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그 검은 잠시 맡겨주실 수 있으십니까?”
“거부할 수 없는 거겠지?”
“네. 규정상 그렇습니다.”
시종은 내 허리춤에 달린 칼을 뺏어간 후에도 몸수색을 계속했다. 나는 내 옷 속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증명한 후에 황제를 알현하러 갈 수 있었다.
길고 긴 과정 끝에 알현실에 들어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자세를 편히 해도 좋아. 의자에 앉지.”
황제의 외모를 확인했다. 병약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적어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체구가 컸고, 피부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죽기 전에 이렇게 황제 폐하를 뵐 수 있다니 대단한 영광입니다. 폐하의 편지를 받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폐하께서 이리 관심을 주실 줄 몰랐습니다···.”
나는 주절주절 아부를 떨었다. 말을 만들 수 있는 건 다 가져다 붙여 지어냈는데, 카르시아는 이게 익숙한 듯했다. 별 의미 없는 존경의 표시 따위를 담담하게 들은 후에 말했다.
“그대에게는 고마워하고 있어. 내 아들, 카르테아는 자유분방하게 커서 그런지 사회성이 떨어져 제 또래에 친우 비슷한 것 하나 없었지. 그대가 내 아들의 친우가 되어 줬다니 기쁘네.”
“관대한 시선으로 저를 그리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카르테아 님과 있었던 일 몇 가지를 말씀드리면 제가 왜 그분과 친우가 될 수 있었는지 아실 겁니다. 카르테아 님은 다소 무뚝뚝한 구석이 있는 듯하나 누구보다 정이 많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한참을 카르테아를 금칠했다.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속에서 울컥했다. 내가 왜 그딴 놈을 변호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눈앞에 황제가 있으니 이렇게라도 잘 보이고자 노력해야 했다.
카르시아는 카르테아에 관해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아카데미에서 카르테아의 교우 관계나 약혼자인 나비에와는 잘 지내는지 따위였다. 나는 가능한 거짓을 첨가해 카르시아의 비위를 맞췄다.
그렇게 카르시아는 한참을 시간 끌고는 본론을 꺼냈다.
“그대와 대련하던 중,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했다고 들었어. 이게 사실이 맞나?”
“예. 정확합니다. 제가 카르테아 님의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을 때였습니다. 카르테아 님의 몸이 급격하게 커지더니 거대하게 변한 손으로 제 몸을 꿰뚫었습니다.”
“호오··· 카르테아는 그전까지 그대에게 밀렸다고 한데, 모습을 바꾼 것만으로 그런 힘을 냈나?”
“예, 정말 놀라웠습니다.”
카르시아에 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나눠보니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 관심 있는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드래곤을 신격화하고 있었다. 은연중에 카르테아를 무시하는 언사를 하면서도 드래곤이 된 카르테아의 이야기는 달랐다.
드래곤이 된 카르테아를 마치 객체라도 된다는 듯 카르테아와 구별했다.
“드래곤으로 변하면 그렇게 강해진다고?”
“예, 맞습니다. 본연에 카르테아 님도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힘과 속도를 지녔으나 저는 이를 검술을 이용해 간신히 메꾸었습니다. 하지만 카르테아 님이 드래곤의 모습을 취하는 즉시 기술은 의미가 없어졌고, 저는 죽을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살아남은 건 우연히 옆에 있었던 신관 덕이었죠.”
“재밌는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네. 그러면 이것 하나만 더 말해줄 수 있겠나?”
“제가 아는 거라면 무엇이라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르시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나?”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인근에 있던 누구보다도 가까운 데에 있어 드래곤으로 변하는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남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조건만큼은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막연하게 누군가와 싸우는 게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흐음···.”
누가 보더라도 내가 그 변신 조건을 알고 있는 쪽이 어색했다. 뭘 근거로 그걸 알지 떠보는 건가 의아했다. 카르시아가 여태 떠들어댔던 건 다 방금의 질문을 위해서였다. 내가 긴장을 풀도록 하기 위해서.
카르시아는 내 대답에 턱을 쓸어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말이지···. 그래 잘 알겠어. 그럼 이번 만남은 이게 마지막이네. 그간의 일에 자네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은데 원하는 바를 말해보게.”
황제와의 독대. 누군가는 억만금을 주고라도 사고 싶은 자리겠지만, 나에게는 가시방석에 불과했다. 이 불편한 자리를 피할 수 있다면 보상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외칠 텐데, 그걸 무례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나는 면세와 같은 혜택을 요구했고, 카르시아는 이를 받아들였다.
* * *
황제와의 대화를 끝내고 이제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는데, 시종들은 막연히 대기하라 말했다. 그들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태도는 완고했다. 나는 황제가 무언가를 하기를 기다렸다.
카르테아가 찾아온 건 그러던 중이었다.
“가지.”
그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황제가 내게 미리 말해둔 바는 아니지만, 이제부터 카르테아와 싸워야 한다는 걸 예상했다.
나는 카르테아와 함께 다시금 황제의 앞에 섰다. 카르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내 아들이 선조님과 같은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건, 참 기념적인 일이야. 할 수만 있다면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네. 그러니 둘이 싸워보게.”
카르시아는 거만하고 당돌했다. 내 나이가 적다고 해도 그게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아이작의 영주였다.
“폐하.”
“거부하려고 들지는 말게. 이를 공론화하려고 해봤자 그대의 편을 들어주는 건 누구 하나 없을 테니까. 이건 그런 일이야.”
“알겠습니다···.”
카르시아의 요청 자체를 거부하려고 든 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가 나를 호구로 볼까 싶어 최소한의 대처를 한 것이었다.
“가능하면 그때와 똑같이 했으면 좋겠어. 그때 대련의 규칙이 뭐였지?”
이는 카르테아가 대답했다.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아, 마도구의 사용도 금지였고요.”
“그거 잘됐어. 그러면 둘다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지 않나? 자, 이제 싸우게. 신관이라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내가 부르면 바로 들어올 거야.”
“저도 맨몸으로 싸웁니까?”
“아··· 그래, 그대는 검사였지? 잠시 기다리게.”
뭘 어떻게 의사소통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카르시아의 말대로 1분쯤 지나니 밖의 시종이 내가 쓰던 칼을 가져왔다. 나는 시종으로부터 칼을 받아 뽑았다.
“그럼 시작해.”
또다시 카르테아와 싸우게 되었다. 나는 카르테아에게 져주기로 했다.
그 방법을 정하지는 않았는데, 아마 급소가 아닌 곳을 한 대 맞고 쓰러지면 될 거다. 우리는 승패만을 짰지 합을 맞춘 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공방은 필요했다.
카르테아도 이를 눈치챘는지 저번 무투회에서와 비슷하게 합을 겨뤘다.
전처럼 카르테아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했다. 황제를 속이는 일이라 우리는 신중을 가했다. 카르테아는 진심으로 공격해왔고, 나도 손대중을 하지 않고 그의 몸을 베었다. 이 정도로는 카르시아가 분노하지 않기를 기대했다.
피하고 베었다. 몇 번인가 그렇게 카르테아의 몸에 참상을 남긴 후였다. 기회를 포착했다. 카르테아가 내 복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나는 칼을 회수하는 게 늦은 척 하고 제자리에 서 배에 힘을 주었다.
빠아아아악! 복부에 주먹을 한 대 맞아주었다.
아악.
카르테아, 이 등신 같은 놈. 힘 조절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면 대충했거나.
주먹에 맞고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카르테아와 달리 내 몸은 연약했다. 이거 한 방이면 더는 싸움을 지속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졌습니다.”
나는 카르시아가 만족했을까 곁눈질했다. 제 아들이 패배했던 상대에게 승리했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거다.
카르시아는 몸을 일으키더니 카르테아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고, 잡아당겨 일으켰다. 카르테아의 발이 바닥에서 떴다.
빠아악!
카르시아는 카르테아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코에서 피가 터졌다. 다음은 입이었다. 입술이 부르트고 피를 쏟았다.
퍼어어억! 퍼어어억!
카르시아의 구타가 이어졌다. 카르테아의 얼굴에 피가 덕지덕지 붙었다. 카르시아의 주먹에는 끈적한 혈액이 묻었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알기로 카르테아가 체벌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체면에 신경 쓰는 황제가 내가 보는 와중에 제 아들을 주먹으로 때린다니, 어딘가 잘못됐다.
카르시아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아···. 내가 볼 때 말이야 내 아들놈이 다시 변신하기 위한 조건 중에는 상처가 있어. 그러니 변신을 하려면 상처가 좀 필요할 거 같더라고. 그런데 그대가 그렇게 내숭 떨며 봐줘서는 이놈에게 충분히 상처 입히지 못할 거 아닌가? 그래서 내가 몸소 나서 그대를 도왔네.”
“저를 말입니까?”
“물론. 내가 언제쯤 그대를 풀어줄 거 같나? 여기서 며칠 지난다고 내가 그대를 내보내 줄 거 같나? 아니야. 나는 꼭 내 아들놈이 하늘을 나는 걸 봐야겠어. 그럼 다시 하게.”
카르테아는 자세를 잡으며 내게 걸어왔다. 카르시아에게 한참을 맞았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였다. 하기야, 그의 맷집을 생각하면 저 정도야 별거 아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맞았다는 게 충격적이겠지만.
나는 칼날에 감은 검기를 강화했다. 카르시아의 말대로 카르테아에게 난도질을 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서 싸워!”
카르시아의 명령과 동시에 카르테아가 내게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