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카르테아는 주변의 귀족들이 프리실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았다. 얼굴 하나 믿고 황태자의 곁에 붙으려는 년. 그것보다 프리실라를 좋게 봐줄 사람이 하나 없음을 인지했다. 실상은 다른데 말이다.
카르테아가 프리실라를 사랑하게 된 건 그녀의 외모도 외모였지만. 다른 인간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자기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생활력이 강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그녀만의 장점이 여럿 있었다.
“다들 널 미워해. 이걸 감당할 수 있겠어?”
“카르테아 님과 함께라면 얼마든지요. 지옥 길도 갈 수 있는걸요.”
“고마워. 그러면 네가 조심해야 할 사람들을 가르쳐줄게.”
카르테아는 라파엘을 집중해서 설명했다.
음흉한 놈이었다. 아무래도 나비에한테, 나비에가 황후가 된다면 대가를 받기로 약속한 듯했다. 그 때문인지 프리실라를 향한 악의가 컸다. 소드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하니 신체 능력도 비상했고, 인망도 두터웠다.
북부의 대공인 아가레스와 마탑주에 오른 이안과 친분이 강하다고 들었다. 자신이 신경 써주지 않는다면 프리실라는 필시 암살당할 것이다.
“항상 내 옆에 있도록 해.”
“고마워요. 저를 위해서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프리실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카르테아의 말을 들으면서 내심 덤덤했다. 그래, 이곳은 위험했다.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깥은 어떤가?
비린내 나는 고기, 물러터진 채소와 과일 따위를 먹어야 한다. 며칠씩 똑같은 옷을 입어야 했고, 먼 거리를 걸을 때도 제 발로 걸어야 했다. 이걸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죽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괜찮아요. 여기 있으면 카르테아 님과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나와 함께 있는 게 그리 좋아?”
“네. 사랑하니까요.”
프리실라의 그 말에 카르테아는 충족감을 느끼며 그녀를 나비에와 비교했다. 나비에는 한 번도 이렇게 먼저 나서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프리실라를 더 지켜줄 수 있을까? 역시나 라파엘 이놈이 문제였다.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아···.”
카르테아의 신음에 프리실라가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러신가요?”
“방법을 찾았어. 정확히는 이유를.”
“무슨 이유요?”
“라파엘을 해결할 방법 말이야. 그놈이 내 약혼자를 비호하는 건, 순전히 그녀에게서 떨어질 보상을 위해서야. 아아···. 이거 내가 멍청했어. 어쩐지 내게 공격적이라더니. 그게 자기를 회유하라는 신호였는데 내가 못 알아봤어.”
프리실라는 카르테아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고작 그런 이유였다고 치기엔 황태자를 향한 언행이 지나치게 과격했다.
“맞아요! 꼭 그런 거 같아요.”
“내가 내일 그를 찾아가 다시 이야기해보지.”
“고마워요···. 저를 생각해주시는 건 카르테아 님밖에 없어요.”
* * *
나는 카르테아의 이야기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했다.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가 잘못 들은 듯해서요.”
“귀가 안 좋나? 다시 말해줄 테니 귀 바짝 열고 잘 듣게. 나비에가 자네한테 뭘 약속해줬는지는 모르네. 하지만 그녀가 줄 수 있는 게 과연 나보다 클까?”
카르테아는 팔짱을 끼더니 피식거렸다. 그는 좌우로 절레절레 머리를 젓더니 조소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어. 나야 내 혼사 문제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지만, 나비에는 아니니까. 자기 인생이 걸린 일이니 막무가내로 큰 걸 질렀겠지. 자네에게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해줬을 거야.”
아직도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아먹기 힘들었다.
어디서 자기 혼자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지 뭔가를 제대로 오해했다. 나는 그가 마음대로 착각하라고 눈만 깜빡였다. 카르테아는 그게 좋다고 말했다.
“자네도 머리가 있다면 알 거야. 황제와 황후 중에 누가 더 많은 걸 자네에게 줄 수 있을지. 그러니 걱정 말고 말해보게. 나비에가 자네한테 뭘 준다고 했나?”
“예. 나비에와 약속했습니다. 그녀가 황태자님과 이어질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죠. 그 대가로 뭔가를 받기도 했고요.”
“아, 황후가 된 후를 약속한 게 아니라 그 보상을 미리 받았나? 그녀의 가문을 생각하면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그녀를 도와주는 대가로 제가 과자를 좀 받았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수되는 척해 카르테아의 약점을 긁어볼까 궁리도 했는데, 고개를 저었다.
꿈 같은 망상이었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내가 카르테아의 정치적 약점을 손에 넣더라도 그거로 카르테아를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가 황제에 오를 게 확실한데 무슨 용기로 그러겠는가? 그러다 눈 밖에라도 난다면?
“으하하, 과자? 과자를 받고 그랬다? 재밌는 농담이군. 진실이라면 더더욱 우습고. 고작 그걸 받고 일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 내게 말해보게. 뭘 원하나?”
카르테아는 과자를 받았다는 내 말을 곡해했다. 마치 나비에는 기껏해야 보상으로 과자나 주는 좀생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나비에와 파혼하고, 프리실라와 혼약할 수 있게 돕는다면 제가 원하는 바를 주시는 겁니까?”
“그래, 물론이지. 그러니 어서 말해보게. 뭘 원하나?”
이렇게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하니 허탈하기까지 했다. 내가 나비에의 편인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정보를 발설했다.
대중 앞에서 맺은 약혼을 멋대로 깨야 하니 그걸 도우라니?
이건 카르테아가 나를 벌레마냥 보고 있음을 뜻했다.
내게 자기의 어떤 약점을 알려줘도 내가 물지 못하고, 어떤 위협도 끼치지 못하리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카르테아의 생각은 진실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간이었다. 내가 아가레스에게 설설 기었던 것만 해도 그랬다. 그가 누구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의 안전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그 탓에 도저히 카르테아에게 대들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에게 퉁명스레 말하는 것뿐이었다. 아주 설설 길지는 않는다는 시위였다.
“저도 의리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이미 과자를 받아먹어서 그럴 수가 없네요. 조금만 일찍 오시지 그랬습니까? 그랬다면 분명 황태자님을 따랐을 겁니다.”
카르테아는 등신이었지만, 아주 말귀까지 못 알아듣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멍청하군.”
“살짝요. 아주 멍청하지는 않고. 종종 그런 말을 듣기는 하는데, 막 그렇게 멍청한 거 같지는 않아요.”
“멍청한 선택을 한걸 두고 두고 후회할 거야. 아무래도 자네는 내가 황제에 등극하는 게 머나먼 미래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길어도 3년이야. 그 후 수십 년을 집권할 텐데 그걸 감당할 수 있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선택을 후회하겠죠. 사람은 역시 줄을 잘 서는 게 제일 중요한데, 저는 잘못 섰네요.”
“이건 마지막 기회야. 이제라도 그 말을 철회하게.”
“거절하겠습니다. 의리는 지켜야죠. 나비에가 준 과자 맛이 아주 일품이었던 터라. 카를렌이라는 이름의 가게였는데, 혹시 황태자님도 들어보셨습니까?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드셔 보시죠. 황태자님도 반할 겁니다.”
퍼억.
카르테아는 나를 손바닥으로 밀치고는 뒤돌아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자리를 떴다.
* * *
나는 아카데미가 개학하고 한참이 지나서 돌아온 터라 이미 중간고사가 지나간 뒤였다.
사실 시험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시험이 있으면 있는 거지, 그딴 데에 시간을 쏟지는 않았을 거다.
게다가 아카데미에 재학하기 위해 강의 몇 가지를 신청하기는 했어도 출석하지는 않았다.
아카데미의 일정 전부를 그대로 무시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건물을 지나가는 중에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무투회를 연다고 포스터가 건물 벽에 붙여져 있었다.
무투회.
아카데미에서 쌈박질 제일 잘하는 놈을 뽑는 대회였다. 작년에도 이런 게 있었는데 별 관심이 없어 무시했다. 이런 데 나가서 뭐 한다고. 아무 의미 없었다.
하지만 나는 무투회의 포스터를 자세히 확인했다. 그 날짜와 뽑는 인원수, 규칙 따위를 암기했다.
내가 이 무투회에 참가한다면 카르테아도 따라 나올 것이다. 그는 성격이 유치한 데다가 남들을 통해서 우월감을 느끼는 걸 좋아하는 놈이니 나를 짓밟아주기 위해 참석할 거다.
무투회에 참가하면 카르테아와 싸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카르테아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그럴 확률은 낮았다. 카르테아는 용의 피를 짙게 타고나 어마어마한 신체 능력을 지녔다. 거기에 보통의 도검으로는 그의 피부를 썰 수 없었고, 검기를 두른다고 해도 그의 뼈를 잘라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승산이 0은 아니었다.
그 근거는 두 가지였다. 우선 작금의 카르테아는 같은 시기 원작에 카르테아보다 훨씬 약했다. 남주들의 모든 파워업 이벤트는 비숏과 관련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카르테아는 비숏과 조금의 접점도 없었던 탓에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그의 무력은 입학식 때와 유사했다.
그다음으로는 내 강함이었다.
최고의 검술가와 최고의 마법사에게 교육받았다. 스스로도 제법 노력했다고 자부했다. 무투회의 규칙상 아티팩트인 장갑은 쓸 수 없었으나 이건 감당할 부분이었다.
무투회에서 카르테아를 만난다. 그러면 이기거나 혹은 패배할 거다. 그를 이기면 뭘 얻을까? 지면 뭘 잃을까?
아무것도 없었다. 이기면 기분이 좋을 거고, 지면 기분이 나쁠 거다. 이건 카르테아도 그랬다. 내게 지면 그의 기분이 썩어가겠지. 이거면 충분했다.
나는 무투회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