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다른 사람 앞에서 오러 블레이드를 선보인 건 처음이었다. 비숏 앞에서도 약을 먹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보여주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연습장에서만 오러를 몇 번인가 연습한 게 다였다.
어쩌면 아가레스도 오러를 본 게 처음일 수도 있었다. 그는 오러를 보고도 한참이 지나서 다시금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걸 쓸 수 있게 된 건 언제부터였다고 했지?”
“일주일쯤 됐습니다.”
“그럼 오러를 쓸 수 있게 되자마자 여기로 달려온 거겠어.”
“예, 비슷합니다. 도움이 필요했으니까요. 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을 거 같아서요.”
“그건 왜지?”
“이걸 알면 황태자도 저를 더 조심할 거 아닙니까?”
“그런가… 알겠어.”
아가레스는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온 김에 며칠 더 머물다 가는 게 어떤가?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라면 시간이 아까워서 그래. 우리가 또 언제 얼굴 볼지 모르지 않나?”
“그러면 하루만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전에 잉그레드를 방문했을 때 이곳 주방장에게 음식의 레시피를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녀의 솜씨는 나보다 훨씬 나아서 레시피를 알려주고 조리하는 방법을 한 번 알려줬을 뿐인데 맛을 그대로 흉내 냈다.
“음식을 가르쳐준 건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자네 덕분에 하루의 즐거움이 늘었어.”
“아뇨. 뭘.”
나는 아가레스와 주방장이 해준 음식을 먹었다. 평범하게 정찬을 내주어 식사한 후에 치킨과 떡볶이가 나왔다. 내게 맛 평가를 바라는 듯했는데, 이미 배가 터질 듯해 음식이 두려웠다. 하지만 집주인이 내준 음식을 남길 수는 없는 일. 억지로 음식을 먹어치웠다.
이에 아가레스는 만족스럽다는 양 웃었다.
“언제봐도 잘 먹는 걸 그래?”
지금 생각하니 다른 누군가에게 식사 자리를 초대받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대게 지인과 밥을 먹어도 식당 등을 찾았지, 지인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적었다.
지금 생각하니 귀족이 밥그릇 싹싹 긁어먹는 건 어색했다.
괜히 무리해가며 밥을 먹은 후에는 아가레스의 개인실로 이동했다. 그는 근처에 시종들을 내보내고는 말했다.
“밥을 먹고서 자네와 분명하게 해둘 일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아 미리 말해두고자 불렀네. 이번 일은 나는 모르는 일이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카르테아와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었으나 혹여나 문제가 깊어질 때를 대비해 아가레스에게 만약의 상황을 부탁했다. 이에 아가레스는 일이 성공한다면 나를 돕겠다고 대답했는데, 어찌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내가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때 자신은 말려들지 않게 철저히 분리해달라는 뜻.
“내가 간수할 게 내 한 몸뿐이라면 전적으로 자네를 도울 텐데, 그게 아니라서 미안하네.”
“아뇨, 제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가레스는 뭔가를 오해하고 있었다. 카르테아가 내게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된다고 여기는 듯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와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무 일 없다는 듯 넘어갈 것이다.
이를 아가레스에게도 알려야 할까? 그러면 그도 다소간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의 자리였다.
그도 마음 독하게 먹고 대비하는 게 맞았다.
* * *
아가레스와 약속을 나눈 후에 아카데미로 복귀하기 전에 잠시간 내 영지로 돌아왔다. 코로망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할 게 있었다.
“혹시 간장이라는 거 알아?”
“예?”
아가레스의 실력 있는 주방장에게도 간장이라는 향신료를 아는지 물어봤는데,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내 저택의 주방장에게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물었는데, 그도 똑같았다. 코로망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뭐죠?”
“짠맛을 내는 향신료의 일종인데, 흑갈색의 액체야. 콩을 이용해서 만드는 거로 기억하는데, 혹시 이걸 찾아 봐줄 수 있어?”
“네, 그러죠. 해볼게요.”
코로망한테 일을 맡기기 이전에 홀로 간장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시간을 써도 그 흔적조차 발견하기 어려워 포기했다.
하지만 뭘 하려고 해도 그것이 발을 붙잡는 탓에 일을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여기서 즐길 수 있는 즐거움 중 가장 큰 게 바로 먹는 즐거움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간장을 찾아야 했다.
그런 연유로 코로망에게 간장을 부탁한 다음 며칠간 영지에서 휴식했다.
나도 내 삶을 살아야 한다.
최근 수 개월간 가장 몰두했던 게 나비에와 카르테아를 이어주는 것이었다.
여기에 무척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성사 직전까지 이루었는데, 그게 코앞에서 무너졌다. 오직 카르테아의 변덕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와 크게 마찰을 빚었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감정적으로 움직였다. 그래, 누구한테라도 화풀이해야 했으니 그 대상인 카르테아에게 한 거였지.
“이제 자중하자.”
카르테아와 관련해 여러 가지를 준비한 건, 모두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였다.
무엇보다 나비에도 제가 원했던 걸 포기했지 않나? 그녀도 현실적으로 취할 것을 취하고자 했다. 굳이 내가 뭔가를 나설 필요가 없었다.
언제 다시 카르테아를 만날지 알 수 없었는데, 그를 다시 만나더라도 공격적으로 대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는 영지의 저택에 남아 원래라면 지금쯤 내가 만끽했을 생활을 잠시간 누렸다.
걱정거리들을 잊고, 편히 쉬었다. 한 번씩 제리코의 검술을 봐주었고, 그렇게 휴식하고는 다시금 아카데미로 향했다.
이곳에 도착해서는 프리실라가 카르테아를 내버려 두고 아카데미에 먼저 왔다는 점에 놀랐다. 카르테아는 황궁에서의 일로 바빠 프리실라를 신경 쓸 수 없는 듯했다.
“황태자님께 들었어요. 황태자님께서 황위에 일찍 등극하는 데 당신이 그렇게 애를 썼다면서요?”
그녀는 구태여 나를 찾아와 말했다. 번들거리는 눈에 조롱기가 있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아니꼽게 본다는 걸 아는 듯했다.
“누구십니까?”
일단은 일면식이 없는 관계에 머리를 갸우뚱거리자 프리실라가 콧방귀를 꼈다.
“황태자님께 다 들어 알고 왔으니 모르는 척하실 필요 없어요.”
“아…. 그때 공연장에서 뵌 거 같군요.”
“제가 그곳에서 잠깐 일했죠. 잠깐. 저기요. 조금쯤은 친절하게 구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지금이야 저는 일개 평민이고, 그쪽은 귀족이지만 이게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아차!”
프리실라는 이제 깨달았다는 양 입을 가리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아아, 당신도 아나 봐요? 제가 황후가 될 거라는 걸요. 그래서 평민인 저에게도 말을 높이시는 거잖아요.”
“귀족인 줄 알았네. 평민이 입기엔 옷이 너무 사치스러워서.”
“이거요? 황태자님께서 선물로 주셨어요. 그분께서 주시는 건 다 이런 거밖에 없어서요. 그보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휴전하죠.”
“나는 그쪽이랑 싸운 적이 없는데?”
“하….”
프리실라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더니 말했다.
“저를 방해하지 마시라는 거에요. 당신 이야기는 황태자님께 들었습니다. 황태자님께서는 지금 상황에 꽤 만족하고 계시니 어쩌면 당신을 용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협조하시죠. 제가 원하는 건 자리밖에 없어요. 자리만 차지한다면, 제게 반항하지 않는다면 보복 따위는 없죠.”
그녀의 말이 거짓이든 혹은 진실이든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였다.
“좋아요. 그러죠.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황태자님께서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의 불안 요소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니 저희를 방해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비에라고 했나요? 그 친구를 설득해주시고요. 괜히 더 마음고생 하지 말고 포기하라고요.”
“알겠습니다. 그러죠. 나비에, 그 친구도 마음을 접은 듯하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좋아요. 이제야 말이 통하네요.”
나는 몇 마디를 더 해 프리실라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그녀와 대화할수록 카르테아에게 의문이 들었다. 왜? 얘지? 얘가 마음에 들었다고?
나를 찾아오면서부터 무슨 말을 할지 정해왔을 텐데, 그러면 좀 더 말을 조심해서 뱉어야 할 거 아닌가? 표정도 조금은 더 온순하게 지었어야지.
프리실라가 황후가 된다면 적어도 내 영지의 세금이라도 올라갈 듯했다.
* * *
아가레스에게 보여준 오러는 사실 반쯤 가짜였다. 오러를 쓸 수 있으면 오러를 두른 칼을 휘두를 수도 있을 거라는 편견을 이용해 그를 속였다. 실은 아직 그 경지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액체 혹은 기체에 가까운 검기와는 다르게 오러는 단단했다.
여기서 차이가 생겼다.
검기를 칼에 둘러도 칼을 쓰는 기술은 똑같았다. 검기는 마치 칼과 하나가 된 것처럼 따라오며 검의 절삭력과 강도를 키웠다.
오러는 달랐다.
카타리나는 내가 소드마스터에 오르는 게 머나먼 미래라 생각했는지 오러의 사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확신할 수는 없었는데,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이게 아닌가?
오러를 두르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오러를 두른 검을 휘두르면 그대로 달아나며 흩어졌다. 고체처럼 보였던 오러가 희미해지며 서서히 사라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뭔가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 건지 그게 아니면 이미 소드마스터에 오른 누군가에게 지도를 받아야 하는 건지 난해했다.
아마 혼자서도 될 거라 생각은 한다. 나 이전에 소드마스터에 오른 둘도 혼자서 잘만 했으니까.
지금 직면한 문제는 그 둘과 달리 나는 오러를 연습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오러를 쓰는 데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는데, 그중에서도 분노제를 먹어야 한다는 게 발목을 잡았다. 몸에 좋을 게 없는 약이었는데, 연습할 때마다 이걸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약을 안 먹고도 강기를 써보고자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카르테아와 싸울 일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기도 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딱 한 번만 더.”
분노제를 복용했다. 감정과 함께 힘이 차올랐다. 그대로 칼에 오러를 입혔다. 약만 먹으면 이렇게 쉬운데. 처음 검기를 썼을 때와 비슷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시도하자 성공했다.
나는 오러를 두른 칼을 휘둘렀다. 오러가 울며 공기를 찢고 지나가자 그대로 흩어졌다. 약을 먹은 덕에 기감이 더 예민해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내 오러가 미숙한 탓이었다. 이건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습하려면 약을 먹는 수밖에.
물론 무리하지는 않을 거다. 비숏이 말했던 복용량을 그대로 지킬 테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