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카르시아가 나를 붙잡고 있을 때의 생활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인형 놀이의 인형이 된 것처럼 카르테아와 싸워야 한다는 게 무척이나 분했지만, 그걸 뺀다면 지낼 만했다. 잠자리나 식사 따위는 어느 때보다 호화로웠다.
나는 카르테아가 카르시아의 장난감이 되는 시점에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약 2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잠시 가문에 돌아간다고 했던 나비에도 이미 아카데미로 돌아온 후였다.
“괜찮으세요?”
나비에는 카르시아에게 포상을 받으러 황궁으로 갔다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기야, 나라도 그랬겠다. 제 아들에게 난도질한 놈에게 상을 준다니 이상하지 않나? 그녀는 내가 황궁에서 사지 중 어디 하나를 썰린 게 아닌가 걱정했다.
“괜찮아. 말 그대로 폐하의 초대였을 뿐이야. 카르테아 님이 전에 내게 아미칸보의 칭호를 주셨잖아? 거기에 이번일까지 겹쳤으니 내 얼굴이 보고 싶으셨대.”
“정말이죠? 그런 거라면 다행이네요.”
“나는 괜찮아. 그러면 너는 어때? 가문에서 이야기는 해봤어?”
나비에는 내가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다. 총 10개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서류였다. 1번부터 10번까지 그녀가 파혼을 대가로 카르테아에게 요구할 게 적혀 있었다.
그 종류도 다양했다. 현금처럼 즉시 쓸 수 있는 건 물론이었고, 오래오래 러브원 가문의 기둥 역할을 해줄 것도 몇 있었다.
“집안에 분위기가 아주 좋지는 않았어요. 제가 황후가 된다는 생각에 부모님 모두 꽤 들뜨셨는데, 얼마 가지 않아 파혼해야 한다니 제가 뭔가를 잘못한 게 아닌가, 화를 내셨죠.”
“···.”
“그래도 파혼을 빌미로 얻어낼 수 있다는 게 많다고 말씀드린 후에는 나아졌어요.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제가 황후가 된다면 가문의 영광이자 명성을 얻고 장기적인 이득이겠으나 단기적으로 본다면 이쪽이 더 큰 득이 될 수 있다고 아버지를 위로했죠. 그 뒤로는 아버지도 잠잠했고요.”
우울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내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자 나비에는 명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 참. 저 동아리를 들었어요. 펜싱이요. 그때 정말 즐겁고 재밌었는데, 바쁜 일이 워낙 많았잖아요? 그래서 손을 놓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해보려고요.”
“아아. 그래. 잘했어,”
이제는 내가 아카데미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배울 게 없었고, 해야 할 게 없었다. 나를 위해서는 그랬다. 그러나 나비에가 불안했다.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극단적으로 우울해했다. 한데 그때보다 상황이 나빠진 지금에는 얼마간 밝고 활발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거 괜찮은가? 나는 잘 모르겠다. 대신에 적어도 누구 하나는 옆에 있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맞다. 그래서 그때 제 제안은 생각해보셨어요? 레시피를 공유하는 거요.”
별 관심 없는 주제였는데, 그녀가 여기에 흥미가 있는 듯해 분위기를 맞추었다.
“흐음···. 그럴까?”
“네. 다른 사람들도 먹을 수 있도록 유명한 식당 등에 찾아가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다들 고마워할걸요? 오늘은 우리끼리 먹고요. 아하하.”
“그래, 그러자.”
떡볶이를 준비했다. 오늘은 손을 크게 썼다. 남으면 버린다는 불경한 마음으로 이걸 과연 둘이서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될 만한 재료를 꺼내고 손질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레시피 말이야. 네가 먼저 배워볼래?”
“예? 제가요? 음··· 요리는 자신이 없는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언제까지 내가 해줄 수는 없잖아. 또 내가 있을 때만 이게 먹고 싶을 거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전에 네가 먼저 배워보자. 쉬운 거부터 할게.”
나비에는 잠시간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치킨과 떡볶이 중에 떡볶이부터 시작했다. 치킨을 튀길 때는 기름 온도를 마법으로 조절하는 탓에 그녀에게 바로 가르치기 어려운 탓이었다.
반면에 떡볶이는 재료를 구하는 건 몰라도 만드는 건 몹시 간단했다.
오늘은 그녀의 흥미를 끌어야 하니 만드는 데서 그칠 거고.
떡볶이를 만드는 건 한 데 넣고 섞은 후, 떡이 바닥에 달라붙지 않게 저어주기만 하면 끝이었다.
“정말 쉽네요. 먹어본 적 없는 종류의 음식이라 막연히 복잡할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에요.”
여기에 오늘은 삶은 계란을 추가했다. 계란을 절반으로 가른 다음에 그 안에 떡볶이 국물을 칠한다. 그러면 계란 노른자가 떡볶이 국물을 흡수했다. 이때 계란은 어느 때보다 맛이 좋았다.
계란 노른자는 고소하기는 해도 퍽퍽해서 통으로 먹기는 힘든 구석이 있는데, 떡볶이 국물이 이걸 지원했다.
나비에는 고춧가루가 담긴 통을 들고 말했다.
“이거 더 뿌려도 괜찮을까요?”
“응. 마음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금일 떡볶이는 나비에의 손에 맡겼다. 옆에서 순서를 정해주고, 보조는 해도 그녀가 혼자서도 할 수 있게 경험을 만들어주는 게 목적이라 시작과 마무리는 그녀의 손에서 끝냈다.
양념의 조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에 고춧가루통을 들려주었는데, 그녀는 고춧가루를 정말 맘껏 뿌렸다. 아니, 쏟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이따금 나 혼자 떡볶이를 먹을 때면 한 번씩 정말 화끈하게 하고는 했는데, 나비에는 이를 넘어섰다.
나비에는 반들반들 빛나는 눈빛으로 고춧가루를 쏟아냈다. 허공에서 내려오는 고춧가루의 양에 오랜 시간 혓바닥을 단련한 나조차도 내심 겁이 났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라면 암만 매워도 참고 먹을 수 있었다.
그럼 나비에는? 애도 괜찮을까?
“그런데, 이거 먹을 수 있어?”
“네? 뭐가요?”
“나는 괜찮아. 나는 매운 거 잘 먹거든. 그런데, 너도 저번에 힘들어했잖아. 이거 그때보다 몇 배로 매울 텐데.”
“괜찮아요. 저도 자신 있어요.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잘 먹는 편이라고.”
일단 나비에한테 맡기기로 했으니 더는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양념 조절이 끝이 났고 국물을 끓이며 조렸다.
떡볶이 국물이 보글보글 끓으며 기포가 생겼다가 터졌다. 그 위로 하얀 김이 서리며 우리의 코를 자극했다.
“콜록콜록!”
우리는 말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기침했다.
“음···. 죄송해요. 이거 안 괜찮을 수도 있겠어요.”
* * *
우리는 새빨간 떡볶이를 내려다보았다.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먹을까?”
“네. 먹어야죠. 지금이 제일 따뜻한데 지금 먹어야 해요.”
용기를 내서 먼저 포크로 떡 하나를 찔렀고, 냉큼 입속에 넣었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
비쥬얼만 보면 용암 속에서 꺼낸 듯 강렬했는데, 맛은 버틸만했다. 예상만큼 맵지 않았다. 아마 고춧가루로 만들어버린 고추의 품종 때문인 듯했다. 걱정했던 것의 절반도 채 안 되는 맵기였다.
“흐악!”
나비에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나도 떡 하나를 더 먹으니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걸 느꼈다.
떡볶이의 매운 강도를 높이는 데는 단순히 고춧가루를 많이 쏟는 것보다는 스코빌 척도가 더 높은 고추를 쓰는 쪽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러니 이번처럼 단순히 고춧가루만을 많이 넣는 식으로는 한계에 있었다.
우리가 먹은 떡볶이는 그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흐윽···.”
나비에는 어깨를 들썩이며 딸꾹질했다. 눈시울에는 물방울도 맺혔다. 그녀는 여태 내가 본 누구보다 매운 음식을 먹는 데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그녀는 금방 무너졌다.
반대로 나는, 라파엘의 몸은 타고난 맵찔이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 꾸준히 단련해와 매운맛을 견디는 데 내성이 생겼다.
나는 나비에한테 보여주듯이 떡볶이를 먹었다. 그러자 나비에도 경쟁하듯 포크로 떡을 찍었다. 우리는 각자를 학대했다. 스스로의 입과 혀를 괴롭혔다. 나는 땀을 뻘뻘 쏟았고, 나비에는 흐느끼며 딸꾹질했다.
우리는 고통을 느꼈고, 고통을 받아들였다. 지금 떡볶이를 먹는 이유가 고통을 위함이라는 듯 혓바닥의 알싸함이 사라지기 전에 새 떡을 넣었다.
각자 접시에 쌓은 떡이 절반쯤 먹었을 때 나비에는 엉엉 울었다. 그녀는 눈물 젖은 떡볶이를 먹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아카데미는 카르테아의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가 몇 가지 소문을 뿌렸다.
하나는 그가 이제는 전에 무투회에서 했던 반쪽짜리 변신이 아니라 완전한 드래곤의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크기도 지난 무투회 때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프리실라였다. 프리실라 또한 존재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그녀가 카르테아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건 입으로 광고하지만 않았을 뿐 둘의 관계를 대놓고 알리는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카르시아가 황좌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카르테아가 차지한다고 했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그 소문을 듣기만 했다.
더는 카르테아와 대립할 이유가, 대항할 여력이 없었다. 그때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변신한다면 이안이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는 제국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그가 어느 영애와 파혼 하나를 깼다는 추문쯤은 간단히 씹을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곧 황위에 오르는 건 확정적인 사실이었다.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을 때 피곤해질 수도 있었다. 이제라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만약에 내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될까?
죽을 수도 있었다. 이곳에 떨어졌을 때 나를 둘러싼 그 위험 속으로 다시금 기어가야 했다. 이에 나는 카르테아에게 대항하기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