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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05화 (105/125)

제105화

카르테아는 자신의 특별함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장자. 황태자라는 자리. 출생의 비범함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선택받아 태어났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 무투회에서 생긴 일에 분노했고, 놀라워했다.

분노는 라파엘과 한 싸움이었다. 전력으로 덤벼들었는데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분명 자신이 훨씬 빠르고 강한데, 무엇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놀아주는 꼴이었다.

그렇게 된통 당하는 게 온 관중 앞에서 드러났다. 그 치욕을 떠올리면 아직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놀라웠던 건 제 정체였다.

‘정말 드래곤의 후손이 맞았구나.’

제국의 전설 혹은 설화가 진실이었다. 어릴 적에 카르테아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드래곤의 후손이라니? 단순히 힘이 센 게 아닌가? 몸이 튼튼하고 힘이 셀뿐이지 이게 어떻게 조상이 드래곤이었다는 걸 증명한다는 말인가?

나이가 들면서 차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았고, 섬겼다. 그거면 됐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정말 기뻐할 거야.’

반대로 그의 아버지인 루인 제국의 황제는 달랐다. 아니, 대부분은 그 전설을 믿으며 자라왔다. 자신들의 조상인 드래곤이 이 나라를 수호했으니 특권을 누리는 건 당연하다고 믿어왔다.

장정 수백 년간.

이번 무투회에서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하는 걸 본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이건 반드시 소문이 퍼질 것이고, 다시 한번 모두가 황족들을 경배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카르테아는 라파엘 탓에 추한 꼴을 보였다. 수많은 이들 앞에서 고작해야 일개 검사한테 무너졌다. 황족으로서의 위엄을 잃은 것이었다.

황제는 누구보다 고고하고, 위대해야 했다. 일신의 무력은 소드마스터 등보다 약하다고 해도 절대 패배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서는 아니 됐다.

본래라면 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들을 일이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대로 할 수도 있었다.

황태자이니 사치를 부리는 건 괜찮았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위엄을 잃는 것만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불완전하게나마 드래곤으로 변했다는 사실만으로 뒤엎었다. 이제 모든 제국민이 황족의 조상이 제국을 수호했다는 것을 믿을 것이고, 황실에 머리를 숙일 것이다. 그리고 카르테아는 여태 있었던 어느 황족보다 특별한 황족으로 남을 것이다.

카르테아는 초대 황제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드래곤의 모습을 보여준 황족이었다. 곧 있으면 이 문장에서 한 단어가 변했다. 황족에서 황제로.

자신이 황제에 등극하는 건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라 판단했다. 아마 카르테아뿐이 아니라 황족과 귀족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이번 일이 퍼진다면 그게 변할 수도 있었다.

모든 황족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다. 그럴 게 자기들의 지위와 특별함 따위를 증명해주었다.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이건 제 아버지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드래곤의 후손이라는 걸 믿고 있었다. 설혹 황제의 자리를 조금 일찍 달라 해도 사랑스러운 아들내미의 요청을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카르테아는 프리실라에게 말했다.

“잠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

“저도 따라갈 수 있을까요? 혼자 여기에 있는 건 너무 무서워서요. 제발요···.”

프리실라의 요청에 카르테아는 잠시 멈칫거렸다. 프리실라는 한 번도 무언가를 이리 간절하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첫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괜찮을 거 같은데.’

아직은 자신이 드래곤으로 변했었다는 게 소문이 덜 나 자신을 향한 민심이 흉흉한 구석이 있었다. 신분이 떨어지는 영애와 기어코 약혼한 게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래놓고 얼굴 하나 반반할 뿐인 평민 여자를 데리고 다니며 기존의 약혼을 깨려 하니 시선이 고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달라질 것이다. 고작해야 염문. 기껏해야 바람. 후대에는 여자를 밝혔다고 한 줄쯤 추가될 것이다. 그까짓 거 전혀 상관없었다.

황족이 드래곤의 후손이라는 걸 다시금 제국민에게 상기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자잘한 일들을 무시하기는 충분했다.

“좋아. 같이 가자.”

“감사해요. 아하하···.”

카르테아는 프란츠의 조언대로 황제에게 제가 변신했음을 알리기 위해 아카데미를 비워두고 떠났다.

* * *

여태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은 이들 중에 가장 미식가를 꼽는다면 역시나 나비에였다.

이안은 어린 시절이 불우해 다양한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고, 아가레스는 이런 쪽으로는 영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나비에는 교양과 예절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음식을 보기 좋게 먹는 방법을 배우며 다양한 음식을 맛보았다.

“아아! 이거 레시피를 공개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만 먹는다는 게 너무 아까워서요. 사람들이 다 맛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비에는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게 내심 꺼림칙했다.

며칠 전 카르테아가 프리실라를 데리고 아카데미를 떠나 황궁으로 향했다. 미친 거 아닌가? 거기가 어디인데 프리실라를 데리고 간다는 말인가? 이건 작정했다고 봐야 했다. 자기가 패악질을 부리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다들 눈을 감을 거라고 믿은 것이었다.

이번 건 정말 위기가 맞았다. 카르테아가 칼을 빼 들었다. 전에는 나비에한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모든 일에 반응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황후의 자리를 노린다면, 변수를 만들기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이게 치킨이라는 거군요. 확실히 음식의 의의를 잘 알겠어요. 원래 저는 닭고기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고기 본연의 맛이랄 게 없어서요. 그런데 확실히 치킨은 다른 구석이 있어요···.”

나비에도 이렇게 음식의 맛을 품평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여 시간을 죽이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내가 괜히 나서서 일을 만들었네.”

“아뇨, 괜찮아요. 이렇게 될 거를 예감하고 있었어요. 프리실라가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부터요. 그때부터 황태자님의 마음이 떠난 것이었잖아요? 마음 하나로 폐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와 약혼했는데, 마음이 떠났으니 다시금 그 행동력이 나올 줄 알았어요.”

본래 유럽은 일부일처가 기본이었으나 이곳은 조금 달랐다. 개신교 대신에 태양신이라는 종교를 국교로 삼은 탓이었다. 프리실라라면 절대 황비 자리에 만족하거나 하지 않을 거다. 반드시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할 텐데, 이걸 막아낼 수 있을까?

어려웠다. 프리실라를 암살하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나비에가 황비로 들어가? 확신하건대 그러면 나비에는 죽는다. 프리실라는 사람 죽이기를 우습게 알았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나비에가 황비로 들어간다면 이를 불편하게 여겨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일 거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냥 포기할까 봐요.”

그래도 괜찮냐고 묻고 싶었으나 답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을 코앞에서 포기하는 건데, 어떻게 괜찮겠는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나비에가 웃었다.

“지금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게 많아요. 황태자님께서도 별 탈 없이 약혼을 깨고 싶으실 테니 어지간한 요구라면 다 들어주시겠죠. 새로운 영지나 돈이요. 그거면 저희 부모님도 아쉽겠지만 그래도 만족하실 거에요.”

이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어떻게 봐도 지금 취할 수 있는 것 중 가자 합리적인 방법이었는데, 이를 시행한다면 가슴이 아플 거다. 해서 선뜩 그리하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나비에는 눈치가 빨랐다. 내 표정만을 보고도 의도를 알아차려서는 말했다.

“역시 이게 옳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옳기는 뭐가 옳아. 그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반박하고 싶은데, 그게 생각이 안 나서 그래.”

“황태자님도 이제 안 계시는데, 제가 여기에 남아서 뭘 더 할까 싶네요. 저도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 오려 해요. 가족들과 상담해보게요.”

얼마 전, 나비에는 가족들과 화해했다고 말했다. 그걸 계기로 그녀의 가족 관계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몰라도 내가 아는 그들이라면 수락하라고 말할 거다. 그리고는 카르테아한테서 받아내야 할 걸 주렁주렁 말할 거다.

“그래. 알았어. 다음에 봐.”

“네. 건강하게 돌아올게요. 라파엘 님도 너무 마음 쓰시지 말고 잘 지내세요.”

* * *

카르테아와 프리실라, 나비에 모두 아카데미를 떠났다. 내가 구태여 아카데미로 돌아온 이유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다시 영지로 돌아가기도 뭐한 게 카르테아가 언제 돌아올지 미지수였다.

“그래서 그때 어떻게 하신 겁니까?”

“검술을 배울 때 다들 그렇게 말했잖아. 상대의 자세를 잘 보라고. 잘 봐서 다음 동작을 예측하고 대응하라고.”

“음. 예. 그게 기본이죠. 저도 압니다.”

“그거였어. 상대의 자세를 잘 보니까 예측이 되더라고.”

“재능이라는 말이군요.”

“아니, 아닐 거야. 이것도 깨달음의 일종이라 생각해. 소드 마스터에 오르기 전에 거치는 한 과정.”

내 입에서 소드마스터라는 단어가 나오자 레오는 스읍 숨을 삼켰다.

“하하···. 전에 자신 있다고 했던 게 부끄럽네요. 라파엘 님에 비하면 저는 거의 제자리걸음만 한 꼴이니까.”

“그렇지 않아. 싸워보니까 알겠더라. 전보다 확실히 성장했다는 거.”

레오에게 조금씩 대련 때 일을 알려주었다. 이제 꼭 그를 성장시켜야 할 이유는 사라졌지만, 그를 가르치고 있으면 나도 나름대로 얻는 게 있었다. 또 재밌기도 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편지 한 통이 왔다. 뭔가 싶어 꺼내 드니 진짜 금이었다.

황제가 나를 황궁으로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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