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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18화 (118/125)

제119화

비숏은 카르테아를 죽이기 위해 라파엘에게 협조하는 데 동의했다.

일을 모의한 게 걸리는 순간 그녀까지도 대역 죄인이 되는 게 확정이었으나 라파엘의 말을 듣고는 설득됐다. 계획을 들어보니 실패할 것 같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꼭 필요한 일이었다.

-카르테아를 죽이지 않으면 네 삶을 빼앗기게 될 거야.

라파엘의 입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튀어나왔다. 더는 남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카르테아를 뿌리치기 위해 라파엘과 머리를 맞대고 수를 냈다. 그녀는 그 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먼저 카르테아를 만났다.

카르테아는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대가 먼저 날 찾다니 별일이로군.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러나?”

억지로 표정을 만드는 것.

비숏이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라파엘과 연습한 대로 안면 근육을 움직였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면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황태자님께서 주신 제안을 생각해봤습니다만, 역시나 제게는 무리일 듯합니다. 황태자님께서는 이미 이전에 마음을 주신 분이 있지요. 그분과의 경쟁에서 제가 살아남을 리 없습니다.”

“경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알아듣게 말해봐.”

모르는 척 말을 하면서도 카르테아의 얼굴에 웃음꽃이 번졌다.

표정이 활짝 피면서 눈과 입이 원을 그리듯 휘어졌다.

“황태자님께서 주신 제안에 응할 수 없는 건, 그 실현 가능성 때문입니다. 제가 어찌 황태자님의 배우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 있는데요.”

카르테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순간 고민했다.

프리실라를 내치겠다고 거짓말이라도 내뱉을지 그게 아니면 다른 제안을 할지 말이다.

프리실라를 쳐내겠다고 답한다면 비숏은 뭐라고 할까.

똑똑한 척하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 증거를 요구하거나 혹은 바로 실행에 옮기기를 바랄 듯했다.

그러면 곤란했다.

퓨어문 가문에서 그녀에게 무슨 압박을 가했는지 혹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일이 몹시 어려워지리라 직감했다.

‘확실하게 해야 한다.’

카르테아는 비숏과 프리실라를 놓고 저울을 기울였다. 무게추가 요동쳤다. 둘을 모두 원했다.

‘내가 황제에 오른 후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일이야.’

어중간한 태도로 일을 질질 끄는 게 어떨까 고민했다. 황제가 된다면 개인적으로 비숏을 만나고 하는 게 어려워지기는 해도 지금처럼 쉽게 거부하기는 어려울 거다.

‘아니, 그때가 되면 얼굴 볼 일이 더 줄어든다. 주변의 눈치도 더 살펴야 하지. 할 거라면 지금 기반은 다져야 해.’

카르테아는 느린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무얼 하면 내 뜻을 알아주겠는가?”

“제가 황후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또 황후가 된 후에 제 삶도요.”

카르테아는 생각했다. 비숏은 자신이 없어도 살길이 열려 있었다. 사람을 풀어 뒷조사를 해보니 귀족일 뿐만 아니라 제 나름대로 일을 해 수익을 벌고 있었다. 한 명의 귀족 영애가 벌어들이는 돈이라 친다면 그 액수가 컸다.

황후라는 자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소득이었다. 반면에 프리실라는 달랐다.

카르테아가 버린다면 프리실라는 그대로 시궁창에 떨어진다.

‘비숏을 먼저 챙기는 게 맞아. 어차피 프리실라는 나를 떠나지 못해.’

“내가 그간 프리실라와 친밀하게 지냈던 건 사실이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대에게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을 거라는 걸 증명해 보이지. 뭐든지 해주겠네. 원하는 걸 말해보게나.”

비숏은 다시 한번 연습했던 표정을 꺼내 들었다.

라파엘도 비숏이 이런 분야에 재능이 있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아 간단한 가면을 준비했다.

입꼬리를 잡아당기고 눈을 접었다. 흔한 표정이었는데, 비숏이 꺼낸 적은 없는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 말씀해주니 마음이 놓입니다.”

비숏은 라파엘과 합의했던 사항을 꺼냈다.

카르테아를 밖으로 빼낼 것. 가급적이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제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이를 보러 와주시겠습니까?”

“그곳이 어디든 그리 하지.”

카르테아는 단호하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 * *

나는 비숏에게 카르테아를 유인해달라고 부탁하며 주의해야 할 점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우선은 카르테아가 주변에 제 위치를 알리지 말게 할 것. 카르테아가 죽었는데, 비숏에 부름을 따랐다는 게 퍼지면 일이 귀찮게 되었다.

그다음으로는 혼자 오게 할 것. 카르테아의 사람이 목격자가 된다면 그자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살생을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뒤로는 자질구레한 것들 몇 가지.

나는 이안의 도움으로 텔레포트를 사용해 미리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아카데미에서 마차를 타고 두세 시간은 걸릴 곳에 위치한 산의 중턱이었다.

나무가 무성한 수풀에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해 카르테아를 죽인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해야지만 낼 수 있는 흔적을 바위 등에 새길 계획이었다.

현재 제국에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소드 마스터는 딱 둘이었다. 그 둘은 이곳에서 퍽 떨어진 장소에서 자기들 일 열심히 하고 있으니 범인으로 몰릴 일은 없을 거다.

범인은 이종족 쪽으로 몰도록 유도했다. 그중에서도 엘프. 그들이 즐겨 사용한다는 약초 따위를 주변에 흩뿌려놓았다.

지난번 카르테아가 소드 마스터 엘프와 싸운 일도 있으니 또다시 그들 사이에 소드 마스터가 나타났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죽은 소드 마스터의 복수를 위해 어느 엘프가 암습했다고 생각해주지 않을까?

나는 숨을 죽인 채 비숏과 카르테아를 기다렸다. 은신 따위를 전문으로 배운 적은 없어 가볍게 요령만 습득했다. 그래도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카르테아 또한 마나를 다루거나 은신을 익힌 적은 없으니 이거로도 족할 거다.

‘왔다.’

비숏은 연습해둔 동선대로 카르테아를 안내했다. 그녀는 준비해둔 장치에 시동을 걸었다. 땅에서 두두둑 물줄기가 솟았다. 땅에서부터 하늘로 물줄기가 솟으며 분수처럼 물을 뿌렸다. 나무 사이로 무지개가 걸린 걸 보고 카르테아가 말했다.

“마법인가?”

“아뇨, 연금술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죠. 지맥과 수맥을 흔들어 물줄기를 끌어당긴 것입니다. 저는 만약에 황실에 발을 들이민다고 해도 이런 일을 계속할 겁니다.”

카르테아는 피식 웃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걱정할 거 없어. 황가에서 지원해주지. 그대는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야.”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카르테아의 시선을 끌어모을 수 있는 큰 거.

땅에서 땅이 솟았다. 이건 연금술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이안으로부터 아티팩트 하나를 빌려왔다. 땅에서부터 기둥이 치솟으며 높은 탑을 만들었다.

이를 보며 카르테아는 입을 벌린 채 감탄했다.

“연금술로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나? 놀랍군. 새롭게 알았어.”

흐읍. 하. 흐읍. 하.

미리 분노제를 먹어둔 터라 이미 속은 열기로 가득한 채였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길게 호흡하며 몸에 산소를 저장했다. 카르테아. 저놈을 죽여야 일이 끝난다. 저놈을 죽여야 한다. 자신을 세뇌하며 감정을 부풀렸다.

미리 뽑아둔 칼의 손잡이를 한 번 어루만진 다음 오러 블레이드를 입혔다.

지이이이잉!

오러가 우는 소리를 땅이 흔들거리며 덮었다. 그와 동시에 발을 내디뎠다. 한 번의 도약으로 십여 미터를 뛰며 뒤에서부터 카르테아를 향해 칼을 뻗었다.

싸악!

검기로는 카르테아의 피부조차 뚫는 게 어려웠으나 오러 블레이드는 달랐다. 종이 자르듯 피부를 찢었고, 무언가를 가른다는 감각조차 없이 뼈를 관통했다. 살이 갈라지고, 뼈를 뚫고, 칼이 나아간다.

모든 게 다 계획대로였는데, 문제는 그거였다.

칼이 목을 뚫고 1초. 아니,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칼의 관통한 그 주위부터 파충류의 비늘이 피부를 덮기 시작했다.

칼은 이미 목을 관통했다. 이거면 죽은 거잖아. 곱게 죽어.

그대로 칼을 비틀어 목에서부터 머리를 썰려고 하던 찰나였다. 언제 튀어나온 건지 모를 꼬리가 나를 때려 날려버렸다. 나는 그대로 날아 나무에 부딪혀 떨어졌다.

“아아. 아파라.”

실패했다.

사실, 실패를 떠올려본 적이 있었다. 만의 하나라는 건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왜 이안을 불러오지 않았겠는가?

카르테아는 제 의지와 관계없이 몸에 상처를 입으면 드래곤으로 변하는 듯했다. 그랬기 때문에 목을 뚫리는 것과 동시에 변신한 것이었다.

나는 실패한 원인을 곱씹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죽음이었다. 카르테아에게 이성이 있다면 나를 제압해서 처형시킬 거고, 그게 아니면 제 손으로 죽일 거다. 내 생각에는 아마 저 발톱으로 나를 찢어 죽이겠지 싶었다.

변신한 카르테아는 확실히 전과 달랐다. 전보다 덩치가 2배쯤 컸고, 피부를 덮은 비늘도 더 촘촘했다.

“네놈이! 감히! 나를!”

그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하늘을 반쯤 가렸다. 그림자가 날 덮었다.

“죽여주마!”

분노제의 영향인지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몸은 뜨거웠다. 발악이라고 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치켜들었다.

카르테아가 다가온다. 하늘에서 운석이 나를 향해 떨어지는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날개를 파닥거린 카르테아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내게 추락했다.

그 방향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치켜들었다.

쿠르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등신 같은 놈.”

이안은 똑똑해서 내가 실패할 줄 알았던 듯했다. 하지만 똑똑하지만은 않았다. 이안은 멍청해서 여기에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쿠르릉! 쿠르릉!

거듭해서 벼락이 떨어졌다.

“내가 말했잖아. 도와준다고. 내가 도와주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걸 그렇게 무시하더니 뭘 하는 거야, 이 등신 같은 놈. 웃어? 이게 웃겨?”

그의 말에 입가를 만져보니 더 이상 찢어질 수 없게 휘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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