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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19화 (119/125)

제120화

“와줘서 정말 고맙다.”

이안이 이 자리에 얼굴을 비춘 건 내 탓이었다. 미덥지 못한 나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황태자를 시해하는 것, 성공하더라도 들킨다면 대역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이 썰려 죽는다. 이안은 이를 감수하고 나를 도우러 이곳에 와서 벼락을 떨어뜨렸다.

내가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건 그래서였다. 나를 죽이고자 달려든 카르테아가 거듭해서 벼락을 맞고는 몸을 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맞았으면 한 번에 죽었을 벼락을 맞고도 카르테아는 몸을 절었을 뿐 멀쩡했다. 벼락은 카르테아의 비닐에 막혀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흔히들 드래곤을 마법의 주인이라고 칭했다. 어느 종족보다 마법을 잘 쓸뿐더러 어마어마한 항마력을 지닌 탓에 마법으로는 타격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걸 눈앞에서 실감했다.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저놈을 상대로 유효타를 먹이긴 어려울 듯했다. 내가 해야 한다.

나는 비숏에게 걸리적거리지 않게 도망치라 부탁한 후에 칼을 치켜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입은 칼이 우웅 울었다.

이거라면 할 수 있다.

여태껏 오러 블레이드로 가르지 못한 게 없었다. 이를 사용한다면 드래곤의 비늘이라도 가를 수 있었다.

문제는 칼질을 맞추는 게 가능하냐는 점이었다.

저 육중한 크기의 괴물은 신기할 만큼 쾌속하게 비행했고, 빠르게 움직였다. 카르테아가 정신을 차리고, 이대로 황궁으로 도망친 후에 나와 이안을 고발하기만 해도 우리는 처형이었다.

다행히 흥분한 카르테아는 그 생각을 못 하고 직접 우리를 죽이려 했는데,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처리해야만 했다.

역시나 문제는 그 방법. 저 거구를 어떻게 죽인다는 말인가?

한참 머리를 굴리는 틈에 카르테아가 역으로 접근해왔다. 감전에서 벗어난 그는 날개를 펄럭이고는 수직으로 하강했다.

이안이 그를 노리고 불덩이를 쏘았다. 거대한 불덩이는 카르테아와 부딪혀 폭발하더니 연기처럼 번지며 카르테아를 휩쌌다. 그러나 카르테아의 비닐조차 그을리게 하지 못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카르테아를 향해 칼을 들어 올렸다. 그가 소드 마스터에 오른 엘프와 싸웠던 걸 기억했다. 그는 5분도 걸리지 않아 소드 마스터를 쓰러트렸다. 물론, 그건 상대의 방심이 있었기 때문에 터진 참사였으나 그의 대인 전투력이 괴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쿠우우우욱!

카르테아가 날 향해 접근하며 묵직한 손을 뻗었다. 나는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막고자 했는데, 카르테아는 이를 무시하고 손을 쑤셔 넣었다.

오러가 손을 가르고 파고들었는데, 카르테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 몸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네놈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게 눈에 보였거든. 나비에 때부터 너를 죽이고 싶었지. 내 감이 틀리지 않았어.”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이렇게 제대로 땅바닥에 내다 꽂힌 건 처음이었다. 척추가 부러지지 않은 게 용했다.

오러 블레이드는 차근차근 카르테아의 손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테아는 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지난번보다 성장하며 재생력이라도 생긴 듯했다.

카르테아는 내 몸에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그의 급소라도 찔러야 멈출 수 있을 거 같았는데, 거리가 멀었다. 체온이 내려간다.

그때 카르테아의 머리가 뒤로 꺾였다.

땅에서부터 비석이 올라오며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잠시 생긴 틈으로 바닥을 굴러 도주했다. 배에 뻥 뚫린 구멍에 포션을 들이부었다.

이를 본 이안이 말했다.

“등신, 절대 실패 안 한다더니 그건 왜 챙긴 거야.”

“항상 만약을 대비해야지. 사실 무조건 성공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100번쯤 하면 1번은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알았지.”

“근데 왜 날 안 부른 건데?”

“친구잖아.”

배에 뚫린 상처가 너무 컸다. 나는 더 싸우기 힘들 듯했다. 이안의 말대로 등신인 듯했다.

“내가 할게.”

이안은 마법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규모가 큰 마법 같았다. 눈 안에 발광체가 있는 듯 붉은색 빛을 뿜었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나며 꿈틀거렸다.

땅에서부터 돌덩이가 솟아올랐다. 지난번에 카르테아를 때려잡았던 그 기술이었는데, 바위의 크기가 더욱 컸다.

이미 원작과는 많은 게 달라졌다. 카르테아는 원작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드래곤으로 변하는 것. 이안도 그랬다. 원작에서 읽었던 묘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냈다.

땅이 쪼개지고 나무가 뽑혔다. 갈라진 땅을 뜯어내 카르테아를 향해 쏘았다. 무시무시한 크기였고, 속도였다.

쿠우웅! 쿠우웅!

자그마한 건물을 들어 던지는 듯한 위력의 충돌을 카르테아는 거듭해서 맞았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땅덩어리에 맞을 때마다 크게 휘청이며 추락했으나 그게 다였다. 이런 충격으로는 그를 죽이기는커녕 뼈를 부수지도 못했다.

-크아아아아아!

카르테아가 울었다. 귀를 찢을 듯한 소음에 몸이 멎었다.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죽여주마!”

카르테아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나를 내버려 두고, 이안을 먼저 상대하고자 움직였다.

“등신 같은 놈. 넌 나한테 평생의 빚을 진 거야. 갚으라는 건 아닌데, 알고 있으라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말 잘 들으라고. 이런 등신짓은 그만하고.”

이안은 눈에 빨간 액체가 맺혔다. 새빨간 눈에 눈물이 반사된 걸 수도 있었고, 그냥 피일 수도 있었다.

“검술보다 마법이 낫다는 걸 보여줄게. 이 천하제일의 마법사가. 마법의 꼭대기에 서면 뭘 할 수 있는지 구경시켜 줄 테니까, 잘 봐.”

그건 염동이었다. 마나를 사용해 외부에 힘을 가하는 것. 사용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마법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써먹지는 못해도 쓰기만 하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었다.

카르테아는 외부 마나에 저항력이 있었다. 때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물리력을 가진 마법뿐이었다.

꾸드득. 꾸드득.

이안은 염동으로 카르테아를 구겼다. 신문지로 공을 만들어 빡빡하게 누르듯 카르테아에게 염동을 가했다. 넓게 펼쳤던 카르테아의 날개가 접히고, 길게 뻗었던 팔과 다리를 몸통에 찰싹 달라 붙었다. 믿을 수 없는 마법에 이안을 흘겼다.

이안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만 보여왔다. 그건 그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는데, 그걸 나 때문에 내려놨다.

미안했다. 아주 미안했다.

내 등신짓 때문에, 그의 말대로 내가 등신이라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는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뭐라도 돌려줘야겠다. 살아남는다면.

몸을 일으켰다. 포션은 출혈을 멎게 해주는 데서 그쳤다. 내 몸은 구멍이 뚫린 그대로였는데, 카르테아를 향해 뛰었다.

이안은 기가 막힌 마법으로 카르테아를 제압했는데, 한계가 있었다. 저걸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또 저거로 카르테아를 죽이는 거까지는 무리였다.

마지막은 내가 해야 한다.

왼손으로 몸에 내용물이 안 쏟아지게 잘 막은 후에 힘껏 뛰어올랐다. 카르테아의 정면까지 뛰어오르자 발판 같은 게 느껴졌다.

이안이 만들어준 거겠지.

한 번에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데, 카르테아를 제압하면서 여기까지 신경 써준다니 신기했다.

고마운 마음으로 발판을 밟고 다시금 뛰어올랐다. 카르테아의 목이 보였다. 두꺼웠는데, 가만히 있으면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른다. 카르테아의 목을 친다.

오러 블레이드는 베지 못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힘껏 도약하며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카르테아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 * *

카르테아의 꼬리에 맞고 나가떨어질 때까지만 해도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안이 도우러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뭔가 되겠구나, 하는 것보다도 어딘가 신기하다는 감정이 더 컸다. 마법으로 카르테아를 어찌하기는 힘드니까.

‘완전 괴물이 따로 없었지.’

그만큼이나 이안이 보여준 힘은 굉장했다. 제국 전체로 놓고 봐도 가장 강할 게 확실했다.

“살려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말하지 마. 너 말할 때마다 배에서 나온다.”

“응.”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나름대로 외딴곳으로 카르테아를 불러오긴 했어도 민가에서 무지막지하게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워낙 요란하게 싸워댔으니 사람이 올지도 몰랐다. 그 전에 주변을 정리하고, 카르테아의 시체를 치워야 했다.

거대한 카르테아의 시체.

저걸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는데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돌아다닐 텐데 땅에 묻기도 어려웠고, 묻을 땅도 마땅치 않았다. 제일 좋은 수는 불로 태우는 것인데, 항마력이 뛰어나 어지간한 불길로는 그을리지도 않았다.

해서 바로 카르테아의 시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일단은 보관하기로 했다. 이안은 시체를 들고 어딘가로 텔레포트 한 후에 혼자 돌아왔다.

카르테아의 시체는 치웠다. 남은 건 우리가 만들어낸 참사였다.

주변에 나무가 다 뽑혀 나갔고, 큰 규모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갈라지고 부서졌다.

“다 부숴야 해.”

“응?”

“이렇게 어중간하게 부순 것보다는 차라리 다 부수는 쪽이 나아.”

이안은 나를 멀리 치워놓은 다음에 산을 무너뜨렸다. 싸우는 중에 내가 땅에 피를 흘렸고, 주변에 마나의 흔적이 너무 많이 묻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산을 위에서부터 부수며 불을 일으켜 나무를 다 태웠다.

불타는 나무와 무너지는 산을 확인한 후에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해 그의 마탑 개인실로 이동했다. 그는 포션을 가져와 내 배에 부었다.

“신관한테 가자.”

“안 돼. 황태자가 실종된 직후에 내가 크게 다쳤다는 게 알려지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올 거야. 한동안은 이거로 버텨야지.”

“그러다 죽어.”

“안 죽어.

잠시간 입씨름을 했는데, 이안이 콧방귀를 끼더니 말했다.

”내 말 잘 듣기로 했잖아.“

나는 가면을 쓴 채 신관을 찾는 것으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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