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카르테아는 드래곤으로 변했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면서 기억에 약간의 손실이 생긴 듯했다.
“어디까지 기억이 나십니까? 드래곤으로 변했던 건 기억이 나나요?”
“드래곤으로 변하다니, 내가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야?”
“저와 무투하던 중에 드래곤으로 변했던 걸 잊은 겁니까?”
내 말에 카르테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기장은 엉망이었다. 박살 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무너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게 내가 한 건가?”
“저와 싸우시던 중에 제게 상처 입은 건 기억이 납니까?”
“그래, 자네가 날 놀림거리로 만들었지. 마지막에는 눈을 꿰뚫으려 했고.”
“사실과는 다릅니다. 제 능력으로는 황태자님께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가 없으니 자잘한 상처만을 입혔을 뿐이고, 눈을 뚫은 것도 제가 승리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혹 눈에 상처를 입히더라도 뼈를 뚫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 생명에 영향이 없을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말이 술술 나오는 걸 보아하니 미리 대답을 준비해뒀나 봐. 영약하군.”
“그보다 눈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래, 내가 쓰러져있는 동안 신관에게 치료를 했으니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
그게 아니었다. 설정에 따르면 드래곤은 뛰어난 재생능력도 지니고 있었는데, 그가 드래곤으로 변신한 동안 저절로 눈이 회복된 듯했다.
“오늘 일은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평생 두고두고 기억할 걸세. 아니. 하하하하···. 그래 조금씩 다시 기억이 떠올라. 그래! 자네 강하더군.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했어. 그리고 나를 농락했지. 가지고 놀았어. 재밌었나?”
“가지고 놀다니요? 최선을 다해 싸우다 보니 과격해졌던 것이죠.”
“내 평생 잊지 못할 치욕을 오늘 받았으니 자네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은원을 잊지 않아.”
황제가 될 이의 분노를 샀다. 그가 황제가 된 후에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 뭔 일이 터져도 터지기는 할 거다. 그러나 괜찮았다. 이 정도는 해줘야만 했다. 나비에가 느꼈을 고통 일부라도 그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내가 한 건 미친 짓거리였다. 두고두고 후환으로 남아 날 괴롭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후회가 되지 않았다. 왤까? 카르테아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족감이 들었다.
잠시 후 우리는 아카데미의 학장, 프란츠를 만났다. 그에게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나와 카르테아가 싸웠고,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해 날뛰는 걸 이안이 제압했다고 요약해서 말했다.
“이거 놀라운 일이군요. 혹시 그 전설을 알고 있습니까?”
루인제국의 초대 황제는 드래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실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드래곤으로 변할 가능성 말이다.
드래곤은 단순히 여러 종족 중 하나가 아니었다. 인간을 포함해서 누구 하나 근접할 수 없는 최강의 종족이자 마법의 주인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완벽한 변신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겁니다. 황태자님께서는 잠시 황궁으로 돌아가 폐하께 이번 일을 말씀드리시지요.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하오크의 설며을 모두 들은 후, 카르테아가 내게 말했다.
“난 아직도 자네가 증오스러워. 내가 살아가는 동안 그런 치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거든. 하지만 만약에 내가 황제가 되는 걸 자네가 앞당겨 준 꼴이라면 조금은 참작해주지. 제발 그러길 바라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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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치신 거 아니에요? 돌았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에요? 말도 안 돼! 어떻게 황태자님한테 그런 짓을!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정말!”
무투회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자 나비에는 과민하게 반응했다. 하기야 내가 말하면서도 그때 나는 뭐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무슨 용기가 나서 카르테아에게 그랬다는 말인가? 그때는 여러 가지 요소가 겹쳐서 판단력이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도 카르테아에게 악감정이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싫어하고, 혐오하게 될 줄은 몰랐을 만큼이나 그를 증오했다. 또한 피를 보며 싸우는 중이라 더 흥분했다. 일을 곰곰이 생각하지 못하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아··· 아··· 정말 말도 안 돼요.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어떻게 그러고도 멀쩡한 거에요? 황태자님께서 죽이려고 들지는 않았나요?”
“괜찮아. 명목상 대련 중에 일어난 일이고, 그도 자기를 다치게 한 거를 가지고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그걸 믿어요? 혹 그렇다고 해도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였어요. 지금 당장 이번 일을 가지고, 당신에게 뭔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거라 생각하세요?”
“적어도 황제에 등극하기까지는 괜찮겠지.”
“네. 딱 그때까지 에요. 그가 황제가 된 후에 당신한테 뭔 짓을 할 거 같아요? 여기는 제국이에요. 황제의 권력은 무한하다고요. 그가 하려고 든다면 당신을 죽일 수도 있어요.”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제국에 귀족들 모두가 황실과 친밀한 건 아니었다. 북부에 아가레스만 봐도 그랬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그는 세금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로 꽤 오래 황실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카르테아가 황제에 오르자마자 이렇다 할 명분 없이 나를 해치기는 힘들었다.
“진짜 멍청한 짓이었어요. 그런다고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하하, 얻은 게 없기는 왜 없어? 그래도 기분 하나는 죽여주더라. 카르테아한테 칼질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아주 좋았어.”
“고마워요.”
나비에는 입술을 씹으면서 말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뭘?”
“왜 그러셨는지요. 저를 위해서였잖아요. 그건 제 복수 같은 거였잖아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네···. 알았어요. 그런 거로 알고 이 이야기는 그만할게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오늘 나비에를 찾은 건 무투회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는 것도 있었지만, 기분 전환을 위해서였다. 나비에는 요 몇 주 째 우울하게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주변에 나와 서로 친구라 생각하는 이들은 다 한 번씩은 먹어본 음식을 해주고자 했다.
우선은 떡볶이부터.
나비에가 추천해준 식당들을 이안과 함께 돌아봤을 때 느낀 건 다 맛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나비에는 평소 먹는 음식만 먹는 듯했다. 그러니 이런 맛을 느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요리가 있어.”
“라파엘 님이 직접이요?”
“어. 내 솜씨가 좋은 건 아닌데, 괜찮은 음식의 레시피를 하나 알고 있어서. 대체로 반응이 좋았단 말이야? 조금만 기다려. 오래 걸리는 음식이 아니거든.”
“좋아요. 재미있을 거 같아요.”
나비에가 떡볶이를 맛보는 건 처음이라는 걸 유의하며 조리를 시작했다.
다들 나중에는 적응해도 처음 떡볶이를 맛볼 땐 괴로워하고는 했다. 나도 그들을 이해했다. 이건 혓바닥이 연약한 사람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매웠다. 현대에 있을 때 종종 떡볶이를 먹었던 나도 라파엘의 몸에 빙의한 후에 떡볶이를 먹으니 입에서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다른 이들을 오죽했으랴.
그런 연유로 떡볶이에 넣을 고춧가루의 양을 조절했다. 고춧가루의 양을 절반쯤으로 줄여 평소보다는 덜 빨간 떡볶이를 만들었다. 떡을 접시에 담아 내가자 나비에가 말했다.
“으음···. 냄새가 좋은데요.”
“이게?”
“네! 벌써 기대되기 시작했어요. 빨리 먹어보고 싶어요.”
볼을 긁적거렸다.
애가 빈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건 처음 먹는 사람의 입맛에 딱 들어맞기 쉽지 않은 음식이었다. 과연 나비에가 떡을 먹고도 지금 같은 표정일까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암···.”
나비에는 오물오물 떡을 씹었다. 조금씩 그녀의 표정이 변해갔다. 눈썹이 정수리에 닿을 듯 위로 올라가고, 눈을 치켜떴다.
“맛있어요!”
“정말? 입에 안 맞으면 그냥 놔도 괜찮아. 이거 말고 다른 거도 하나 있어. 그건 이것보다 호불호가 안 갈리는 거라 다른 걸 해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이게 좋아요. 이게 입맛에 맞아요.”
진심인 듯했다. 콕. 콕. 콕. 포크로 떡을 찌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녀는 금세 접시 위에 떡을 다 먹어치웠다. 입으로 숨을 조금씩 뱉는 걸 보면 맵기는 매운 모양인데, 아주 잘 먹었다.
“더 줄까? 재료라면 넉넉하게 남아 있는데.”
“네. 이번에는 같이 먹어요. 가능하면 양념은 조금 더 뿌려서요.”
“너무 맵지 않아?”
“딱 보니 그게 매력인 음식인데요, 뭘.”
“하하. 알았어. 그러자.”
여기 애들은 다들 매운 음식을 못 먹을 거라 판단했다. 다들 맵찔이였는데, 나비에만은 달랐다. 강철 같은 혓바닥으로 고춧가루 폭격을 잘도 견뎠다.
“누구에요?”
“뭐가?”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요. 이걸 해줬을 때 다들 반응이 좋았다고. 누가 저보다 먼저 이걸 먹어본 거죠?”
“이안, 아가레스. 그 둘.”
“너무하시네요. 저는 뭐가 생기면 항상 먼저 챙겨 드렸는데.”
“아아··· 그건 미안해.”
“아뇨아뇨. 사과를 듣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아쉬워서요. 제 입맛에 정말 잘 맞는 음식인데 이렇게 늦게 알게 된 게요. 이거 이름이 뭐라고 했죠?”
“떡볶이.”
나비에는 떡볶이를 반복해서 말하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