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카르테아는 그대로 프리실라를 부축하며 어딘가로 떠났다. 프리실라는 어지러운 척 혹은 걷는 게 힘든 척 카르테아에게 기댔다.
아마 신관한테 가 치료를 받으러 가는 걸 듯했다.
나비에는 그 방향의 정반대로 뛰쳐나갔다. 나는 그 방향을 두 눈으로 확인해둔 후에 뒤에서 말이 나오지 않게 텀을 두고 나비에를 쫓았다.
나비에는 풀숲 구석진 자리에 숨어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는 나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오셨네요.”
상황이 상황인데도 나비에는 만나서 반갑다고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빠른 어조로 답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편지는 읽었는데,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황태자님은 왜 저 여자를 그렇게 부축하지?”
“잘 모르겠어요. 아니, 전혀 모르겠어요. 황태자님께서 왜 저러시는 건지, 저 여자는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다 잘 돼 가고 있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죠? 잘 되고 있었는데. 가족들이랑은 사이도 좋아졌는데. 하하··· 저는 평생 화해 못 할 줄 알았던 거 아세요?”
“일단 진정해. 숨 쉬어.”
“하아··· 하아···. 전 괜찮아요.”
“그래, 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 괜찮으니까 진정해.”
내가 안일했다. 카르테아가 프리실라와 접촉하게 된 건 내 실수였다.
그때 극단에 프리실라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이안과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서는 안 됐다.
이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프리실라는 카르테아의 눈에 들었다.
모습을 숨기고 암살을 한다면 분명 나비에를 의심할 거다. 암살은 힘들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우선은 상황을 알아야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설명을 좀 자세히 해줘.”
“황태자님께서 불쌍한 이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그게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인이라는 말에 신경이 쓰이기는 했어요. 원래 그런 일에 관심 있으신 분은 아니었으니까요. 살짝 불안했죠.”
나비에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더더욱 그랬고요. 하지만 믿었어요. 절대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는 안 되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비에의 말에 입술을 씹었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카르테아가 비숏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비숏의 외모 때문이었다.
아가레스나 이안, 제프린 등과는 달랐다. 카르테아가 프리실라를 보고 호의를 느낀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이젠 그래서는 안 되잖아.
명색이 황태자라는 놈이었다. 황태자면 최소한 지킬 건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 황태자라는 자리는 수저였다.
카르테아가 능력으로 쟁취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뿐이었다. 놈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게 이상하다.
분했다.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니,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약혼까지 해놓고 뭘 하자는 건가?
등신 같은 놈. 속에서 열이 솟았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 여자를 죽이고 싶어요.”
과격한 말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프리실라를 죽여야 했다. 그녀가 등장한 원작은 다소 독자의 연령대가 높았다.
그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그녀는 보통의 악당보다 더 심한 짓을 했다.
프리실라가 살아남는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건 불가한 일이지만, 혹여 황후에 오른다면 나비에가 위험했다.
프리실라라면 반드시 나비에를 죽이려 들 거다. 프리실라는 그런 인물이었다.
“프리실라를 죽여? 나도 그렇게 하고는 싶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어. 죽이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네가 범인이라 의심받을 거야.”
“상관없어요. 아직은 황태자님의 마음도 그리 크지 않을 테니 분명 용서받을 수 있을 거에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아까 전 일은 뭐야? 피를 흘리며 쓰러지려 하고 있던데.”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책을 던졌는데, 몸통 쪽을 노린 게 그게 몸을 웅크리더니 얼굴로 받아서···.”
“겨우 그거로?”
어색했다. 나비에가 파이어볼러 급 투수도 아니고, 고작 책을 던져 그런 상처를 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프리실라가 입은 상처는 명백히 베여서 생긴 것이었다. 차라리 책을 후두부 쪽에 잘못 맞아 실신했다면 이해할 텐데 이마 쪽에 그렇게 출혈이 날 수가 없었다.
“네가 당한 거야···.”
“예?”
“책을 던져서는 그렇게 상처를 입을 수가 없어. 자해한 거야.”
“하지만 방법이 없는걸요! 모두가 보고 있었어요. 그럴 틈이 없었는데.”
프리실라가 등장한 이야기에서 비슷한 게 있었다.
손에 낀 반지. 뭐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명목으로 끼고 있는 물건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삽입식 칼날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거로 이마 쪽을 긁었을 거다.
지금쯤 프리실라는 카르테아에게 이게 흉이 남으면 어떡하죠, 하며 불쌍한 척 연기하고 있겠지.
“어떡하죠?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요. 황태자님이 그 여자를 만나기 전으로요. 그래서 황태자님을 막고 싶어요.
“어떡하긴, 방법을 찾아야지.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그런데, 왜 그런 거야? 대체 왜 걔한테 책을 던진 건데?”
나비에는 강했다. 어려서부터 높디높은 목표를 향해 힘껏 달릴 만큼 의지가 훌륭했고, 자제력이 대단했다.
그녀라면 어지간한 도발로는 그렇게 휘둘리지 않을 텐데, 혹 보복을 하려 했다고 쳐도 보다 은밀하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자기가 황태자님의 씨로 회임할 거라 했어요. 제가 아직 결혼하지 못하고 약혼에 머무르고 있는 건 못생겨서라 했고요. 제 외모가 추해서 황태자님이 동하지 않은 거라 했어요.”
“아니야. 너 이뻐.”
“그 여자만큼은 아니죠.”
“신경 쓰지 마. 미친 소리니까.”
“그러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하나는 카르테아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어렵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해봤지 않는가? 두 번이라고 못 할 거 없었다.
여기에 함정을 파고, 사건을 만들어 잘 조율한다면 그가 프리실라와 다투게 해볼 수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나비에의 말대로 프리실라를 암살하는 것이다. 이건 카르테아의 마음을 돌리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평민인 프리실라가 언제나 제대로 된 호위를 갖출 것도 아니고, 본인의 무력은 없는 수준이니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기숙사에 침입해 죽일 수 있었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 건 덤이었다.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됐다.
문제는 그 후폭풍이었다. 카르테아는 고작 증거가 없었다는 이유로 제 분노를 표출하지 않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놈이라면 필시 나비에한테 화를 풀 거다. 그 강도는 어떻게 될까? 알 수 없다.
카르테아는 무엇하나 참아본 적이 없었다. 황태자로 태어나 갖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모두를 손에 넣고 살았다. 하고 싶은 걸 할 거다. 나비에를 죽이고 싶다면 죽일 거다. 웬만해서는 거기까지 가지 않을 거로 생각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바니 조심해야 한다.
“조금 더 알아볼게. 오늘은 진정하고 아무도 만나지 마. 기숙사로 돌아가서 쉬어.”
“네. 고마워요.”
* * *
가능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는 방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카르테아의 마음을 돌리는 첫 번째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그게 꼭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나는 차선을 대비하고자 이안을 찾았다.
그는 마법학부 건물의 실험실에 있었다. 학기 초라 그런지 아직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게 아니면 이안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안녕? 지금 바빠?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그는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더니 억지로 웃는 척했다.
“자퇴한 줄 알았는데 돌아왔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은. 돌아와야 할 일이 있어서.”
“이름이 프리실라였나··· 걔 때문이지?”
“맞아.”
“아침에 그 일은 봤고?”
“어.”
“그래. 봤구나···.”
이안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는데,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눈치 있는 놈이 아닌데, 이러는 걸 보면 했다가는 내가 화낼 거라 여기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지 다소 뻔했다.
이대로라면 카르테아와 나비에가 깨질 듯하니 옆에서 나비에를 잘 챙겨줘라, 그러면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 않냐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을 거다.
“부탁이 있는데 좀 들어줘.”
“무슨 부탁?”
“자연재해를 일으켜줘. 지진 같은 거로 오늘 책 맞은 애 있지? 걔만 땅에 끼여서 죽던가 해일이 몰려와서 걔만 쏙 물어가게 해줘.”
“내가 대마법사기는 해도 그 정도 실력은 아닌데.”
“꼭 내가 말한 대규모 재앙이 아니라도 좋아. 누가 의도한 게 절대 아닌데, 걔를 죽일 수는 없을까?”
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의외인데? 너 사람 죽이는 게 무지 싫어하잖아.”
“걔는 죽여도 돼. 그래서 혹시 가능해?”
“흐음···. 바로 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그런 대규모 마법은 대기의 마나에 흔적을 남겨서 일이 터지고 며칠 내로 수사한다면 걸릴 거야. 하지만 방법을 찾아보면 아예 없지는 않을 수도 있어.”
“도와줘. 방법을 찾아줘.”
“흠··· 그래, 급한 거 같으니까 빨리해볼게.”
“고마워. 정말 고마워. 부탁할게.”
이안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대답했다.
“어. 그리고 이제 믿을게. 네가 걔 안 좋아한다는 거.”
“갑자기? 왜?”
“아닌 거 같아서. 나라면 그렇게 못 할 거 같거든.”
“그래. 알면 됐어.”
프리실라를 죽일 방법을 모두 이안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었다. 나는 좀 더 방법을 찾고자 고민했다. 조건은 카르테아에게 타살로 의심받지 않을 것이었다. 독이나 참살 따위는 불가했고, 여러모로 까다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