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어지간해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카르테아는 이번 학기를 이수할 경우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셈이었다.
아카데미의 졸업장이야, 그에게는 아무짝이 쓸모없는 종이쪼가리였으나 프란츠가 그에게 직접 연락했다. 수업 등에 면제해줄 테니 학위를 받아 가라는 것이었다.
제국의 황제가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건, 아카데미로서도 크나큰 명예였다.
카르테아 또한 그간 아카데미에서 보냈던 기간이 길었던 탓에 마무리를 하고자 프란츠의 제안을 수락했고, 다시금 아카데미를 찾았다.
라파엘과 비숏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장정 1년.
긴 시간이 지났다.
그 기다란 시간 동안 비숏과 카르테아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건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서였다.
그렇게 되도록 라파엘이 세심하게 관리했다. 비숏은 언제나 학업과 관련된 일에만 시간을 썼고, 카르테아는 학업과 관련 없는 쪽으로만 시간을 썼다.
안 그래도 아카데미 활동이 적었던 카르테아였으니 1년간 둘이 스쳐 지나가지도 않은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
아카데미의 학장, 프란츠를 만나기 위해 카르테아가 아카데미 생활 중에 드나든 경험이 없다시피 한 건물을 지나칠 때였다.
카르테아는 비숏을 보았고, 처음 프리실라를 마주했을 때처럼 감탄했다.
놀라운 외모였다.
프리실라도 아름답기는 했어도 어찌 된 이유인지 비숏 쪽이 더 끌렸다.
비숏도 카르테아를 본 모양인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지나갔다. 그 모양새에 카르테아는 탄식했다.
“잠시 시간 괜찮나? 학장을 찾고 있는데 이곳 지리를 모르겠단 말이야. 안내 좀 해줄 수 있겠나?”
비숏은 저절로 구겨지는 얼굴을 억지로 폈다. 황태자의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곧 있으면 졸업인데, 같은 학년에 입학한 학생들도 졸업할 때까지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다고 했다.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였는데, 학장실의 위치도 모르는 걸 보아하니 그게 진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예,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그녀는 카르테아를 안내했다. 어차피 멀지 않은 거리였다. 잰걸음으로 앞장서서 이동했다.
“이름이 뭐지? 고마워서 그러네. 나중에 사례라도 하지.”
“이름은 비숏 퓨어문이라 합니다. 별거 아닌 일이니 마음 쓰실 거 없습니다.”
“하하…. 내 어찌 그러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장실에 도착했다. 카르테아는 비숏의 옷소매를 잡고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 기다리게”
그의 말에 비숏은 확신했다. 황태자가 다시금 변덕을 부리는구나.
비숏도 귀가 있었다. 친구가 없어 소문에 어둡다고는 해도 모두가 아는 이야기는 그녀도 알았다.
나비에 러브원.
그녀는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자신과도 한 번 마찰이 있었던 영애인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원만한 듯했는데, 황태자의 변덕 한 번에 모든 게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이번에는 제 차례인가?
비숏은 사람들이 제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카르테아가 왜 이런 변덕을 부리는 건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게 가당찮았다. 우습기까지 했다.
“저도 일정이 있습니다.”
“그럼 미루게. 취소한다면 더 좋고.”
비숏이 무어라 반박하려던 찰나에 카르테아는 그대로 학장실 안으로 이동했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카르테아는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학장실에서 퇴장했다. 카르테아는 웃는 얼굴로 비숏에게 향했다.
비숏은 일을 확실하게 하고자 평소보다 목소리를 한 톤 내리깔고는 말했다.
“황태자님께서 제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미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황태자님께서 바라시는 걸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아카데미 재학 중에는 더더욱 제 학부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하하…. 오해가 있는 듯한데, 그래도 그대 뜻은 존중하지.”
카르테아로부터 벗어난 비숏은 이번 일을 빌미로 좋지 않은 상황에 부닥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기우일 수 있으나 이런 쪽으로의 걱정은 언제나 틀리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혹여나 불상사가 발생할까 싶어 제프린에게 연락했다.
그를 대동하고 다닌다면 적어도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거로 간주했다. 그녀의 연락을 받은 제프린은 곧바로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오래간만입니다.”
“갑작스럽게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꼭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막는 게 이로우니….”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습니다.”
제프린은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지는 않아도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비숏과 함께했다. 이로써 문제는 모두 해결될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카르테아가 무리하게 비숏에게 다가가 말을 걸 때였다.
“황태자님, 영애께서 불편해하십니다.”
그 말에 카르테아는 배를 잡고 웃었다. 흉통이 확장했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이름을 말해라.”
“예?”
“다시 말하지. 이름을 말해라.”
“제프린이라 합니다.”
“평민? 평민인가? 재밌어.”
짜악!
카르테아는 제프린의 뺨을 갈겼다. 나름 힘껏 갈긴 것인데, 제프린이 서서 버티자 오기가 생겼는지 점차 손에 힘을 더했다.
쨔악! 쨔악!
“놀랍군, 놀라워. 어디 평민 따위가! 감히!”
비숏은 눈앞에 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프린이 카르테아에게 일방적으로 맞았다. 코와 입술에서 피를 흘렸다. 이렇게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만둬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하하… 그대 부탁이라면.”
카르테아는 미쳤다. 곧 황제가 된다는 생각에 전보다도 과격하게 행동했고, 더 적극적으로 제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다.
‘더는 못 버티겠어.’
비숏은 아껴뒀던 수를 꺼냈다.
라파엘.
그가 제 부탁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다. 그때 빈말로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건 아닌 듯했는데, 라파엘은 손익계산이 철저했다.
무리한 부탁은 거절하겠다고 했으니 내심 불안했다. 곧 황제가 될 황태자가 귀찮게 구니 어떻게 해달라니, 제가 보기에도 어려운 요구였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간절한 마음으로 라파엘에게 편지를 썼다.
도와달라고.
* * *
저택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코로망으로부터 영주로서의 업무는 대부분 인계받았으니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렇게 백수의 삶을 만끽하는 중에 비숏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내게 남겨둔 빚을 받아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전에 나는 한 번 비숏에게 어지간한 선에서는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수표를 썼다.
그녀는 가능한 한 오래 그 부탁을 아끼고 아낄 거라 말했는데, 이번에 그 부탁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 원인은 카르테아였다. 제프린이 카르테아에게 맞았고, 자신을 귀찮게 구니 이를 막아달라고 했다.
“꼭 들어줘야 할 부탁은 아니야.”
나는 이전에 밑밥을 깔아뒀었다. 그녀의 부탁이 무리하다 싶으면 거절하겠다고 말했는데, 이번 일은 부담스럽다고 말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처리해야 할 상대가 무려 카르테아, 곧 황제에 오를 황태자였다.
황태자가 귀찮게 구니 떼어달라는 부탁을 어떻게 냉큼 수락하겠는가?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둔 채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이걸 들어줘야 할까? 들어준다면 무엇을 잃게 될까? 무엇을 감수해야 할까?
카르테아와의 관계였다.
현재 나는 카르테아와 과거에 악연은 잊고 잘 지내보자, 하고 손을 잡았다. 비숏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어떻게든 간에 카르테아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꼴이었다.
이건 카르테와의 약속을 깨는 것에 해당했다.
카르테아는 곧 황좌에 앉는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런 그와 애써 봉합한 관계를 다시금 찢는 일을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비숏도 제 부탁이 무리했음을 인정할 거다.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면 거절하는 게 맞았다.
“약빨이 아직도 도는 거 같네.”
몇 주 전, 오러 블레이드를 시험 삼아 써보기 위해 분노제를 마셨었다. 연습을 한 후에는 냉각제까지 먹었는데 아무래도 아직 은은하게나마 그 영향이 남아있는 듯했다. 카르테아를 향해 분노가 차올랐다.
카트레아를 죽여야 한다.
비숏의 부탁을 가장 확실하게 해결할 방법은 한 가지였다.
카르테아를 죽이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그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과연 카르테아가 진심으로 나를 용서했을까?
비숏의 편지에서 보인 카르테아의 옹졸한 모습을 보면 결코 아니었다. 카르테아는 아직 황제가 아닌 황태자에 해당했다. 당장의 그가 나라는 장애물을 치워버리는 건 번거로우니, 뒤로 미룬 것뿐이었다.
그가 황제에 오른다면 나 또한 위험할 수 있었다.
“이거 아가레스가 좋아하겠네.”
카르테아를 죽인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고, 그 방법을 고민했다. 드래곤으로 변한 카르테아는 정말 무적에 가까웠다. 당시에 카르테아가 상대했던 소드 마스터 엘프는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을 강자였다. 그런 상대를 1분도 안 돼 간단히 쓰러트렸으니 그 무위는 제국제일이라 할 법했다.
그를 죽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드래곤으로 변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는 것.
만약에 실패해서 카르테아가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면?
황태자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꼴이었으니 카르테아의 손에 죽거나 법의 처벌을 받아 사형에 처하는 일뿐이었다.
여기에 이안을 끌어드려도 괜찮을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안은 뭐든지 해달라고 하면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도와달라고 요청한다면 들어줄 공산이 컸다. 하지만 이런 일에 친구를 끼우는 건 너무 악랄하지 않은가?
이번 일은 혼자 한다. 유언장도 몰래 준비해두었다.
황족 암살 미수는 대역죄에 해당했다. 내 영지의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연좌제 따위는 없으니 그들이 직접 처벌을 받지는 않아도 어떻게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지만, 혹여나 내가 죽는다면 적어도 저택 내에 인사들이 먹고살 수 있게 재물을 분배했다.
카르테아를 죽일 계획을 짜며 아카데미로 향했다. 실패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 미친 거 같네.
몇 주 전에 먹은 분노제의 효력이 아직도 도는 게 분명했다. 과거였다면 절대로 택하지 않을 위험한 선택에 선뜻 손이 나간다니 아주 이상했다. 이건 비숏을 만나면 다시금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진짜 마지막.”
이번이 마지막 아카데미 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