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카르테아는 황실에 남아 황제의 비위를 맞추었다. 황제를 따라다니며 드래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황제를 즐겁게 했다.
이는 그에게 굴욕이었고, 고난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애교 한 번 떨어보지 않고 자랐는데, 나이를 먹고 성인이 돼서 이 꼴이라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하지만 보다 빨리 황위를 잇기 위해서라면 이마저도 감수해야만 했다.
황좌.
어려서부터 그 빛나는 자리가 제 손에 들어오리라 굳게 믿었다.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간절하지 않기까지 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난다면 제 것이 될 터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카르시아는 병을 앓았다. 그도 카르테아처럼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다면 제 병마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카르테아를 닦달했는데,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건 그가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따라 하고 싶다고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카르시아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그토록 고대했던 일이었다. 황족 중에 누군가가 드래곤으로 변해 신화가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을 오래도록 꿈꿔왔는데, 그게 자신이 황제일 때 벌어졌다는 게 즐거웠다.
이전까지만 해도 황좌라는 자리에 큰 욕심이 없었다. 때가 되면 제 아들에게 물려줄 자리라고만 여겼는데, 거기에 괜스레 집착이 생겼다. 제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준다면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였다.
그도 눈치가 있어 알았다.
카르테아는 드래곤으로 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적어도 남들 앞에서 그 모습을 보이는 걸 기피한다는 건 분명했다.
황제의 권력을 잃는 순간, 죽을 그 날까지 다시는 변신한 카르테아의 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건 아쉽다는 말이야….’
왜 제 아들이 이렇게까지 제 비위를 맞추는지는 예상이 갔다. 조금 더 빠른 시기에 황위를 잇고 싶은 거다.
그 이유도 알았다. 못난 놈이 다른 여자와 눈을 맞았다. 이번에는 무려 평민 신분의 여자라는데, 그 미색이 뛰어나다는 것만 소문으로 들었다.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나비에의 가문이 다소 보잘것없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파혼을 요구하면 보상으로 내줘야 할 게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황실이 부유하다고 해도 볼 필요 없는 손해를 보게 했으니 크나큰 실책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이 정도라면.’
다소간 부족한 능력과 빈약한 책임 의식 따위를 무마할 능력이 카르테아에게 있었다.
그만큼이나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카르테아의 성품과는 별개로 사람들의 존경과 경배를 살 거다. 인망은 덤이었다. 주변국들은 다시금 제국의 눈치를 살필 거다.
“폐하, 저는 이제 왕관을 원합니다.”
카르테아는 황제에게 노골적으로 황위를 요구했다.
슬슬 여타 황족들도 제 편을 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카르테아는 존재만으로도 황족들의 위상을 드높였으니 어느 누가 그를 싫어하겠는가?
카르시아는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슬슬 황위를 내어줄 시기였다.
“좋다. 네 나이가 찼고, 주변의 지지를 얻었으니 네 자격을 인정하마. 하지만 한 가지, 제국에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는 걸 기억하나? 내 자리를 잇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지 않나?”
“약속하신 겁니다.”
“그래, 네가 내가 낸 숙제 하나를 더 풀면 바로 네게 자리를 넘겨주마.”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는 황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 숙제가 무엇입니까?”
카르테아는 황제의 대답을 듣고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 * *
카르테아가 아카데미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움찔했다. 황궁이 돌아가는 소식을 들으면 카르테아가 언제 황위에 등극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해서 이런 상황이라면 카르테아가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황제의 자리를 이을 거라 여겼다.
혹여나 잠시간 아카데미로 복귀한다고 해도 황제로서 와 몇 가지 문제를 처리하고 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황태자로서 복귀했다.
뭘까?
황제와 무슨 문제가 있다고 듣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아주 원만한 쪽이었다. 현 황제는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카르테아에게 푹 빠져 있었다.
뭐가 됐건 간에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
“이제 해야겠죠? 더는 미룰 수 없으니까요.”
카르테아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나비에가 다시금 서류를 준비했다. 카르테아의 파혼을 받아들이면서 그 보상으로 요구할 목록이었다.
서류를 든 나비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는 말했다.
“이제 시간일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제 요구를 들이민다면 지금이 마지막이에요. 황태자님께 황좌에 앉으신 다음에는 늦으니까요. 이제는 해야 해요.”
파혼을 대가로 재물과 금품을 요구하면 그야말로 끝이었다.
그간 나비에가 황후가 되기 위해 해왔던 노력, 마음에 입은 상처 따위의 값을 치르는 꼴이었다.
사실 이마저도 순수하게 나비에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가문을 위한 요구였다.
서류에 빼곡하게 나열된 요구 사항 중에는 어느 것 하나 나비에가 직접 쓴 게 없었다.
“이렇게 끝내야 한다는 게 아주 분해요. 마음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속이 쓰려요. 하지만 해야겠죠?”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데, 그랬다가 나비에가 황후에 오르는 걸 포기하지 않을까 싶어 입을 닫았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이건 끝난 일이었다. 차라리 얻을 수 있는 것이라도 얻는 쪽이 나아 보였다.
“답을 알고 있는데, 그 답대로 움직이는 게 어려워요.”
“황태자님이 오시자마자 바로 떠나지는 않을 거야. 며칠만 더 마음을 정리해봐. 그리고 만약에 혹시 도저히 포기 못 하겠으면….”
“아뇨, 그럴 일은 없어요. 이미 포기했으니까요. 그 말을 들으니까 이제야 다시 알겠어요. 제가 짜증이 난 건 이 요구 사항들 때문이니까요. 저를 위한 게 하나 없잖아요? 아니, 가문을 위한 게 저를 위한 게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알아. 무슨 말인지 이해하니까 그렇게 정정하지 않아도 좋아.”
“아하하하. 네, 이게 버릇이라서요.”
나비에는 이미 완성된 서류에 요구 사항을 하나 추가했다.
과연 뭐라고 쓰려나 궁금해 슬쩍 보려고 하자 그녀가 옷 소매로 가렸다.
“비밀이에요. 나중에 알려줄 게요.”
“대체 뭘까? 사람 기대하게 하고 있어.”
“기대하셔도 좋아요. 재밌는 거니까.”
* * *
카르테아가 아카데미로 돌아올 이유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황제가 카르테아에게 그리 시켰을 리는 없었고, 그가 학문 혹은 아카데미에서의 인연 따위를 신경 쓸 리도 없었으니 개인적인 볼일 몇 가지일 게 뻔했다. 그중 하나가 나였다.
나는 카르테아의 호출을 받고는 그를 향해 움직였다.
카르테아는 어느새 머리카락이 꽤 많이 자란 상태였다. 머리 스타일을 전과 비슷하게 하고는 나를 향해 억지로 웃었다.
“오랜만이군.”
“예. 반갑습니다. 본래 지니신 능력을 개화해 제국의 위상을 드높이셨다 들었습니다.”
“자네 덕분이지. 다 자네 덕분에 발견한 힘 아니겠나?”
“하하, 황태자님께서 누구보다 고귀한 피를 이으셨기 때문이죠.”
우리는 화재에서 의도적으로 프리실라를 배척했다. 이미 중간 다리인 그녀를 통해서 서로의 의중을 어느 정도 파악한 뒤였는데, 모른 척했다. 우리는 표면적인 대화만을 나누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카르테아가 먼저 화두를 꺼냈다.
“곧 있으면 나는 황좌에 오를 거야. 그런데 몇 가지 걸리는 게 있더군. 자네와 마찰을 빚은 채 이대로 황좌에 오르게 되면 자네에게 너무 불리한 일이지 않나? 자네가 마음고생을 심히 할 거 같았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네야 제국의 귀족이니 당연히 황제에게 충성할 텐데, 이대로 내가 황위에 오르면 자네는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못할 거 아닌가?”
나는 카르테아의 눈치를 살핀 후에 말했다.
“예, 그게 맞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전에 자네와 화해하고 싶어 이렇게 아카데미로 돌아왔네. 아마 내가 이곳에 있을 시간은 길지 않을 거야.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해서 말이야. 처리해야 할 일이 많거든.”
“저를 황궁으로 부르셔도 됐을 일을 직접 행차해주시며 먼저 화해의 뜻을 비춰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태자님의 넓은 아량에 기대며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마워. 듣자 하니 자네가 나비에를 설득하는 데 일조했다더군. 그게 사실인가?”
“예, 이미 일이 틀어진 후였으니 빠르게 움직여 그 뒷감당이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나비에를 부추겼습니다.”
“자네를 만난 후에는 그녀도 다시금 만날 텐데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그 또한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하하하.
나는 억지로 웃음소리를 낸 후에 말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카르테아는 내 확언이 마음에 들었는지 실실 웃었다.
“사실, 우리가 화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우리가 언제 싸웠다고? 무투회는 대련이었지 않나? 그럴 수 있는 일이었어.”
“좋게 봐주시니 다행이다 싶습니다. 저도 그때 제가 왜 그렇게 무모하게 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요.”
카르테아는 나와 화해하고자, 관계에 악연을 풀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 시기가 이상했다. 차라리 카르테아가 손을 내민 시기가 지금보다 더 빨랐다면 이해했을 거다.
카르테아가 황제 등극까지 시기를 앞당기지 않았다면 나로서도 반항할 수 있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황좌에 앉는 게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구태여 이렇게 시간을 쓰며 나를 회유하려 드니 어딘가 어색했다. 하지만 이를 티 내지 않고 표정을 관리했다.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다시 황태자님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다니 아주 기쁩니다.”
“그건 나비에한테 달린 일이지. 가능하면 나도 그녀와 좋게 좋게 헤어지고 싶어. 그래, 서로 썩 괜찮은 추억으로 남겼으면 하네.”
카르테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더 확인했다. 이놈은 정말 개 같은 놈이었다.
“하하, 나비에도 물론 그러길 바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