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루인 제국의 황제, 카르시아는 카르테아가 아미칸보의 칭호를 가볍게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혀를 찼다. 어지간해서는 아들을 훈계하지 않았고, 다소 유하게 대한 그였으나 한 가지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황실의 위엄을 어지럽히는 일. 그것만은 용서하지 못했다. 그가 언제 한 번은 날을 잡아 카르테아를 교육해야겠다고 벼르던 중에 또 한 번 카르테아가 사고를 터트렸다.
이를 들은 카르시아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카르테아가 선을 넘었다.
카르테아가 아카데미의 대련에서 어느 검사에게 비참하게 패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상대는 라파엘 아이작이라고 나름대로 유명한 무가의 자제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에 오르며 황제의 귀에도 몇 번인가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까드드득. 카르시아는 이를 갈았다.
그래, 싸우다 보면 질 수도 있다. 상대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나름 한 가닥 하는 놈인 듯했다. 제 또래 중에서는 가장 난 놈이겠지. 질 수도 있었다는 걸 이해했다. 사람이 언제나 이기기만 하겠는가? 져 가면서 배우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아니었다. 고귀한 피가 흐르는 놈이 어찌 남들 앞에서 위엄을 잃는다는 말인가?
멍청하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와 공개된 장소에서 싸우다니 등신이 따로 없었다.
만약에 여기서 소문이 끝이 났다면 경을 쳤을 것이다. 카르테아를 불러내 이번에야말로 따끔하게 혼을 내며 벌을 줬을 텐데, 한 가지 소문이 그 꼬리를 물었다.
소문에 따르면 카르테아가 라파엘에게 비참하게 밀리던 중에 드래곤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드래곤으로 변하다니? 어지간해서는 한 귀로 흘리고 무시했겠지만, 그때 일을 떠드는 자들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카르시아는 어릴 적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황족은 모두 본래의 모습인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있다. 그들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건 그 방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른 드래곤이 찾아와 그 방법을 알려주거나 스스로 깨우친 자가 있다면 드래곤으로 변하는 게 가능했다.
카르시아는 카르테아를 둘러싼 소문의 진위를 확인했고, 활짝 웃었다.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하다니! 심지어 날개를 사용해 날아오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외향만 변한 게 아니라 드래곤의 힘을 일부 끄집어냈다.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가 진실이었다.
이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루인 제국의 초대 황제가 드래곤이었다고 하나 그건 수백 년 전에 이야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너무 막연한 일이었다. 카르시아 본인만 해도 그랬다. 자신은 선택받은 인간이다. 자신의 몸에는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
거기에 자부심을 가졌으나 한 번쯤은 이를 증명하고 싶었다. 제 입으로 떠들어봤자 아랫것들은 믿는 척만 하며 헛소리한다고 치부할 거다. 카르시아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제국의 국민 모두가 황족의 피에는 위대한 드래곤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받아들이게 하기를 바랐다.
‘됐어! 됐어!’
그트록 고대해왔던 일을 카르테아가 이뤘으니 더할 나위가 없을 만큼 기뻤다.
‘그런데 어쩌다 드래곤으로 변했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대련 중 라파엘에게 상처를 입음과 동시에 변했다고 들었다. 감히 황족에게 상처를 입힌 라파엘이 괘씸했지만, 또 라파엘은 나름대로 카르테아와 사이가 좋은 듯했다.
라파엘, 아미칸보의 칭호를 받은 그놈이지 않은가? 게다가 어지간히 친한 게 아니라면 옆에 신관이 있어도 뒤가 무서워 그렇게 황족을 공격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이렇게 된 거, 그 라파엘이란 놈을 부르자. 내 눈으로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하는 게 보고 싶다.’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건 확실한 정보였다. 이제 그 방법만 알아보면 됐다. 어쩌면 카르테아가 사용한 방법이 그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카르시아 본인도 드래곤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충분히 실험해볼 만한 거리였다.
* * *
루인 제국의 황제, 카르시아가 나를 보고자 희망한다고 서찰을 보냈다. 그는 내가 카르테아와 친우인 게 기쁘고,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있게 이바지한 바를 높이 산다고 전했다.
편지를 카르시아가 직접 썼을 리도 없고, 누군가한테 대필을 맡겼을 텐데도 짧았다. 편지만을 보고 무슨 일인지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확연히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게 기여한 바가 커?
어찌 보면 이건 순전히 내 성과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이 문제였다. 보통의 황제라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일이었다.
불안한 구석이 있지만, 나는 황궁으로 가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제의 초대인데,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옷을 갖추어 입고, 주의할 것 몇 가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황제, 카르시아.
그는 원작에서 이름만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비숏과 대면한 적도 없으니 나는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신에 편지의 내용만 보면 그가 내게 호의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재밌게도 그는 내가 정말로 카르테아와 친밀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마 이전에 카르테아가 내게 아미칸보의 칭호를 주었기 때문일 거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카르시아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황제이기 전에 카르테아의 아버지였다. 어느 아비가 제 자식에게 칼로 난도질을 하고, 안구를 뚫으려 한 놈을 곱게 대해주겠는가?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다행히 카르테아로서도 왜 나와 적대하게 되었는지를 카르시아에게 발언하기는 어려울 거다. 그와 나 모두 서로를 위해서 말을 맞추는 쪽이 이로웠다.
나는 혹여 카르시아에게 일을 미룬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바로 황궁으로 출발했다. 아카데미가 제국의 수도에서 가까웠던 덕에 금세 황궁에 도착했다.
황궁의 입구를 보니 카르테아의 그 사치스러운 씀씀이가 어디에서 나온 지 알 법했다. 그가 평생 자라며 봤을 건물부터가 하나하나 억만금이 들어갔다.
“환영합니다. 금일 라파엘 님의 안내를 담당하였으니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나는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며 황궁 주변의 건물을 구경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상쾌한 풀냄새가 나왔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니 옆에 안내인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바로 했다.
안내인은 나를 이끌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궁의 근처를 빙빙 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바퀴를 돌고, 비슷하게 생긴 어느 건물 사이로 지나가니 내가 걸어온 길을 까먹을 듯했다. 길이 복잡했다.
또 안내인이 의도적으로 장난을 치는 것도 같았다. 그게 의아해 이게 뭔가 하고 안내인에게 물으려 하자 그가 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가 머리를 숙인 방향에서 한 인영이 등장했다.
“오랜만이군.”
카르테아였다. 내가 머리카락을 서걱 자른 탓인지 짧게 다듬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예.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뭐, 나쁘지는 않았어. 이게 다 자네 덕분이지. 자네가 나도 몰랐던 내 잠재력을 일깨워준 거 아닌가? 몹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아, 그래··· 그리고 자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는 알고 있어. 폐하께서 부르셨겠지.”
“맞습니다.”
“자네나 나나 폐하께 숨겨야 할 일이 있지 않나? 그 탓에 심부름꾼을 시켜 자네를 불러왔어.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예. 그러죠.”
카르테아는 앞장서서 정원의 사이사이를 거닐었다.
“후우···.”
카르테아의 뒤통수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걸 깨버리고 싶다고.
나는 카르테아를 증오했다. 카르테아도 나를 끔찍하게 여길 거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했다.
하지만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릴 만큼 악독한 관계는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협력할 수도 있었다.
“폐하께서 내가 자네와 싸우기를 바라신다.”
“예?”
이상한 말이었다. 카르시아도 내가 관중 앞에서 카르테아를 상대로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했다는 걸 들었을 것이다. 권위를 중시하는 황제로서 몹시 분개할 일인데, 또다시 싸움을 붙이다니?
으음.
아마 카르테아가 진 건 실력 때문이 아니라 운이 작용한 바라 간주하는 듯했다.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내가 드래곤으로 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그러니 폐하께서 네게 명령할 거다. 나와 싸우라고. 그러면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해. 그리고 져다오.”
“져달라니?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내가 아버지 앞에서까지 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사실 카르테아가 이런 제안을 하지 않더라도 무투회에서 했던 것처럼 그와 싸우는 건 불가했다.
우선 싸우는 장소가 카르시아의 앞이었다. 황제의 앞에서 황태자를 두들겨 패는 건 나 죽여주십시오 하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잠시간 내가 망설이자 카르테아가 말했다.
“왜? 남들 앞에서 져주려니 자존심이 상하나?”
“예. 그러니 돈으로 보상해주십시오.”
내가 툭, 뱉자 카르테아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질렀다.
더는 돈이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돈은 언제나 옳았다. 어차피 져줘야 할 싸움이었고, 내가 반격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이렇게라도 취할 수 있는 건 취하는 게 맞았다.
“선금을 일부 받을 수 있습니까?”
“그 금액의 현찰을 가지고 다닐 거 같은가?”
나는 카르테아가 견장에 찬 배지 하나를 가리켰다. 그래도 이곳에 살면서 보는 눈이 높아져 그가 걸친 것 중에 가장 비싼 게 뭔지는 바로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걸 먼저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흥. 마음대로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