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분노조절 약을 만드는 건 예상보다 수월했다. 이미 이와 정반대의 약이 몇이나 시장에 나와 있었던 탓이었다.
소수 몇몇 분노조절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해 사고를 치는 경우였다.
나는 이 정반대에 해당했다.
화가 나지 않아도 화가 나야 했다.
내 설명을 들은 비숏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약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이미 감정의 역치를 늘이는 약이 얼마든지 나왔는데, 이걸 그대로 정반대로 하면 되니까요. 이후에 뇌에 자극을 가하는 성분을 추가하면 끝이에요.“
“그게 어렵지 않아? 듣기만 해도 복잡한데. 그래서 만드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여기에 집중한다면 1달도 걸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약의 복용까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비숏은 눈썹을 모으며 미간을 좁혔다.
“감정의 역치를 늘이는 것과 달리 줄이는 건 그 위험이 달라요. 게다가 일시적으로 호르몬을 건드리면 영구적으로 그 흔적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몸에 이미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면 시도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겁니다.“
그녀의 말이 다 옳다는 듯 눈을 맞추고, 아래위로 미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약을 먹을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꼭 필요해서 그래.“
“제게는 무슨 상황인지 말씀도 없이 이해해주기만 바라시네요. 예, 말하기 곤란하시다고 했죠. 그걸 믿으니 협조는 하겠습니다.“
으음.
말이 많은 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히 눈에 들어왔다. 복용량을 제한하려는 거겠지. 이건 거절하는 게 이상했다. 나도 무작정 약을 먹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약이 비숏의 말처럼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그녀는 수천 명이 복용해서 1명만 부작용을 앓아도 그게 무지막지하게 끔찍한 일이라 생각하는 마음가짐으로 내게 설명하고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건강에 아무 영향이 없을 리도 없었다. 이왕이면 더욱더 건강하게 살아야지.
“꼭 필요하다고 하시고, 제 몸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니 어찌해도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약을 제조하는 최소한의 도리로 말하니 이것만은 지켜주십시오. 하루에 한 병입니다.“
좋아.”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비숏은 오히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눈썹으로 코 쪽으로 내렸다. 얼굴 광대뼈 쪽에 주름이 졌다.
“한 병이라고, 부작용이 없을 거라는 게 아닙니다. 이건 정말 말 그대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니까 꼭 지키라는 겁니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는 언제나 전문가의 말을 따른다고.”
그 후 비숏은 그녀 말대로 1달에 걸려 약을 완성했다. 약은 총 2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노제와 냉각제.
분노제는 화가 나는 약이었고, 냉각제는 그렇게 돋운 화를 식히는 약이었다.
분노제를 먹은 후 그 효능이 필요 없어지면 바로 냉각제를 먹으라고 했다. 실험을 위해 두 약을 먹어봤는데, 아주 효과가 좋았다.
* * *
가능하다면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언제 끔찍한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다.
혹여나 내가 카르테아와 목숨을 걸고 싸울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승패를 제외하고도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바로 카르테아의 신분이었다.
그와 싸울 때 그가 황제일지 혹은 황태자일지 모르지만, 그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대참사였다.
그건 제국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카르테아와 싸워 살아남은 보람도 없이 수많은 대군의 손에 죽게 된다.
이를 예방할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뒷배를 만들어두는 것.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아카데미를 떠나 아가레스의 영지인 잉그레드를 찾았다.
북부의 대공, 아가레스 잉그레드는 여러 작위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황족이기도 했다.
그에게도 엄연히 황위 계승의 자격이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아가레스는 턱을 쓰다듬더니 실소를 흘렸다. 뾰족한 눈매가 접히며 더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참 의외란 말이야. 황태자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게 어떠냐니. 하하하, 그거 반역이지 않나?”
“대공님께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제국의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미쳤군. 자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누가 머리통을 후려쳤나? 뒤에서 쇠막대로 머리통을 갈겼어?”
“불가피한 이유로 현 황태자와 문제를 빚었습니다. 저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그를 죽이는 겁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사건이 있었던 게 확실해.”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본 그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이전 방학 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영주성 내에서도 갑주를 차고 있었다.
그게 퍽 인상적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빛을 받으면 찰랑거릴 듯 부드러운 하얀색 의복이었다. 칼을 막지도 못하고, 피라도 묻으면 지워지지 않을 옷.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쉽게 사람 목숨을 놓고 떠들었나? 문제가 생겼다고 죽이고 보려는 건 자네답지 않아.”
사람을 죽이는 거로 문제가 해결되는데, 살려두는 건 아가레스 답지 못 했다.
영주성으로 입장하는 데 꽤 많은 것을 보았다. 벌써 농경지가 활성화되었다. 경계를 서는 병사의 수도 줄었다.
그래, 이제 여기는 평화롭다 이거지. 그 때문에 아가레스도 유해졌다. 과거에는 원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이게 방해가 되었다.
“예. 대공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제가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의 목숨을 죽일 거라고요. 그게 황태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흐음···.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자네가 살기 위해서는 그분을 죽여야만 한다는 거 아닌가?”
“죽여야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꼭 죽인다는 건 아닙니다.”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황위 계승권이 있는 내가 적극 황실에 관여하고, 가능하다면 황좌까지 차지해 자네의 뒤를 봐달라는 거고?”
“정확합니다.”
아가레스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그대로 무릎 위에 얹더니 머리를 숙이며 내게 다가왔다.
“아주 정신병자 같은 생각이야. 곧 황제에 등위할 황태자 때문에 문제가 생겼으니 그를 죽여 해결하자는 거. 하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나로서는 손해를 볼 게 없는 제안이고. 그래서 자네가 이 질문에만 대답한다면 고민을 해보지. 어떻게 할 건가?”
“암살 혹은 살해 방법 말입니까?”
“그래. 이제는 자유자재로 드래곤으로 변한다고 하지 않나? 그걸 어떻게 상대하려고?”
카르테아는 드래곤으로 변한다고 해도 용족의 전유물인 언령과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했다.
그가 취한 건 드래곤의 육체뿐이었다.
어느 아티팩트나 갑옷보다 항마력이 뛰어난 비닐,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라면 뚫을 수 없는 단단한 피부. 건물조차 무너뜨리는 완력을 지닌 괴물 같은 육체.
아가레스는 그걸 어떻게 무너뜨릴 거냐고 물었다.
“도와줄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누구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알겠어. 그래, 그 마법사 놈의 실력이라면 나도 잘 알아. 자기 분야에서라면 최고라 자부할만한 실력이지. 하지만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네. 마법이 제 위력의 10분지 1도 낼 수 없어.‘
“그리고 제가 있습니다.“
아가레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네. 자네가 실력에 자부심을 품는 것도 이해해. 또래 중에서 자네를 감당할 놈이 없지. 하지만 그것뿐이야. 소드마스터에라도 오르지 않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어.“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비숏이 만들어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 약을 먹는 건 비숏과 실험했던 이후로 두 번째였다.
폐가 쪼그라드는 듯 숨이 차고, 전류로 심장을 지진 듯 역동적으로 활기차게 뛰었다. 몸에 열꽃이 피었고, 얼굴에 열이 몰려왔다.
“후우우···.“
숨을 내뱉었다. 몸속에서부터 분노가 차올랐다.
약물이 뇌를 조종해서 감정을 만들어냈다. 이상했다. 아주 이상했다. 나는 화가 나는데, 뭔가를 부숴버리고만 싶은데 그 대상이 없었다. 화가 나는 이유가 없이 분노라는 감정만이 남았다.
감정을 약으로 만들어낸 부작용이었다. 원인 없는 결과물에 답답함이 차올랐고, 뇌를 자극했다.
장갑에 시동을 걸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보십시오.“
이걸 카타리나한테 먼저 보여줬어야 했는데. 이걸 보면 화들짝 놀랄 게 선명하게 그려졌다.
푸른 검기가 칼을 감싼다. 마나의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솟고, 가라앉으며 칼의 주변을 둘러싼다.
난 절대 이 경지에 닿을 수 없을 거라 판단했다. 세상에 2명밖에 없다는데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물론, 지금도 제대로 경지에 오른 건 아니었다. 이상한 약, 이상한 힘, 특별한 장갑이 겹쳐서 억지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순수하게 검술만을 따진다면 나는 익스퍼트 중간쯤이 아닐까?
하지만 여러 가지 기연이 겹쳤다. 이안 덕분에 마나를 다루는 기술만은 동급 검술가 중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고, 아주 성능 좋은 장갑도 있었다. 아직 세상에 두 명밖에 등장하지 않은 힘도 억지로나마 등에 끼워 넣었다.
그래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칼을 감싼 푸른 오러가 진동하며 포효했다. 맹수의 울음소리처럼 다른 생명체를 위협하는 힘이 있었다.
아가레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가 없군. 아니, 말이 안 돼. 여태 누구도 자네의 나이에 그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어. 익스퍼트에 오르고 고작해야 1년. 아니 정확히는 1년도 채 되지 않았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사실은 소드 마스터에 오르지 못했다. 억지스러운 방법으로 오러만 쓸 수 있을 뿐이었다. 검술 실력만을 따진다면 진짜 소드마스터인 어느 둘에게 한참을 밀려났다. 그 둘과 싸운다면 1분도 버티지 못할 거다.
하지만 그걸 여기서 말해서 좋을 건 없겠지.
나는 오러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게 힘들어 칼을 다시금 칼집에 넣었다.
“이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와 함께하시죠.“
“제대로 미친놈이라고 해두지. 내가 고발했다면 자네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안 하실 거 알고 찾아왔습니다.“
“무슨 근거로?“
“우리 친구지 않습니까?“
아가레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한숨을 뱉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래. 그러지. 자네가 황태자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적극적으로 황위를 노릴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활짝 웃었다.
카르테아를 제외하더라도 아가레스보다 제위 순위가 높은 황족이라면 몇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누구도 아가레스보다 강한 군사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가 진심으로 밀고 나간다면 제위 순위가 높은 황족들끼리도 힘을 합쳐야만 했는데, 그럴 시간이 없을 거다.
이미 카르테아의 황위 등극이 확실한 시점.
이 시기에 황좌를 노릴 놈은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