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카르테아는 공식적으로 아카데미에서 자퇴했다. 그는 황궁에서 생활하며 황위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미리미리 여러 권세 강한 귀족을 만나고, 다른 황족들과 친분을 쌓아야 했지만, 카르테아는 예외였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란 여기에 사람들은 모두 제국의 건국 신화를 배운다. 왜 황족과 귀족이 특별한 것인지 가르침 받는데, 또 전원이 그것을 믿는 건 아니었다. 신화를 허무맹랑한 소리라 치부하기도 했다.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게 된 사건은 그러한 믿음과 불신의 벽을 깨트리며 통합한 데 의의가 있었다. 그의 인간적인 성품, 황제로서 능력 따위를 제외하고도 고위층은 그를 빠른 시기에 황위에 등극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카르테아 님이 황제가 되기 전에 빨리 만나야 할 텐데요.”
내가 눈만 깜빡이며 쳐다보자 나비에가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니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거 있잖아요. 제가 파혼을 명목으로 카르테아 님께 요구해야 할 것들이요. 카르테아 님께서 황좌에 앉게 되면 파혼을 물리는 게 더 쉬워질 테니 제 청을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커져서요.”
“그렇네. 그전에 한 번은 만나야겠어.”
여전히 난 아카데미에 있었다.
어떤 수업을 듣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다.
대신에 혼자서 검술을 수련하기는 했다. 이건 취미 생활이었다. 카르테아에게 대항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굳이 지금보다 강해지지 않아도 인간 형태의 카르테아라면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반대로 그가 드래곤으로 변한다면 설령 내가 소드마스터에 오른다고 해도 이기기는 어려울 거다. 카르테아랑 싸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멍청한 짓이었다.
나는 그랬다.
“너는 어때?”
“쉽게 이기지.”
순수한 인간 중에서 최강자는 아마 이안일 거다. 하지만 카르테아와는 상성이 나빴다. 드래곤은 항마력이 뛰어났다. 마법사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의 마법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카르테아의 비닐을 뚫기는 어려울 거다.
“그렇게 쉽게 말해도 돼? 어쩌면 또 싸우게 될 수도 있잖아.”
“그래도 돼. 아직 나는 너한테 내 힘 전부를 보여준 적이 없어. 3할은 숨기는 법이라고.”
이안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강한 척하기를 좋아했다.
실제로 그가 진실로 힘의 3할을 숨겼다고 해도 드래곤으로 변한 카르테아를 상대로는 힘들 거다.
이제는 그때의 불완전한 변신이 아니라 온전한 변신을 한다고 했다. 그가 마법을 익히지 않았으니 드래곤의 가장 큰 무기인 마법과 언령을 쓰지는 못해도 그 육체만으로도 인간이 대항하기는 불가했다.
“그러는 너는 왜 그렇게 훈련하는 건데?”
“취미 생활이야.”
“또 거짓말하네. 솔직하게 말하면 너한테 하나 해줄 게 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안이 말했다.
“네가 마나 유동인가 마력 유동인가 하고 부르는 그 기술 있잖아. 너도 쓸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훈련이나 기술 연습으로 쓸 수는 없지. 하지만 몸에 마나 회로를 직접 그리고 만들어낸다면 너도 쓰는 게 가능해. 물론 나나 그 허접한 칼쟁이처럼 자유자재로 쓸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는 돼.”
“비슷하다는 게 뭔데?”
이안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 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 검지로 자기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이 힘 말이야, 화가 날수록 강해지는 게 기본이잖아? 나랑 그 허접 칼쟁이는 인위적으로 마나를 움직여서 쓰는 거고. 너는 우리처럼은 못한다는 거야. 정말로 화가 나야지만 힘을 쓸 수 있어.”
“내가 그 마나 회로를 받게 되면 잃을 게 있을까?”
“전혀. 음··· 아니다. 등에 밤이면 빛나는 그림 하나가 생기기는 할 거야.”
“부탁할게.”
“말했잖아. 솔직하게 말하면 해준다고.”
이안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언제나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했다. 내가 나비에를 좋아한다고 오해할 때만 해도 그랬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비슷할 거다.
내가 검술을 수련하는 게 아무리 취미 생활일 뿐이고, 카르테아와 싸울 때를 대비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을 거다. 그러니 그냥 그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쪽이 속 편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검술을 수련하는 건 카르테아를 죽이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네 도움이 필요해.”
“하하. 진작 그러지. 그래 그러면 장비를 준비해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 * *
마나 회로를 몸에 장착하는 건 마치 문신을 새기는 일과 비슷했다. 나는 상의를 탈의한 후에 침대에 엎드렸다. 그가 내 위에 올라타서는 마석을 가지고 등에 그림을 그렸다.
이건 마력 유동을 쓰기 위한 회로를 알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가공한 마석을 사람의 인체에 투여할 수 있는 마법적인 소질과 회로를 틀리지 않게 그릴 손재주가 필요했다.
이안의 마법사로서 재주는 누구보다 믿는 나였지만, 뒷부분은 조금 불안했다.
“그, 실수 안 하는 거 맞지?”
“어. 내가 그리는 거 아니야. 나는 마석을 잡고 있기만 할 뿐이고, 염동을 사용해서 내 손을 조종할 거야. 그러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
파지직!
이안이 마석에 마나를 주입했고, 마석 내에 있던 마나가 그 표면으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빠져나온 마나는 뾰족한 끝으로 내 등에 남아 흔적을 새겼다.
통증이 있었다. 꽤 아팠다. 중간중간 신음을 흘렸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얼굴을 타고 주룩주룩 흘렀다. 단순히 등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길래 금방 끝날 거라 예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마석이 찔끔찔끔 마나를 쏟아내고, 그 쏟아낸 마나가 내 등에 주입될 때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 탓에 1시간이 지났고, 2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속에 깨달았다. 나 아파본 적이 별로 없구나.
내가 통증을 참아볼 일이 적었다는 걸 상기했다. 카타리나와 훈련하며 힘든 걸 버티는 데는 익숙했어도 아픈 걸 참아본 경험은 적었다.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
이마와 손끝에만 맺혔던 땀을 전신에서 쏟았다. 이안은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조금 쉬었다가 할까?”
왜 하필 이때였을까? 연금술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약품이 생각났다.
그중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마취제 같은 것도 여럿 있었다. 이게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진작에 떠올렸을 텐데 예상하지 못하게 아파 까먹었다.
“얼마나 남았는데?”
“음··· 이 속도로 한다면 1시간이면 될 거야.”
“그냥 해줘.”
다시금 내 등을 찌르는 마석이 움직였다. 마석이 닿은 부분이 화끈화끈했다. 아마 불로 살을 지진다면 딱 이 정도 고통을 느낄 듯했다. 눈을 감고 통증을 참고 있자 이안이 내 뒤통수를 툭툭 두들겼다.
“끝났어. 잘 참았네.”
“고마워.”
“할 수 있다면 네가 바로 그 힘을 시험해보면 좋을 텐데. 완벽하게 했지만, 그래도 작동이 되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너는 화를 내고 싶다고 막 낼 수 있고 그래?”
“그래서 말했잖아. 할 수 있다면. 아, 그리고 오늘은 이제 훈련 그만하고 쉬어. 회로를 받아들인다고 몸이 무리했으니까.”
이안은 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내가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그가 방금 해준 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건 알았다.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몇 시간이고 집중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맙다.”
“알아.”
* * *
이안이 떠나고 나는 바로 비숏을 찾아갔다. 그녀가 기숙사에 있을까 아니면 실험을 하고 있을까 고민하다가 실험실로 찍었는데, 정답이었다. 어쩐지 운이 좋았다.
“바빠?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어?”
“무슨 일이죠?”
비숏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거진 수개월 만에 만났는데, 내가 뜬금없이 찾아와 놀란 듯했다.
“만들고 싶은 약이 있는데 너한테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비숏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우쭐해져서는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제 조언이라··· 저보다 견식이 높은 분한테 조언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실 겁니다. 제 답이 도움이 되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해주시면 그리 해드리죠.”
“고마워. 강제로 화를 내는 약을 만들고 싶어.”
감정이란 호르몬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예? 이유가 뭐죠?”
“내가 먹게. 나한테 필요해. 꼭.”
“절대 안 됩니다. 어디에 사용하시려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이상반응이 나타날지 알 수 없어요.”
“으음··· 내가 조언을 구하려는 건 그걸 만들어서 먹어도 될지 아닐지가 아니야. 어떻게 만들 지지.”
“그럼 포기하라고 조언하겠습니다.”
“꼭 필요한 일이라서 그래.”
비숏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 이유라는 걸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속으로 가슴을 쿵쿵 때렸다. 다들 나한테 궁금해하는 게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또 그때마다 남한테 사실대로 토로하는 게 곤란한 건 왜일까?
내가 분노조절 약을 만들어 먹으려는 건 마나 유동을 이안 혹은 레오처럼 인위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걸 솔직하게 말한다면 비숏은 냉큼 나를 내쫓아 낼 거다. 그러면 또 카르테아, 프리실라, 나비에 등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
“꼭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런 약이 필요해.”
내 대답을 듣고 비숏은 멈칫거렸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한 채 시간을 보냈다. 비숏은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탁, 탁 두들겼다.
“알겠습니다. 당신을 돕도록 하죠. 대신에 한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제 복약 지도를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물론이지.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