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나비에는 폐부 깊숙이 산소를 빨아들였다. 그녀는 제가 쥔 종이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흰 종이 위에 빼곡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여기에 있는 글자 뭉치가 그간 쏟은 노력의 보상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분수에 넘친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문항 하나하나가 그녀의 가문에 큰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단기적으로 끝날 게 아니라 후대에도 영향을 미쳐서 어쩌면 가문에 가장 크게 공을 세운 인물로 남을 수도 있었다.
‘이거로 만족하라고?’
황후라는 자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한 명의 영애가 얻어냈다고 하기에는 과분한 성과였다. 하지만 나비에는 주먹을 쥐었다. 고작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을 부모의 감독과 감시 아래에서 자라 자유를 꿈꿨다. 황후에 오르면 뭐든지 제멋대로 할 수 있겠지, 기대하며 살아왔다.
종이 위에 글씨.
이것들을 받는다고 한들 제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 부모의 간섭을 받는 것은 그대로, 어쩌면 파혼 경험을 거론하며 새 혼사처를 찾는 게 어려워졌다고 불평을 쏟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자신은 자기 덕분에 얻어낸 것들을 거론하며 따지겠지만, 과거의 일이라며 넘길지도 몰랐다.
그걸 상상하니 관자놀이 쪽에 두통이 생겼다.
‘그래도 해야 해.’
더 늦었다가는 얻을 수 있는 것마저도 포기해야 할지 몰랐다. 감정을 진정시키며 카르테아를 만날 준비를 했다.
괜히 만나서 앓는 소리를 하지 말자, 깔끔하게 받아낼 것만 받아내고 떨어지자고 다짐했다.
그녀는 약속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오래간만이야.”
“네, 안녕하세요.”
나비에는 표정과 음성에서 어떤 표정도 내비치지 않고 말했다. 이런 건 자신 있는 분야였다. 기쁜 척, 즐거운 척 따위를 하는 게 아니라 아무 관심 없는 척을 하는 것도 익숙했다.
카르테아도 그럴까?
그럴지도. 나비에가 본 카르테아는 그럴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도 황태자라는 신분으로 황궁에서 생활했으니 표정을 관리하는 데 익숙할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그사이에 감정을 칼로 썰어낸 듯 정리한 걸 수도 있었다. 카르테아는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인상으로 찾아왔다.
나비에는 화가 치밀어오르는 걸 억지로 참으며 머리를 숙였다. 전처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 이제는 예의를 차려야 했다.
둘은 허례허식을 길게 치르며 인사를 끝마쳤다. 그 후에 나비에가 말했다.
“파혼은 합의하여 끝내는 것으로 표명하신다면 그걸 받겠습니다. 대신에 이걸 봐주시죠.”
나비에는 미리 정리해둔 종이를 내밀었다. 카르테아는 파혼을 할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양 종이를 받아서는 그걸 읽는 척 눈동자를 움직이며 문서를 한 장씩 넘겼다.
“그중 무리한 요구 사항이 있다면 다시금 만나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거 없어. 받아들이지.”
카르테아는 머리를 흔들며 종이 뭉치를 챙겼다. 그는 이 자리가 몹시도 불편했다. 자신의 부덕함 때문에 관계가 파탄이 났고, 나비에한테 피해를 주었다. 그녀에게 악감정은 없었으나 볼 때마다 자신의 허물을 보는 듯해 불쾌감이 솟았다.
해서 글을 다 보지도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혹여나 저기에서 무리한 조항이 조금은 섞여 있더라도 자신의 잘못이니 감내해야지 생각했다.
무엇보다 조항을 수정할 때마다 나비에의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는 게 불편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부터는 궁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너도 잘 지내길 바라지.”
“예.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린 후에 나비에는 물러났다. 잘 지내라는 말에 심신이 꼬이는 듯했는데, 이만하면 잘 대처했다고 자부했다. 필요한 건 얻어냈다.
앓는 이를 뽑아낸 듯했다. 뽑아낸 자리가 아팠는데, 그래도 시원했다.
이걸로 끝이었다,
* * *
카르테아가 아카데미로 돌아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는 나와 화해한 후에 나비에을 만나 파혼과 관련된 일을 정리했다. 이제 그가 아카데미에서 해결해야 할 일은 모두 끝마친 셈이었는데, 아직도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왤까?
그가 아카데미에 있는 다고는 해도 무언가 다른 일을 처리하거나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았다. 그는 수업도 모두 불참한 채 제 기숙사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저럴 거라면 차라리 황궁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나?
가능하면 사람을 부려 그의 행태를 알아보고 싶었는데, 위험했다. 믿고 부릴 사람이 부족했고, 혹여나 그러다 걸리기라도 한다면 카르테아가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잘 해결하고 왔어요.”
“아아. 뭔가 트집잡힌 건 없고?”
“네. 제대로 보지도 않고 넘기더라고요. 귀찮았나 봐요. 그 사람이 황제가 된다니 제국의 앞길이 다 깜깜하네요. 황후가 될 여자도 멍청한데,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닐까요?”
그녀는 낄낄거리며 웃었는데, 내가 따라 웃지 않자 정색했다.
“농담이었어요.”
“알아. 그것보다 너와의 파혼 문제도 해결했으면 이제 여기 있을 필요가 없는데, 왜 집으로 안 간대?”
“그거까지는 모르겠네요. 황궁에서 뭔가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쳐온 게 아닐까요?”
“소문으로는 거기 분위기 좋다고, 곧 황제가 바뀐다더라. 뭔가 할 일이 있어서 온 건 맞을 거야.”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거로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저는 이제 한동안은 집으로 돌아가 있을 거 같아요.”
아카데미에 남는다면 카르테아와 프리실라 등의 얼굴을 종종 볼 수도 있었다. 나비에는 그걸 상상하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또 자기 가족들과 카르테아와 협의했던 일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았어. 다음에 보자. 건강해.”
나비에는 아카데미에 휴학계를 내고 떠났다. 이를 보고 나도 다시금 영지로 돌아갈까 고민했다. 내가 이곳에 돌아온 건 다 나비에와 카르테아 때문이었다. 그들 사이에 생긴 문제를 어떻게든 해보고자 시도했는데, 실패했다.
이건 이미 결론이 난 문제였다.
이전에 카르테아와 마찰을 빚어 문제가 생길까 싶기도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여기 머물 이유가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짐을 쌌다.
그러던 중에 카트레아가 다시금 나를 호출했다. 나비에가 떠나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옷을 차려 입고, 그의 기숙사로 걸어갔다. 아카데미는 신분에 따라 다른 기숙사를 제공했는데, 그중에서도 황족을 위한 곳은 특별했다. 카르테아는 그 넓은 기숙사에 시종을 여럿 거닐었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텅텅 비었다.
“나비에와 일을 잘 풀었어. 자네가 그녀를 설득해준 보람이 있었네. 고마워. 자네가 아니었다면 몹시 피곤해졌을 거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나비에가 파혼을 순순히 받아들인 게 내 설득 때문이라 판단한 듯했다. 그런 게 아닌데. 나비에 본인이 그쪽이 맞는 판단이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카르테아는 이를 두고 내가 다시 자신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여기는 듯했다.
“자네에게도 따로 보상을 해주고 싶은데, 혹 원하는 게 있나?”
“하하….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전에 무투회에서 일이 죄송해서 말입니다.”
“아아. 굳이 또 그때 일을 언급할 필요 없네. 나는 다 잊었어. 자네도 그때 일에 마음 쓰지 말게나.”
카르테아는 침을 삼키고는 다시금 말했다.
“그래서 정말로 원하는 게 따로 없나?”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생각해두게. 나중에 내 따로 보상하지. 그리고 또 하나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어.”
“예? 황태자님께서 말입니까?”
“어. 그래.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잠시 자리를 옮기지.”
카르테아는 나를 데리고 기숙사 안쪽으로 움직였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탓에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하나 잠시간 걱정했는데, 곧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판단했다. 설마 그럴까.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나?”
“예. 물론입니다.”
“좋아. 자네를 믿지. 이 이야기는 자네 외에 누구한테도 하지 않은 터라 혹여나 떠돈다면 자네를 의심할 거야. 괜찮나?”
“혹시 그냥 안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황태자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꼭 어디서 실수가 나오는 법이라 큰 책임을 지는 게 무섭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정말로 자네 외에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니까.”
이미 카르테아의 뜻은 확고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끝내 제 일에 끌어들일 심산이었다.
“알겠습니다. 황태자님을 따르죠.”
“고맙네. 이제 내 비밀 한 가지를 말하지. 소문에 따르면 나는 내 마음대로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네. 그런데 실은 달라.”
“뜻대로 변하실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카르테아는 말을 하다말고 멈칫거렸다. 말하려던 바를 내게 알려주어도 되는지 고민한 듯했다.
“으음…. 정확히는 조건이 있네. 지금 당장은 그 조건을 만족하는 게 쉬운데, 갈수록 힘들어질 듯해.”
“그 조건이 뭔지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까지 말했는데, 물릴 수는 없지. 거기에 자네가 이걸 안다고 해서 나를 어찌할 수도 없고 말이야. 조건은 상처야. 변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 상처를 입혀야 하는데, 이게 점점 더 커져. 변할 때마다 더 큰 상처를 내야 해서 가능하면 변할 횟수를 줄이고 싶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폐하께서 내게 숙제 하나를 내주셨네. 국경이 맞닿은 곳에 있는 이종족을 직접 쓸어버리라 하시더군. 별거 아닌 놈들이니 간단한 일인데, 내가 직접 하나하나 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려. 또 변해야 하는 숫자가 늘어난다는 게 부담이라, 이번 일을 자네가 도와줬으면 해.”
나는 카르테아에게 왜 군사를 끌지 않는 건지, 다른 이에게 부탁하지 않고 나를 찾아온 건지 따위를 물었다.
“내 사정을 많은 이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걸 아는 인물은 정말로 나 하나밖에 없는 듯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게 퍼진다면 나 하나만 죽이면 끝이 날 일이었다. 거기다 세간에는 나와 카르테아가 꽤 여러 일로 얽혀 있었다.
대다수는 내가 카르테아와 친밀하다고 간주했다. 그럴 게 아미칸보의 칭호를 받았지 않나? 이 칭호를 받은 이는 소수인지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반대쪽 여론도 있었다. 무투회에서의 과격한 싸움에 나와 카르테아의 사이가 끔찍하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특히나 내가 그와 함께 다닌 일이 없으니 은근히 힘을 얻었다.
나와 카르테아는 이미 여러 일로 혼잡한 상태였다. 나 혼자 그리 떠든다고 한들 증명할 방법이 없었고, 카르테아가 무마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고맙네.”
현 황제에게 충성이 강하지 않은 이들 중에 개인의 힘이 뛰어난 이를 뽑다 보니 내게 차례가 온 듯했다.
카르시아가 카르테아에게 드래곤의 모습으로 이종족을 물리쳐달라 부탁한 데는 개인적인 바람이 깃들었다. 이종족은 인간이 아닌 종족을 말했는데, 현재 제국은 만사태평했다. 어느 종족, 어느 왕국 하나 제국에게 대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과제를 내린 건, 그가 황좌에 앉아 있을 때 카르테아가 의미 있는 일을 했으면 하고 바라서였다.
드래곤이 제국을 수호한다는 믿음은 제국의 시민들에게 뿌리 깊이 내렸다. 이를 다시금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쇼라고 볼 수 있었다.
이종족.
인간과 비슷하게 글을 읽고, 도구를 쓰지만, 인간이 아닌 종족. 인간과는 크게 다른 겉모습 때문에 반목했고, 때론 교전했지만 다 과거의 이야기였다. 현재는 발전한 인간의 기술과 무술, 마법 등에 대항하지 못하고, 숨어 살았다.
카르시아에게 내린 명령은 그 숨어 사는 이종족들을 찾아내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구태여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을 부탁했다. 카르테아가 조금이라도 더 변신해서 제국을 위해 힘써주길 원해서였다.
후대에 사람들은 지금 시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역사를 배울 것이다. 제국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는 이유, 드래곤의 수호를 다시금 상기할 것이다.
카르테아는 구태여 능력 있는, 인망 두터운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이 기본만을 지켜도 크게 명성을 떨칠 것이다. 카르시아는 그런 카르테아에게 황제가 되기 전에 여러 경험을 쌓았으면 싶어 이종족 토벌을 명 내렸다.
마지막으로 황제로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할 시간도 벌 겸.
카르테아는 제국의 상징적인 황제가 될 게 분명했지만, 그의 능력을 믿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귀도 얇은 구석이 있어 주변 인사들을 잘 꾸려야 했다.
‘괜찮은 놈이… 그래, 제임스. 또 누가 있더라….’
야망 없고 황제의 권위에 충성할 놈들. 그중에서도 깐깐한 놈들도 주변을 꾸렸다. 그들이라면 카르테아가 다소 부족하다 하더라도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하며 견마지로를 다할 것이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아. 이제 내 아들놈이 일을 끝내기를 기다리지.’
이종족 관련해서 크게 기대한 바는 없었다. 이미 끝물인 싸움이었다. 어지간한 노력과 정성으로는 그들을 뿌리째 뽑는 건 어려우니 카르테아도 적당히 무리 몇을 휩쓸며 눈속임만 하곤 돌아올 것이다.
* * *
“일단 출발까지는 여유를 두려고 하는데, 대동할 수 있는 시종의 수가 적네. 이번 일을 아는 인원의 수를 최대한 줄이려 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 짐은 간소하게 싸게.”
“황태자님께서 불편하실까 걱정입니다. 전 그리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거 다행이야. 고마워. 그럼 나는 시종들을 시켜 짐을 싣게 할 테니 준비가 끝나면 다시 나를 찾아오게나.”
“예, 알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카르테아를 돕게 되었다. 카르테아는 황제로부터 제국 변경에 숨어 있는 이종족을 찾아내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건 그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치러야 할 마지막 숙제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도와 여행길에 함께 참여하게 됐는데, 여행에 인원수가 적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이안을 찾아가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그는 콧방귀를 끼며 팔짱을 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했다.
“대동하는 사람의 수가 적다는 것부터 이상하잖아. 바로 의심했어야지. 그놈이 널 공격한다면 어떻게 하게? 거기에는 그놈 편뿐일 텐데.”
“맞아. 그게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어. 하지만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 거부하는 순간 황태자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였다고.”
“하아….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괜찮을 거로 생각해. 황태자가 날 공격하다니? 그럴 가능성은 작아. 그럴 거면 굳이 이렇게 귀찮은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그에게는 수가 많았어.’
이안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톡. 톡. 톡. 검지가 반대 손의 손등을 몇 번 때리고서는 말했다.
“그래. 알았어. 알고 있을게. 큰일이 있을 거 같지는 않으니까.”
이안에게는 내가 어디로 떠나는지 미리 보고했다.
그다음.
이후의 준비는 단순 노동뿐이었다. 나는 금세 짐을 모두 쌓은 후에 카르테아를 찾아갔다. 그는 이미 여행을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쳐놓은 다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하나와 딱 마차 하나를 운반하고 관리할 시종 한 무리가 전부였다.
“저들은 내가 어릴 적부터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 오래 관리한 이들이지. 그 덕에 믿을 만해. 저들 때문에 내가 행동하는 바가 폐하의 귀에 들어가고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카르테아와 마차 하나를 같이 타고 길을 떠났다. 무려 황태자가 낀 여행길이었는데, 그 인원을 모두 합해도 열이 채 되지 않았다. 목적지는 카르테아의 마음대로 이종족이 있을 듯한 변방을 달리며 굴이나 동굴 등에 무차별로 폭탄을 던져서 반응을 확인하고는 했다.
한 번은 마물도 사람도 아닌 곰이 뛰쳐나와 덤벼들었는데, 운이 좋게 발차기 한 번으로 제압해 별다른 사고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처음으로 어느 이종족 무리를 찾아냈다. 키가 인간의 절반쯤 왔고, 피부가 초록색인 종족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발견 당한 즉시 도주했다.
대부분의 이종족이 다 그러했다.
나와 카르테아를 보자마자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이렇게 그들을 잡으러 인간이 돌아다니는 게 흔한 듯했다. 하기야 노예제가 없는 세상인데, 이종족을 납치하는 건 노예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종족이 인기 있을 수밖에.
그러다 딱 한 번 예외를 맞닥뜨렸다. 흔히 엘프라고 부르는 그런 장수족이었다. 그들은 개개인 하나하나가 나쁘지 않은 힘을 지녔음에도 그 개체 수가 적어 인간과의 경쟁에서 쉽사리 패배한 종족이었다.
그들의 가장 특징은 수명이었다. 인간보다 몇 배로 긴 삶을 살았다.
그래서 이런 놈도 다 있나 싶었다.
우렁찬 거목이 줄줄이 서 있는 깊은 숲속.
우리는 거기서 엘프라는 종족을 찾았다. 칼을 휘둘러 그들을 터전에서 쫓아내는데, 반격하는 이가 있었다.
“인간을 증오한다. 우리의 숲을 불태운 그놈들의 세상도 똑같이 불태우기를 꿈꾼다. 그 날만을 위해 무기를 들었왔다. 너희는 여기서 죽는다.”
이 세상에 소드마스터가 둘밖에 없는 줄 알았다. 겨우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척할 뿐인 나는 빼는 게 맞았다. 그러네, 세상에 소드마스터는 카타리나와 하오크 둘일 줄만 알았다. 놀랍게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내 이름은 아도라가타. 인간의 대적자가 될 자니!”
놀랍게도 저 백발의 엘프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했다. 엘프인데도 새치가 저렇게 무성한 걸 보면 적어도 수백 살을 살아온 자였다. 그는 수백 년 동안 검술을 수련한 듯했다.
인간 세상에서 검술은 재능의 분야였다. 재능을 타고나지 않는다면 오를 수 있는 층의 한계가 있었는데, 엘프한테는 그게 다른 듯했다. 신체 나이의 최전성기를 수백 년간 지낼 수 있으니 그 시간을 때려 박아서 경지를 올리는 게 가능했다.
“죽어라!”
그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하아. 미치겠네. 어디서 갑자기 이런 놈이 튀어나오는 거야?
나는 속에 숨겨둔 분노제를 사용해야 하나 걱정하며 카르테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품에서 단검을 꺼내서는 팔을 그었다.
찌이이이익!
단검이 피부를 가르는데 불똥이 튀며 실시간으로 칼날이 무뎌졌다. 그러나 칼이 어깨에서 손목 언저리까지 도착했을 때는 출혈이 펑펑 터졌다.
“내가 해결하지.”
카르테아가 변했다. 등에서 날개가 솟으며 피부에 비늘이 돋았고, 팔다리가 커졌다.
쿠와와와아앙!
그는 드래곤의 모습을 취했다. 전에 내가 봤던 어중간한 형태가 아니었다.
거대했다. 어지간한 건물 크기의 몸체로 변한 그를 보더니 엘프 소드마스터는 비명을 질렀다.
“위대한 분이시….”
파아아아악!
카르테아가 손을 휘둘러 엘프를 때렸다. 손에 맞은 엘프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 어느 나무에 머리부터 뚫고 들어가 처박혔다.
“끄윽….”
역시 소드 마스터. 드래곤의 육중한 일격에도 살아남았다.
엘프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사태를 파악한 듯했다. 저 드래곤은 적이라고 해답을 낸 듯했다.
그는 카르테아에게 달려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감은 검으로 카르테아를 베었다.
쉬이이익!
확실히 이 세상에 못 베어낼 게 없다는 오러 블레이드는 제 명성 값을 했다. 오러 블레이드는 드래곤의 비늘마저도 수월하게 가르고 들어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칼은 작았고, 그 엘프는 다소 느렸다.
퍼어억! 퍼어억! 퍼어억!
카르테아는 순식간에 엘프를 짓밟았다. 그 후 무자비하게 손으로 내리찍어 죽였다.
퍽. 퍽. 퍽
이건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저 엘프 소드 마스터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고수였다. 오러를 다루는 게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내가 분노제를 암만 먹는다고 해도 저 엘프의 절반도 해낼 자신이 없었다.
카르테아는 그런 엘프를 압도했다. 피부가 조금 찢어지고, 근육이 갈라졌을 뿐 이렇다 할 치명적인 상처 하나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소드 마스터 하나를 죽였다.
과거, 인간의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 시대.
그때 저런 몸뚱이로 제국을 수호했다 하면 혼자서 인류 전원과도 싸울 수 있을 듯했다. 그만큼이나 카르테아의 무위는 대단했다.
그는 인간 형태로 돌아와 말했다.
“가능하면 이 힘을 쓰고 싶지 않았어. 전에 말했듯이 한 번 쓸 때마다 내 몸에 더 큰 상처를 내야 하니까. 언젠가는 내가 죽기 직전까지 몰아가야 할 거고, 그러다가는 결국 죽을 테니까.”
“그렇지만 굉장한 힘입니다.”
“아아. 전설 속에 나오는 그 드래곤과 같은 힘이니까. 아마 살아있는 것 중에 이 힘을 감당해낼 수 있는 건 같은 드래곤뿐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만하면 돌아가도 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내리신 명을 완수했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무려 소드마스터를 직접 잡으셨으니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좋아. 그러지.”
그의 싸움을 보고 괜히 성급하게 덤비지 않아 다행이라고 확신했다. 설령 이안이 나를 도와 그를 상대로 싸웠다고 해도 이길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한 후라면 말이다.
그럴 일이 없겠지만, 혹여나 카르테아를 죽여야 할 일이 생긴다면 꼭 인간 형태일 때 해야 할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