 이딴 보잘것없는 배역보다 카르테아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게 중요했다.
구석진 자리에서 서성거리는 역할이었는데, 앞으로 쓰러지며 몸을 추슬렀다. 쓰러지더라도 보기 좋게 쓰러져야 했다. 혹여 철퍼덕 바닥에 얼굴이라도 박는다면 끔찍했다.
프리실라는 그대로 넘어지며 만일을 대비해 무릎을 찧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었다. 조명이 얼굴을 비추었다.
카르테아와 눈을 마주쳤다.
약 2초. 황급하다는 양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찌푸리며 억지로 고통을 감내한다는 인상을 풍겼다.
단역이지만 제 역할에 전념한다는 연기였다.
프리실라를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은 프로였다.
얼굴 하나로 노래조차 못하는데 들어온 프리실라와는 달랐다.
그들은 프리실라를 못 본 척하며 자기들의 연기를 이어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숙했다.
하지만 카르테아의 기억에 남은 건 프리실라뿐이었다.
이런 공연에는 무관심해 극장을 찾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전에 공연을 본 기억이 없으니 비교할 거리가 없었고, 인상이 남은 건 강렬한 하이라이트 부분과 특이한 사건이었다.
카르테아는 단 한 번도 프리실라 같은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상대를 이성으로 보는 게 아니라 꼭 아름다운 조각상을 감상하는 것만 같았다.
공연 이후 프리실라는 그녀의 바람대로 극단에서 퇴출당했다.
꼭 이번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극단의 암적인 존재였다. 실력이 없으면서 연습에 불성실했고, 다른 배우들 사이를 이간질한 탓에 악평이 자자했다.
“그대 괜찮은가?”
정체를 숨긴다고 숨긴 카르테아가 프리실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눈을 빛냈다. 이쯤 되면 반쯤 성공한 셈이었다.
“네. 하하··· 제가 실수한 일이었던 걸요.”
“그 실수 한 번으로 쫓겨난 건가?”
“익숙해요. 이쪽으로는 소질이 없어서요. 오늘 밤 잠잘 곳이 없다는 걸 빼면 아무 문제가 없고요.”
* * *
나는 나비에가 보낸 편지를 읽고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편지에는 한 통에 담을 수 있는 내용밖에 쓰여있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법했다.
프리실라가 등장했다.
그녀는 누나가 쓴 글 중에서도 가장 표적 연령대가 높았던 글에 등장한 악당이었다.
연령대가 높으니 당연히 똑같은 악역이라고 해도 하는 짓의 수위가 남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성품의 프리실라가 황후 자리를 노린다면, 그녀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바로 행동해야 한다.
프리실라도 카르테아와 접촉하자마자 뭔가를 하기는 힘들 거다.
그녀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기 전에 제압해야 했다. 머뭇거렸다가는 사태가 심각하게 변할 수 있었다.
나는 즉시 아카데미에 이번 학기에 복학하겠다고 연락했다. 이미 자퇴를 하고, 내 이름이 학부에서 사라진 이후였지만, 약간의 기부금이면 안 될 게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내 표정을 보고 심각함을 느낀 코로망이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기는 했지. 나비에는 황후가 되어 내 가장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예정이었다.
그 계획이 박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걸 막아야 했다.
“내 문제는 아니고, 내 친구의 문제. 가서 도와줘야 할 거 같아. 급하거든.”
“아아···.”
코로망은 내 문제가 아니라는 말에 안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아카데미로 가시는 건가요?”
“응. 아카데미 쪽에서 생긴 문제라서 가봐야 할 거 같아. 바로 갔다 올게.”
“네. 그럼 다녀오세요.”
아카데미로 갈 준비를 급히 했다. 짐을 성의껏 쌀 여유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대충 우겨 넣은 후에 마차에 실었다.
* * *
나는 바로 아카데미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정문에서 입장해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축제 같은 이벤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나 싶어 그들을 해치고 무리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
무리의 중심에서 프리실라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피 혹은 이마 쪽에 상처를 입은 듯했는데, 그게 얼굴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얼굴의 절반을 피로 칠했다.
큰 상처는 아니었다.
저렇게 제 발로 서 있는 걸 보면 둔탁하게 맞은 게 아니라 무언가에 베인 쪽이니 흉은 남을 수도 있을지언정 건강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상처가 상처이고, 출혈이 있다 보니 상처가 심각해 보였다.
프리실라는 상처 입은 채로 카르테아에게 안겨 있었다.
카르테아는 상대방, 그러니까 나비에를 상대로 프리실라를 지킨다는 듯 몸으로 가리며 부축했다. 나비에는 손발을 바들바들 떨며 이를 지켜보았다.
바닥 한 편에는 피가 묻은 책이 굴러다녔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그런 셋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
제발 내가 상상하는 것만 아니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