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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20화 (120/125)

제121화

나는 내가 똑똑한 줄 알았다. 누구나 자기 자신한테는 관대한 법이니까, 또 그게 아니라도 나 정도면 충분히 영특하다고 자부했다.

이안한테 포션으로 때우겠다고 말했던 건 신관을 찾는 과정이 번거로워서였다. 아카데미에는 보건교사 느낌으로 언제나 신관이 한 명 대기했는데, 이건 아카데미가 특별한 경우였다.

워낙에 귀족들이 넘쳐나고, 또 때론 카르테아나 아가레스 같이 귀중한 황족이 재학하는 탓에 신관이 상시 대기하는 거지 어지간해서는 치유를 사용할 수 있는 신관은 보기 드물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텔레포트가 있었다. 난 가면을 쓴 채 어느 신관에 들려 몸을 치료받았다.

“어쩌다 이런 상처를 입으신 겁니까?”

신관은 내 뱃속에 손을 넣은 채 말했다. 누구인지 안 묻는 걸 보아하니 꺼림칙한 사람인 걸 아는 듯했다. 나는 목소리도 남기는 게 거북해 입을 다물자 신관도 말하기를 관두고 치유에 전념했다.

신관을 찾아 치료를 받으니 배에 생겼던 구멍이 금세 메꾸어졌다. 살가죽으로 덮인 복부를 쓰다듬으니 어딘가 우스워 실실 웃음이 나왔다.

다시 텔레포트를 사용해 복귀한 후에 이안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 하기를 잘했어. 텔레포트를 쓰면 되는 거였네.”

“네가 멍청해서 그래.”

“아니, 텔레포트를 쓰면 된다는 걸 까먹은 거야.”

“네가 멍청하니까 까먹는 거지.”

툴툴거리는 이안을 흘겼다.

“그러는 너는? 너도 멍청한 짓 했잖아. 날 왜 도운 거야? 너도 죽을 뻔했는데.”

이안은 가소롭다는 양 웃더니 대답했다.

“내가? 그놈한테?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너 없이도, 나 혼자서도 잡을 수 있었으니까 도운 거야. 아무것도 아닌 놈한테 빌빌거리고 있는 꼴이 우스워서 도와준 거라고.”

“그래… 고맙다. 구해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네 덕에 살았네.”

이안의 도움으로 카르테아를 죽였다.

여기에 떨어지고서 가장 험한 고개 하나를 넘은 셈이었는데, 아직 앉아서 쉴 시간이 아니었다. 카르테아의 실종 혹은 사망이 알려지기 전에 처리할 일이 많았다.

이안에게서 받은 도움을 보답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 후 바로 아가레스를 찾아 잉그레드로 떠났다.

잉그레드에 농경지는 풍족했다. 아직 수확물을 거둘 시기는 멀었으나 놀고 있던 땅 대부분이 농경에 들어섰다. 그게 어딘가 새로웠다.

“영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경계를 서던 어느 상비군의 안내를 받아 아가레스를 만났다. 그는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결국에야 저질렀군. 그래, 황태자를 직접 소감이 어떤가!”

“소감이라니, 그런 건 됐습니다. 어쩌다가 하게 된 일이죠. 기회가 닿아서요.”

“자네는 내가 사람 죽이기를 가볍게 여긴다고 그리 욕하더니만, 자네도 다를 게 없어. 크흠! 안 그런가?”

“예, 맞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셔야 합니다.”

“아아. 그야 물론이지.”

아가레스는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자네와 했던 약속은 잘 기억하고 있어. 한 번도 욕심내본 적 없는 자리지만, 공석이 됐고 누군가는 차지해야 한다면 내가 되는 게 낫지 않겠나?”

아직은 카르테아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은 채였다. 사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드물었다. 그럴 게 그는 소드 마스터조차 단신으로 죽인 괴물이지 않은가? 누군가의 손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현재는 단순한 실종 상태.

실종된 이가 곧 황제에 오를 황태자이기 때문에 소란스럽기는 해도 그가 죽었을 거라 걱정하는 이는 드물었다.

“남들이 잠잠할 때 빨리 움직이는 편이 이롭지.”

아가레스가 지닌 힘은 컸다. 단신의 무력을 제하고도 많은 수의 상비군을 거느렸고, 지닌 봉토 또한 넓었다. 그러나 황위 계승 순위에는 밀려나 남들보다 먼저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한동안은 바빠지겠어.”

“예, 고생 좀 하시겠습니다.”

아가레스가 황제에 오르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계승 순위를 무시하고 자리를 차지하려면 만족해야 할 조건이 많았다. 순위가 높은 황족 본인이 자리를 포기해야 했고, 여타 황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오래간만 황궁으로 돌아가겠어.”

한동안 아가레스는 만나는 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설령 그가 황위에 오른다고 해도 그 후 수습에는 많은 인력이 소모되었다.

“자네는 이제 어쩔 건가?”

“영지로 돌아갈 겁니다.”

하고자 했던 일을 모두 끝냈다. 비숏과 화해했고, 그녀가 내 약점을 잡듯 남겨둔 부탁까지 들어주었으니 그 어떤 후환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꽤 예전에 했던 일이지만, 영주 자리를 지켰고, 확고하게 다졌다.

이젠 내 세상이었다.

“좀 쉬어야죠.”

“하.”

아가레스는 콧방귀를 끼더니 머리통을 반쯤 눕히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한테 일거리를 그렇게 떠넘기고 자네 혼자 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자네 영지에서 마음 고생하며 기다리게. 내가 언제 찾아갈지 모르니. 그때는 북부의 대공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로 갈 터이니 잘 모셔야 할 거야.”

* * *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맞아, 살아서 보니 반갑네. 잘했어. 도망 빨리 잘 치더라.”

그때 카르테아가 드래곤으로 변하고,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비숏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걸리적거리지 않게 도망치라고만 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내 말을 들은 즉시 도주했다.

보통 같으면 그래도 남아서 자기가 도울 순 있는 건 없을까?

혹은 정말 자기 혼자 도망쳐도 괜찮은 걸까, 염려하며 제자리에서 주춤거리기 일쑤였는데, 비숏은 내 말을 들은 즉시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신속한 판단이 있었던 덕에 싸움이 조금은 더 수월했다.

“죄송합니다.”

내 칭찬에 비숏은 눈을 깜빡이더니 머리를 숙였다.

“저 혼자 몸을 내빼다니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때는 그쪽이 더 이성적인 선택으로 보였는데….”

“아냐아냐. 비꼬는 거 아니라 진심으로 칭찬하는 거야. 보통 같으면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러도 조금쯤은 머뭇거릴 텐데, 너는 바로 뛰쳐나갔잖아. 그거 대단했어.”

“어… 예, 감사합니다.”

비숏은 곁눈질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제가 조심해야 할 게 있을까요? 이번 일과 관련해서요.”

“음…. 남한테 말하고 다니지만 않으면 돼.”

“그거야 당연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어쩌면 이번 만남이 내가 비숏을 보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제 그녀와 나의 활동 반경은 조금도 겹치지 않았고, 친구라고 칭하기에는 친분이 부족했다.

“네 부탁은 들어준 게 맞지?”

“물론입니다. 몹시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아카데미는?”

“졸업까지 할 겁니다. 연금술 협회에서 상을 받은 이후 몇 연구소에서 불러주고 있는데, 제 실력을 더 키우고 싶어서요. 당신은요?”

“알잖아? 나는 이미 자퇴한 몸이지.”

비숏은 심호흡하며 공기를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다음에 들이쉰 숨을 그대로 다 토해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악연도 있었지만, 당신 덕분에 배우고 싶었던 일, 하고 싶었던 일에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제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셨던 것 또한 감사드립니다.”

비숏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이제는… 당신도, 당신의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든 후에 답했다.

“고마워.”

* * *

“네가 한 거지?”

카르테아의 실종이 알려진 후 2주가 지나서였다. 카타리나는 단걸음에 나를 찾아와 말했다.

“네가 죽인 거지?”

그녀의 진지한 물음에 억지로 표정을 꾸몄다. 어색하지 않게 조심해서 입꼬리를 당기고 눈을 휘었다.

“혹시 실종된 황태자님이 암살당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하하, 재밌는 의견이네요. 누가 그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면 됐어. 믿을게.”

카타리나는 내게 손바닥을 보였다. 굳은살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생기고, 쉽게 사라진다. 그녀가 오랜 시간 칼을 놓았다는 게 보였다.

“너는 말이야, 강해지는 게 목표가 아닌 놈이잖아? 언제나 그걸 수단이라 생각했지. 그런 놈이 항상 뭔가에 쫓기듯이 검술에 집착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번 일을 듣고 너라고 생각했지.”

“제게 그럴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흠…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 이종족 중에서도 소드 마스터가 나왔고, 황태자님께서 직접 때려죽였다는 거. 그런데 그건 드래곤 상태일 때잖아. 인간일 때 암살하는 거라면 너라고 못 할 게 없지.”

카타리나는 나를 추궁하면서도 내가 범인이 아니길 바라는 듯했다. 카타리나에게 진실을 말해도 될까? 그녀에게 사정을 잘 설명한다면 그녀도 날 이해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만약을 조심하며 살았다. 그 누구에게 발설해도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나는 카타리나의 손을 꽉 쥔 후에 놓았다.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그렇게 알아주십시오.”

“왜 그런 건데? 아니, 필요해서 한 일이겠지.”

카타리나는 내 등을 툭툭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래.

그녀에게 꼭 보여줘야 할 게 있었다.

“가시기 전에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시죠.”

내게 허리춤에서 칼을 뽑자 카타리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어. 나 칼 놓은 지 오래 됐는데, 널 가르치긴 뭘.”

“그런 거 아닙니다.”

카르테아를 죽이고도 시간이 지났다. 그를 상대하며 완벽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었고, 사용한 경험이 축적되어 이제는 분노제를 먹지 않고도 오러를 흉내 내는 것쯤은 가능했다.

전에처럼 오러를 만들어 휘두르는 건 불가해도 생성만은 해낼 수 있었다.

우우웅!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울자 카타리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기겁했다.

“미친놈.”

역시나 좋아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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