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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03화 (103/125)

제103화

검술로 카르테아를 농락했다. 무투를 끝낼 수 있으면서 일부러 질질 끌며 관객들에게 그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비에가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걔를 떠올리면 아직도 피가 말랐다. 평생을 황후가 되기 위해 살아온 애였다.

노력했고, 절제했다. 황후가 되기 위해서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자기를 학대했다. 카르테아의 무절제가 그 꿈을 파괴했다. 그의 변덕 한 번이 나비에한테는 재앙이었다.

눈물이 없는 친구였다. 꼭 울어야 한다면 그건 슬퍼서가 아니라 필요해서인 친구였다. 펑펑 울며 괴로워했다. 그건 지금도 그럴 거다. 어쩌면 아주 오래오래. 재수가 없으면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을 따라다닐 거다.

‘죽일까?’

카르테아에게 일순간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옆에서 신관이 대기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가 손 쓸 새도 없이 숨통을 끊으면 될 일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황족이다. 뒷감당을 할 수가 없어.’

억지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이만 이 무투를 끝내고자 했다. 할 만큼 했다.

‘아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카르테아의 피부는 강철보다 단단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아니었다. 일부러 카르테아와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칼을 휘둘러 그의 머리카락만을 베었다. 낫으로 풀을 베듯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를 대머리로 만든다거나 하는 건 불가했다. 그건 너무 과했고, 의도했다는 게 티가 많이 났다. 그래서 적당히 조절했다. 평소 카르테아는 자신을 꾸미고, 단장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 정도면 크게 스트레스를 받겠지.

카르테아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헐벗은 채 피 웅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피를 뒤집어썼다. 머리카락까지 다 잘려 잘생긴 얼굴에도 몹시 추했다.

무투를 시작하기 전에 카르테아가 내게 어떤 보복도 가하지 않을 거라 말했으나 이건 그 정도를 넘었다. 아미칸보의 칭호를 빼앗기는 선에서 멈추면 좋겠네, 소망하며 마무리를 준비했다.

나는 경기장 밖에서 무투를 관람하는 신관을 확인했다. 방금 생긴 상처라면 어지간해서는 모두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카르테아에게 항복을 받아내자.

여태 그를 피해서 도망치듯 자잘한 상처만 입혔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이쪽에서 카르테아에게 접근했다.

쿠우우욱!

눈을 노리고 검을 찔렀다. 눈이라도 감고 있었다면 눈꺼풀을 뚫는다고 칼이 제 힘을 잃었을 텐데 안구는 달랐다. 막히는 거 없이 칼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아아!”

누가 봐도 내가 이길 방법은 이 정도였으니 카르테아도 이해해줄 거다. 검기를 두른 칼날도 겨우 피부를 베는 게 끝이었으니 안구 쪽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이 정도는 당해도 싸.

카르테아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심판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나를 밀치며 카르테아의 전투 불능을 선언했다. 내 승리였다.

쉬이이이이이이익!

카르테아가 내게 뛰어왔다. 이상했다. 그 속도가 여태까지 본 그 무엇보다도 빨랐다. 그리고 카르테아는 손을 뻗었다. 손이 컸다. 어지간한 대형 방패보다도 큼지막한 손에는 뾰족한 발톱이 달려 있었다.

그는 드래곤으로 변하고 있었다. 초대 황제를 제외하면 누구보다 용의 피를 짙게 이은 그였다.

쿠우우우우욱!

반쯤 드래곤으로 변한 카르테아의 손이 내 몸을 꿰뚫었다.

카르테아의 피부에는 비늘이 돋아났다. 그의 등에는 날개가 솟았다. 그는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죽여주마··· 내가 널 죽여주마··· 반드시.”

이런 게 된다는 말은 없었는데.

원작에서도 카르테아는 성장하기는 했어도 무식하게 신체 능력만을 앞세워 싸우다가 무술을 배우고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는 쪽이었지 이런 건 아니었다.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거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으아아아아악!”

관중들은 비명을 질렀다. 여기 있는 관중들 대부분이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 그들은 아가레스가 폭주했던 걸 기억했다. 그 일을 상기하며 그대로 도망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죽는 건가?

더할 나위가 없이 허무했다. 살아남기 위해 했던 지난 1년의 노력이 스쳐 지나갔다. 비숏이 남주들과 이어지지 못하게 막고, 그녀와 화해하고 별 걸 다했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끝끝내 원작의 남주 손에 죽는 것이었다. 이게 운명이었나 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내 몸을 꿰뚫은 카르테아가 날아갔다. 반쯤 드래곤으로 변한 채라 그 크기가 3m가 넘었는데 그대로 날아가 관중석에 처박혔다.

“빨리 치료해.”

이안이었다. 그는 관객들을 따라 도망치려 한 신관을 붙잡아와 내게 내밀었다. 신관은 이안의 눈치를 보며 내 배에 회복을 걸었다. 상처가 낫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 명줄이 이렇게 짧을 리가 없었다.

“약속 기억해?”

이안은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을 쏟아내고 있었다. 원래도 저 상태에 들어서면 눈이 시뻘겋게 변했는데, 지금은 그게 더 심했다.

“무슨 약속? 우리 약속한 게 좀 많아야지.”

“네가 저 새끼한테 지면, 내가 죽여주기로 한 거.”

“아아··· 그거. 기억하지.”

“암만 봐도 이거 네가 진 거 같은데.”

“맞아. 내가 졌어. 저딴 괴물을 어떻게 이겨?”

“그래, 그러면 약속대로 내가 할게.”

아아.

이안하테 그런 부탁도 했었다. 절대 타살이라 생각하지 못할 방식으로 재난을 일으켜 프리실라를 죽여달라고 말했었다. 그때 이안은 자기가 대마법사지만, 그런 재앙을 불러올 수는 없다고 답했다.

그거 완전히 거짓말이었네.

하늘에서 폭풍이 몰아쳤다. 새까만 구름이 몰려왔다. 벼락이 떨어져 카르테아를 격추했고, 불덩이가 그를 태웠다.

“으아아아아아!”

카르테아는 고함을 질렀다. 원래도 그의 피부는 항마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반쯤 드래곤으로 변하면서 항마력이 더욱 강해졌다. 땅을 부수고 찢는 마법의 폭격 속에서도 카르테아는 공격을 버텨냈다.

그리고 이안의 공격이 잠시 빈틈, 카르테아가 반격에 나섰다.

쿠우웅!

카르테아는 날갯짓으로 도약했다. 그는 허공에 떠 있는 이안에게 다가섰다. 이안은 자신과 카르테아 사이에 마나의 방벽을 만들어 충돌을 피하고자 했는데, 카르테아는 가볍게 꿰뚫었다. 그가 드래곤으로 변하며 더 큰 힘을 냈다.

퍼어어어어억!

카르테아는 이안을 붙잡고 그대로 낙하했다. 이안은 제 몸에 중심으로 쉴드를 친 채 땅에 내다 꽂혔다. 그는 잽싸게 정신을 차리고 블링크를 써 카르테아에게서 벗어났다.

“이 괴물 새끼, 보통이 아니네.”

“하하하··· 힘 좀 써봐. 죽여준다며. 언제 보여줄 거야?”

“좀 기다려.”

이안의 동공이 확장했다. 눈이 더욱 커지며 더욱 강렬하게 붉은빛을 뿜었다. 눈 안에 태양이라도 박아넣은 듯했다. 그가 주변에 마나를 빨아들였다.

“보여달라고 했지? 그래, 보여줄게.”

푸아아아아아아아!

이안의 손 너머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겼다. 그는 마법진 너머로 돌덩이를 쏘았다. 하나하나가 톤 단위로 세어야 할 큼지막한 돌덩이를 산사태가 일어나 산이 무너져 돌이 쏟아지는 기세로 뿜었다.

퍼어어억! 퍼어어억! 퍼어어억!

이안을 향해 달려들려던 카르테아는 한 방씩 돌에 격추당했다. 괴물 같은 맷집과 가공할 힘으로 버티는 듯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초 단위로 거대한 바위가 순식간에 날아와 몸에 처박히니 그로서도 어찌 당할 도리가 없었다.

카르테아는 돌에 부딪힐 때마다 휘청거리며 속도를 잃었다. 그러길 약 10초. 그는 그대로 추락했다. 이안은 그렇다고 상대를 봐주지 않았다. 점점 더 높이 날아오르며 위에서 아래로 카르테아에게 돌을 쏟아냈다.

“죽이면 안 돼!”

이안은 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아까는 죽이라며.”

“죽일 기세로 때려달라는 거였지.”

카르테아는 수십 톤 분량에 돌에 깔려 옴싹달싹 못하는 상태였다. 어떻게든 돌을 치워내고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몸에서 유일하게 얇아 약하다시피한 날개만 찢어지려 했다. 그는 결국 움직이는 걸 포기하고 체념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손가락으로 카르테아를 가리키며 묻자 이안이 황당하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마법사잖아. 마법이라 하면 드래곤이고.”

“몰라. 그러니까 묻지 마.”

이 자리에 남은 건 넷이었다.

나와 이안, 카르테아와 이안이 붙잡은 신관.

우리는 뭘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 잘 싸우더라.”

“저 괴물한테 졌는데도?”

“그래도. 저게 좀 이상하게 보여도 반쯤은 드래곤인데,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

“너는?”

“나는 보통 인간이 아닌 거고.”

그제야 다시금 이안이 날 살렸다는 걸 상기했다. 상황이 너무 황당무계해 이제야 이걸 말했다.

“구해줘서 고마워.”

“부탁이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래.”

* * *

약 일곱 시간 정도가 지나서 카르테아는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암만 봐도 드래곤으로 변하고, 인간으로 다시 돌아오는 조건은 그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카르테아는 인간의 몸으로 변함과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나는 이안에게 부탁해 카르테아의 몸에 쌓인 돌을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돌은 서로서로 무게를 지탱해서 카르테아가 그 무게를 모두 감당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저러다가는 죽겠다 싶었다.

돌의 무덤에서 탈출한 카르테아가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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