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카르테아는 성인이 될 때까지 자유롭게 성장했다. 오랫동안 황족의 가정교육을 맡아온 이들로부터 최소한의 덕목만을 쌓으면서 황제가 될 날만을 기다렸다. 여기에는 카르시아의 방임이 있었다.
카르시아는 카르테아에게 무관심했다. 카르시아가 카르테아의 부족한 면면에도 나무라지 않은 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별다른 감정이 없는 탓이었다.
“더! 격렬하게! 더! 더!”
그는 라파엘과 카르테아를 부추겼다. 그 둘이 서로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싸우길 바랐다.
최근, 카르시아는 병을 앓았다. 신관의 회복이나 연금술사들이 만드는 약 따위로는 치료할 수 없는 원인 불명의 불치병이었다. 이에 괴로워하던 중에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했다는 말을 들었다.
카르시아는 드래곤과 관련된 수많은 책을 읽었고, 이야기를 들었따다. 그 많은 것 중에서 드래곤이 병으로 죽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카르테아가 드래곤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자신도 될 수도 있다는 걸 뜻했다.
자신의 피는 카르테아만큼 용혈의 농도가 짙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같은 황족이지 않은가? 카르테아가 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카르테아를 통해 그 방법을 찾아내 자신에게 적용하고자 했다.
* * *
라파엘은 황제의 눈치를 보며 카르테아를 베어갔다. 카르테아는 라파엘에게 몸을 베여가는데도 개의치 않고 덤벼 들어왔다. 하지만 무투회에서 보였던, 그런 독기는 사라진 채였다. 무투회에서의 그는 진심으로 라파엘을 죽이려고 했다. 본인의 의지로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이번엔 달랐다. 그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황제인 카르시아의 명령에 마지못해 싸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때와는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라파엘은 무투회 때보다 더 쉽게 카르테아의 몸에 상처를 남겼다.
카르테아가 입은 흰옷이 빨갛게 물들 때마다 카르시아는 좋아했다. 그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라파엘은 카르테아의 넝마가 된 몸을 보고 말했다.
“계속합니까? 출혈이 심한데···.”
“그대는 카르테아를 뭐로 보는 건가? 고작 저런 상처로 내 아들이 죽을 것 같나? 어림없는 소리. 걱정 말고 계속하게나.”
“예. 알겠습니다.”
카르테아는 튼튼했다. 순수하게 맷집만으로 따진다면 제국에서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라파엘의 칼이 가슴팍을 베었을 때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과다출혈이 원인이었다.
쯧쯧.
카르시아는 혓바닥을 차며 신관을 불렀다. 신관이 카르테아를 치료하는 동안 카르시아가 말했다.
“전에 변신했을 때는 이보다 상처가 심했나? 이번 일정에서 그때 무투회와 달랐던 점은 뭐가 있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상처의 규모는 오히려 이보다 작았습니다. 굳이 그때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장소와 구경꾼들의 유무일 듯합니다.”
“흐음···. 드래곤으로 변하는 걸 장소 혹은 구경꾼들 때문에 바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그것 말고 다른 건 없나?”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차라리 카르시아에게 협조하는 게 풀려나는 데 더 이로울 듯했다.
“어쩌면 카르테아 님의 감정 상태와 연관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르테아 님과 무투회에서 다툴 땐 관객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패배 혹은 상처 입는 일에 더 민감했을 겁니다. 그 많은 이들 앞에서 수치스러운 꼴을 보여야 했으니까요.”
“그건, 그럴듯한 추측이군. 그럼 내일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에 하는 거로 하지.”
카르시아는 효율적인 황제였다. 보통 같으면 단순히 황실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을 불러다 둘의 싸움을 관람시켰을 텐데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카르테아를 압박했다.
사람이 드래곤으로 변하는 모습, 그걸 보여주겠다고 광고했고, 이를 본 사람들은 궁금증을 갖고 모여들었다.
제국의 국교는 어디까지나 태양신이었으나 소수민족과 알음알음 퍼진 몇몇 종교는 신을 대신 드래곤을 섬겼다. 온갖 사람들이 나와 카르테아의 싸움터에 등장했다.
대결을 앞둔 카르테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또 저 많은 사람 앞에서 라파엘에게 무참하게 맞고, 다쳐야 하니 그걸 상상한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웠다.
“빌어먹을. 자네한테 고맙다고 한 건 모두 취소해야겠어. 이따위 힘도 필요 없네. 그, 개 같은 자식, 누구를 광대로 알고 있어!”
카르테아의 망발에 놀랐다. 그가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하고 욕을 뱉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욕설이 누구를 가리켰는지 알 수 있었다. 무려 그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황제인 카르시아였다.
라파엘은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 둘은 관객이 가득 찰 때쯤에 밖으로 나왔다. 라파엘은 내심 카르테아의가 말대로 광대 같은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겠다 하고 이해했다. 관객들은 카르테아를 보며 킥킥 웃었고, 그를 아래위로 훑고는 했다.
그들의 웃음 리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든 혹은 아무런 의미가 없든 카르테아는 예민하게 받아들일 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관객석에 모인 저들이 다 카르시아의 눈이었다. 대충 했다가는 모두 카르시아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난 저들 앞에서 카르테아를 공격했다.
카르테아가 처한 상황에 눈물이 나올 법도 했지만, 안타까운 감정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는 명백히 악인이었고, 나비에한테 준 상처를 생각하면 이건 새 발의 피였다. 이 상황에서 불편한 건 순전히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황제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는 것만이 불만이었다.
“아아아아아악!”
카르테아는 날마다 하루가 다르게 분노해갔다. 수치스러움에 이를 갈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가 드래곤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내 칼에 몸이 베이기만 하는 카르테아를 보며 관객들은 실망했고, 자리를 떴다. 그러한 종류의 자극 하나하나가 카르테아의 자아를 건드렸다.
시간이 지나서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깨달았다. 라파엘이 말했던 게 정답이었다. 변신은 카르테아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달라졌다. 이안과 레오가 큰 힘을 낼 때처럼 그도 분노가 동반되어야만 했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몸 상태와 끝없는 분노, 특별히 강한 피를 타고났다는 삼박자가 맞았기 때문에 그가 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카르시아의 욕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찾기 위해. 카르테아가 제 뜻대로 변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그를 몰아붙였다.
그러한 작업 과정 속에서 황제가 라파엘만을 따로 호출했다.
“그대에게는 정말 미안하네. 인제 와서 사과한다는 게 늦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어. 그대에게는 너무 미안할 일이었지. 하지만 이번 사건이 우리 제국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일이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대를 괴롭혔네.”
얻을 걸 다 얻었으니 카르시아도 라파엘의 눈치를 살폈다. 라파엘은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 더욱이 나이가 적다뿐이지 황제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부유했고. 가치 있는 영지를 지녔다.
“그대에게 꼭 보상해주고 싶은데, 어떤가? 혹 짐을 용서해줄 수 있겠는가?”
그는 믿기 힘들 만큼 많은 보상을 내밀었다. 전에 그에게 말했던 것보다 몇 배는 강한 면세 혜택과 땅, 돈 등을 쏟아냈다. 그의 물질적인 보상은 이걸 먹고 떨어지라는 듯한 느낌이 강했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컸다.
“폐하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라파엘은 그가 느낀 불편의 일부를 보상받았다. 하지만 카르테아는 아니었다. 요 며칠간 수많은 칼질에 끔찍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고, 어마어마한 수치심에 시달렸다. 하지만 카르시아는 이를 보고 카르테아에게 딱 잘라 말했다.
“네가 이번 일의 경중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성실한 태도로 임해 늦어진 것이다.”
“저도 제 변신이 가진 의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야. 너도 나이가 들어 언젠가 황제에 등극하겠지. 그때가 되면 너도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다.”
그 말에 카르테아는 오히려 더 분노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분노를 참기 시작했다. 적어도 황제의 앞에서는 그 화를 표출하지 않았고, 황제에 감사 인사를 올리고는 했다.
“제 신분은 황태자임이 맞으나 제 능력은 보잘것없습니다. 설혹 이후에 황제에 오른다고 해도 무시 받는 황제가 됐을 게 뻔합니다. 이게 폐하의 은총 덕분에 변화했습니다. 제가 존경 받는 황제가 될 수 있게 도와준 것이지요.”
“이제라도 내 뜻을 알아차리니 다행이야.“
카르시아는 서커스 극단에서 코끼리를 대동하듯이 카르테아를 데리고 다녔다. 그런다고 해봤자 만나는 사람들도 다 하나 같이 나라에 몇 없는 거물이었고, 힘 있는 자들이었으니 카르테아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카르시아가 카르테아를 구경거리 삼지 않았다면.
카르시아는 카르테아가 매일 같이 변신할 것을 강요했고, 남들이 놀라워하는 반응을 즐겼다. 이젠 모두가 믿었다. 황족의 피에는 드래곤이 흔적이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었다.
귀족들이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면 눈을 깔고, 머리를 숙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눈동자에 한 가지 감정이 더 맺혔다. 경배. 제국의 사람들은 꼭 카르시아를 신과 비슷한 무언가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