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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99화 (99/125)

제99화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가정해보자.

프리실라가 황후가 될 수 있는가?

아니.

나는 즉시 대답했다. 절대 불가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우선은 카르테아가 이미 나비에와 약혼한 사이라는 게 첫 번째 걸림돌이었고, 프리실라가 평민이라는 게 두 번째 걸림돌이었다. 기껏해야 얼굴 하나로, 그거 하나로 황후에 오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카트레아가 등신이라서 정말로 프리실라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녀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가 그 길을 걸으려고 한다면 정말 온갖 일들이 벌어질 거다.

혹여 카르테아가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래도 불가했다. 작금의 황제가 죽지 않는 이상에는 절대로 프리실라 따위가 황후가 되게 두지는 않을 거다.

만약에 황제가 급사한다면? 그래서 카르테아가 나비에와 결혼하기 전에 황제에 오른다면? 그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면? 오직 이 경우에만 프리실라가 황후가 되는 게 가능했다.

나는 머리털을 뒤로 쓸어넘겼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카르테아를 만나 볼까? 명목상이지만, 나는 아미칸보의 칭호를 쥐고 있었다. 명예뿐인 이름이라고는 해도 황족의 친우라는 뜻이었다. 카르테아를 찾아가 그에게 프리실라를 멀리하라고 충고할까? 아니, 그가 내 말을 듣기는 할까?

모르겠다.

뭐가 어찌 됐건 간에 천천히 계획을 그렸다. 카르테아의 마음을 돌리는 걸 첫 번째 목표로 세운다.

계획을 진행하며 조금씩 반응을 살핀다. 계획이 성공할 거 같으면 그대로 밀고 나가고, 혹 실패한다면 프리실라를 죽이는 쪽으로 변경한다.

이쪽이 맞았다.

카르테아가 몹시 밉고, 등신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황태자였다.

황후가 되는 건 나비에의 꿈이기도 했다. 그들을 계속 밀어주는 쪽이 좋았다. 그럼 계획을 짜보자. 어떻게 해야 카르테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당장에는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나비에한테 매일 그 분장사들을 불러와 화장하고 다니라는 건 내가 봐도 개소리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이대로면 카르테아와 프리실라가 뭐라도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모로 팍팍했는데,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어 카르테아를 찾았다. 그는 직전까지도 프리실라와 함께 있었던 듯했다.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반갑네. 무슨 일이지?”

“황태자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럼 그냥 하게. 그렇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늘려 말하지 말고.”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그냥 하도록 하죠. 나비에와 결혼은 언제 하실 겁니까?”

“하하하···. 나비에가 자네를 시켜서 그걸 알아오려고 하던가?”

“아닙니다. 그냥 제가 궁금해서요. 오늘 일도 그렇고요.”

“자네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아직은 그 문제를 두고 생각하지 않았어.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보통 신분인가? 곧 있으면 황제가 될 몸인데, 천천히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지.”

“나비에와 혼약하는 걸 폐하께도 윤허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카르테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이걸 알고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래. 아버지께서는 나비에가 황후가 되는 걸 허락하셨지. 하지만 그뿐이었어. 언제까지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도 없고, 아버지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도 않았네. 이거면 답이 됐나?”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리실라라고 하나요?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친구 말입니다. 찾아보니 평민 신분인데 입학시험을 거르고 특례 입학을 했더군요. 카르테아 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그래. 그게 불만인가? 평민 주제에 귀족의 특권을 쓴 게?”

잠시 참았다. 카르테아는 표정으로 외치고 있었다. 네가 감히, 네까짓 게 불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고.

없다. 신분도 무력도 뭣 하나 카르테아에게 비빌 구석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바보짓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 나비에가 내 친구라는 이유로 무모하게 행동했다. 내게 기계 같은 이성이 있었다면 나비에를 포기했을 거다. 배신했을 거다.

오히려 카르테아를 두둔하며 프리실라와 결혼하는 데 도덕적인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옆에서 나비에의 흉이나 봤을 거다.

근데 그거 못하겠다.

“불만이랄 게 있겠습니까? 저도 제 할 일을 해야 해서 말입니다.”

“자네가 할 일이라는 게 나비에의 심부름꾼 노릇이나 하는 건가? 그쪽에 줄을 탔나? 아니면 황후가 되면 뭘 해주겠다고 약속하던가?”

“하하··· 그런 게 아닙니다. 카르테아 님께서 제가 칭호를 주셨지 않습니까?”

카르테아는 배를 잡고 나를 비웃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믿는 모양이군. 어이가 없어. 자네도 왜 그 칭호를 줬는지 알지 않나? 눈치 없이 왜 그래?”

“다른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게 왜 그 무거운 이름을 가볍게 하사하셨습니까? 조금은 조심하셨어야죠. 이에 저는 황손의 친우 되는 자로서 조언하려 합니다. 프리실라를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나비에와 했던 약속을 지키시죠.”

“조언은 달게 듣지. 이만 가보게나.”

“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자리를 피하며 카르테아의 표정을 살폈다. 썩어가고 있었다.

* * *

나는 카르테아와 대화를 나누고 안심했다. 별 쓸모없는 대화만 나눈 거 같은데, 알아낸 게 많았다.

카르테아, 그는 겁쟁이였다.

그는 나비에를 밀어내고, 프리실라와 혼인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그 의지가 단단하지 못했다.

욕망은 가득한데, 그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은 부재했다. 그는 프리실라를 안고 가는 데 감당해야 할 걸림돌을 인지하고 있었다.

프리실라의 신분이 카르테아의 발목을 잡았다. 나비에한테 일방적으로 파혼을 요구해야 하는데, 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세간의 시선 또한 그가 과감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가 가는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이를 견딜 인내도 뚫을 용기도 없었다.

그럼 카르테아는 어떻게 나올까? 피해자인 척하고 싶을 거다. 적어도 혼자 가해자로 남고 싶지는 않을 거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정당하게 나비에와 파혼하고 싶을 텐데 이때 나비에가 취해야 할 자세는 하나였다.

이를 일러주기 위해 나비에를 찾았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나비에는 눈이 퉁퉁 부었다. 낮에 일이 있고서 한참을 운 듯했다. 입가에 침이 흐른 자국이 있는 걸 보면 울다가 그대로 잠들었고, 이제 막 깬듯했다.

“들어봐. 조금 알아낸 게 있어. 네가 해야 할 걸 알려줄게.”

“방법을 찾으신 건가요?”

“프리실라를 처리할 방법은 아니야. 하지만 네가 프리실라한테 밀려나지 않을 방법은 알고 있어.”

“그게 뭔데요?”

“아무것도 하지 마.”

“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적어도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죠?”

나는 나비에한테 내 생각을 전달했다. 카르테아가 원하는 바와 의도하고 있는 거를 추측해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아무리 카르테아가 황태자라고 해도 황제는 아니었다. 아직 그는 눈치 봐야 할 존재들이 몇 있었고, 또 작은 세력이라도 똘똘 뭉치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해서 그는 지금 나비에를 합당하게 밀어내고자 준비했다.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정당한 요구로 파혼을 성사해 러브원 가문의 자그마한 분노를 씹고자 했다.

내 이야기에 나비에는 어깨를 들썩였다. 말이 다시금 그녀의 상처를 건드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반드시 집고 가야 할 이야기였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네. 그리고 카르테아 님이 저를 완전히 지우셨다는 것도 알겠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카르테아는 나비에를 만나고 그녀와의 혼사 일을 무지막지한 속도로 진행했다. 이를 본 나는 그만큼 그가 나비에를 원했기 때문이라 간주했다. 그게 아니었다. 그냥 그의 성품이 그런 거였다.

카르테아는 황실에서 귀하게 자라 참을성이 없었다.

무언가를 원해 손을 뻗으면 모두가 그걸 쥐게 해주려고 안달이 났다. 그는 그렇게 자랐다. 그가 나비에를 보고 호감을 품은 뒤도 비슷했다. 마음에 들었으니 그녀와 결혼한다. 그 정도 마음가짐이었다.

카르테아의 마음은 이미 나비에한테서 떠났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뭐가요?”

“아직도 황후가 되고 싶어?”

“네. 그게 아니면 제 삶은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저는 황후가 되어야만 해요.”

“그래. 알았어.”

겁쟁이 카르테아. 그는 뭘 할 줄을 모른다. 이렇게 버티기만 해도 그는 선택의 순간을 맞아야 했다. 프리실라를 택한다면 그가 잃을 수많은 것들. 그걸 카르테아가 버틸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는 겁쟁이였다.

결국에는 안전한 선택을 할 거다.

“괴롭겠지만, 버티자. 귀를 막고 눈을 감아. 필요하다면 잠시 아카데미를 떠나고. 그래도 괜찮아. 프리실라가 아카데미에서 황태자님과 함께 있다는 게 슬프겠지만, 결국에는 황후 자리는 너에게 갈 거야.”

“고마워요. 하지만 그 정도로 괴롭지는 않아요. 감정이란 건 잠깐이잖아요? 끝끝내에는 황후가 제 손에 들어올 거잖아요? 이 정도야 감내할 수 있어요. 아, 그런데 그건 어떡하죠? 제가 프리실라를 상처 입힌 거요.”

“문제없어. 걔가 도발한 게 원인이잖아. 네가 쌓아온 이미지야. 모두가 네 말을 믿을 거라고. 자신을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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