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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17화 (117/125)

제118화

아카데미에 방문하자마자 비숏을 찾았다. 카르테아에게 시달리느라 피곤했는지 그게 아니면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았는지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보낸 편지로 얼마간의 일은 알고 있었는데, 다시금 확인하고자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너를 보자마자 주접떨기 시작했다고?”

“주접… 예, 비슷합니다.”

“이거 큰일이네.”

원작에서도 카르테아는 비숏을 보고 반했었다.

그렇게 설정된 인물이었다. 이미 한 번 약혼했고, 파혼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해도 그가 비숏을 보고 새 사랑을 찾는 건 예정된 일일 수도 있었다.

그가 어디까지 갈까?

프리실라를 내칠 수도 있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확실한 건 끝까지 비숏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너도 알지? 네가 볼 때 어떻게 해야 이걸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

“죄송합니다. 저도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답이 나오지 않아 이렇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카르테아가 비숏에게 꼴값을 부리는 건 원작에서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외모였던 탓에 원작에서도 가장 저돌적으로 움직였었다.

이번에 원작보다 더 과격하게 행동하는 데는 그의 지위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다른 탓이었다.

카르테아는 이제 황태자가 아니라 곧 황제가 될 몸.

거칠 게 없었다. 더군다나 아가레스나 이안 같은 그럴듯한 경쟁자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제멋대로 하기는 더 좋았겠지. 평민에다가 그냥 실력 좋은 검사일뿐인 제프린만 불쌍한 꼴이었다.

“내가 볼 때 방법은 하나야. 카르테아를 죽이는 거.”

흐업.

자기도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 내 말을 들은 비숏은 놀라서 헛숨을 들이키더니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둘밖에 없는 게 확실한데도 혹여나 말이 새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네가 보기에도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 같지는 않지?”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그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 프리실라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평민 출신에 얼굴 하나로 황궁에 들어가려는 애야. 카르테아의 눈치만 살필 뿐이겠지. 거기에 곧 황제가 될 테니 그를 막을 사람은 없어.”

“살인은 안 됩니다.”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도 답답했다.

나도 이해는 한다.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꺼려졌다.

특히 상대가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데 먼저 손을 써 죽인다는 건 끔찍하기까지 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 네가 도와달라고 했잖아.”

“무리한 부탁이었나 봅니다.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셨던 일은 여기까지 행차하신 수고를 생각해서 사용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일을 해결할 수단이 그것뿐이라면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포기하고 어떡하게?”

카르테아는 고집이 세다. 원하는 것은 가져야만 한다. 그러니 끝까지 제 욕망을 들이밀 거다.

“네가 직접 거절하게?”

“예. 제가 하겠습니다”

당차게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비숏을 제지했다.

“소용없어. 네 뜻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

비숏도 그간 카르테아를 경험했으니 그가 어떤 인간인지 조금은 알 거다. 그는 원하는 건 가져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너 지금까지 말해봤잖아. 진심으로 싫다고. 그런데 그게 통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없었지? 인제 와서 뭐가 다를 거 같아?”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차라리 뭐? 네가 황후가 되게? 그럴 욕심은 있고? 프리실라랑 경쟁하겠다는 소리야? 걔는 황후가 되기 위해서라면 널 죽일 수도 있어. 아마 다양한 방법으로 암살하러 들겠지. 그걸 버티면서 네가 역으로 프리실라를 죽이게?”

제국은 일부일처를 고집했다. 첩 혹은 황비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카르테아가 황제가 된 후에 고집을 피운다면 법이 바뀔 수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한들 비숏의 삶이 순탄하지는 않을 거다.

“네가 살려면 죽이는 수밖에 없어. 너한테 선택궈이 있기는 하지. 카르테아를 죽일지 프리실라를 죽일지. 골라봐.”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황태자님은 당신의 친우이지 않습니까?”

킥.

당돌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 소문은 그렇게 나 있었다. 나는 카르테아의 아미칸보였고, 그가 인정한 친우였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을 거다.

“걔랑 나 친구 아니야. 사이 나빠. 이건 나중에 다 끝나면 말해줄게. 말할 게 너무 많아서.”

카르테아를 죽이기로 이미 결정했다. 여기에 비숏이 도움이 필요했으나, 그녀 없이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윤리관까지 바꿔가면서 일을 처리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방법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그를 시해하겠다는 겁니까? 소문을 듣기론 그는 단신으로 소드 마스터를 쓰러트렸습니다. 당신 혼자로는 부족한 것 아니니까?”

“맞아. 그런데 그거는 드래곤으로 변했을 때 기준이지. 변하기 전에 그는 평범해. 변하기 전에 급소를 찌른다면 다 끝날 일이지. 그를 죽이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아. 내가 걱정하는 건 그 후야.”

카르테아가 죽은 후에는 아가레스가 황제가 될 거다. 하지만 거기까지의 시간이 제법 있었다.

황궁의 마법사들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하며 범인을 찾기 위해 수사할 텐데, 이에 걸리지 않는 게 어려웠다. 카르테아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덜미가 걸린다.

여기서 비숏의 도움이 필요했다.

“네가 그를 유인해줘. 그러면 내가 죽일게.”

“알겠습니다. 그리하죠.”

나는 비숏과 계획을 짰다.

* * *

카르테아가 죽은 자리를 마법사들이 수사할 거다. 이를 대비하고자 나는 마법의 전문가를 찾았다.

“카르테아를 죽일 거야.”

“이제 서야? 난 좀 더 빠를 줄 알았는데. 근데, 아닌 척하더니 결국에는 결심했네? 언제 할까? 뭘 해주면 되는데?”

“그를 죽이는 거는 나 혼자 할 거야. 내가 궁금한 건 황궁 마법사들의 수사를 피할 방법.”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썹과 눈이 가까워지며 미간에 주름이 졌다. 한쪽 광대뼈만 으쓱인 채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너 혼자서는 안 될 텐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걔를 어떻게 죽여?”

“할 수 있어. 변신하기 전이라면.”

“아니 그렇다고 한들 못해. 싸워서 이기는 건 몰라도 암살은 실패야. 네 칼이 그놈의 뼈를 가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할 수 있어.”

나는 이안에게 분노제의 이야기와 마나 유동과 관련해서 그에게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음을 설명했다.

“내가 도와주면 더 쉬워.”

“맞아. 그렇겠지. 근데 좀 그렇지 않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안에게 설명했다.

“내가 간단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이거 대역죄잖아. 황태자를 암살하려는 건데, 관련도 없는 너한테 어떻게 같이 하자고 해.”

“관련이 없기는. 나도 걔 싫어해. 걔 죽이고 싶어.”

“어?”

황당해서 머리통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내가 알기로는 얘랑 카르테아가 엮인 적이 없었다. 싫어할 건수가 없을 텐데 뭔가 싶어 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걔, 생긴 거 싸가지가 없잖아. 보고 있으면 화가 나더라. 죽도록 패주고 싶게 생겼어.”

그의 말에 온몸을 쿨럭이며 웃었다. 어디서 이런 농담을 배워왔대?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데 이건 내가 할 일이야.”

“같이 하면 더 편하잖아. 그래서 이러는 거야. 실패할 리도 없고.”

“맞아. 실패할 리 없는 일이지. 안전해. 그런데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안은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는 콧방귀를 끼더니 말했다.

“뭐가 안 된다는 건데.”

“실패하면 너도 죽을 수 있는데 끼어 들이는 거.”

“실패 안 할 거 같아서 하는 소리인데… 그래, 알았어. 혼자 잘해봐.”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답하며 그에게 주의할 걸 물었다.

“가능하면 피를 흘리지 마. 피를 흘리게 되면 어지간해서는 걸린다고 생각해야만 해. 목격자 같은 게 없는 건 당연한 거고. 아, 또 그놈이 네 체액, 피나 땀을 먹게 해서도 안 돼.”

그의 조언을 하나씩 메모한 후에 헤어졌다.

* * *

곧 있으면 떠날 아카데미였고,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이곳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난 근처에 여관 하나를 빌려 이곳에서 생활했다.

카르테아를 죽이겠다고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할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그 근거는 이거였다.

“하아….”

내 오러 블레이드가 불안정한 이유를 찾았다. 그건 오러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오러의 활용이 문제가 아니라 오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이를 보완할 방법은 오러를 강화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다시금 오러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분노제를 복용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오르며 화를 끌어냈다. 그 감각에 집중하며 칼을 뽑아 오러를 빚었다.

우우웅.

아직은 부족했다. 칼을 휘두르는 순간 오러가 흩어졌다. 하지만 방법을 찾았다.

오러를 강화하는 것.

마나의 위력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마나 유동의 동력은 분노제뿐이 아니었다. 하나 더. 내 본래에 감정이 있었다. 카르테아를 떠올리면 이게 차근차근 부풀었다.

후우웅!

색이 짙어진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오러가 공기를 찢으며 진동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칼끝이 카르테아를 향한다면 이보다 성능이 발전할 것이다.

“이거면 될 거야.”

냉각제를 마시며 오러의 점검을 끝냈다. 이제 계획을 짤 때였다. 카르테아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일지.

비숏을 활용한다면 카르테아를 죽일 시기와 위치를 고르는 데 자유가 생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비숏의 호출이라면 카르테아도 간단히 응할 것이다.

남은 건 방법.

기척을 숨긴 채 대기하고, 카르테아가 변신할 새도 없이 오러 블레이드로 베어 죽인다.

“역시 심장보다는 목인가. 아니 심장이 나을 수도 있어.”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이상 갈비뼈를 두부 자르듯 가를 수 있었다. 찌르는 것과 동시에 심장을 관통하는 셈이었다.

“차라리 뇌를 노릴까….”

여러 책을 찾아 읽어도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사람들을 직접 죽여가며 실험할 수도 없는 일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검사의 수준마다 급소를 공격하는 속도와 그 깊이 따위가 다르니, 정보를 신뢰하기도 어려웠다.

“그래. 목으로 하자.”

난 사람의 심장을 찔러본 경험이 없었다. 심장의 위치야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목표물이 나을 듯했다.

목. 목. 목이다.

카르테아의 목을 찔러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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