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오러를 쓸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지금 분위기가 워낙 흉흉해서 남들한테 자랑하기는 어려운데, 그래도 스승님한테는 보여드리는 게 예의 같아서요.”
“언제부터였어?”
“며칠 됐습니다.”
“대충 보니까 전에 검기처럼 온전한 오러는 아닌 거 같은데. 맞지?”
카타리나는 손에서 칼을 놓은 지 꽤 됐을 텐데 아직도 안목이 예리했다.
“예, 남한테 휘두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오러가 약해서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지. 오러를 휘두를 수 있게 되면 뭘 할 거야?”
“하하… 할 수 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두려고 합니다. 꼭 뭔가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지. 고요한 시기니까.”
조금만 더 발전하면 완벽한 소드 마스터에 오르는 셈이었다. 그러면 뭘까? 내가 어느 기사단을 창설하거나 할 것도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 여기에 떨어져서 검술을 익혔던 건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였다. 살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에 가야만 했고, 아카데미에 가게 되면 온갖 무시무시한 놈들이 득실거리니 그놈들과 부대껴 살아남기 위해 검술을 배웠다.
카타리나가 말한 것처럼 내 검술은 수단이었는데, 목적을 이뤘으니 더는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재미가 없다면.
“네가 아가레스 대공과 친분이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너무 믿지는 마. 한동안은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남들 눈에 띄지 말고.”
“예, 충고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카타리나는 내게 몇 가지를 더 물었고, 몇 가지를 더 충고한 후에 떠났다.
* * *
나비에는 아카데미를 자퇴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시금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막 이곳을 떠날 시기에 불쾌한 일을 몇이나 겪은 터라 건물에 발을 들이미는 것만으로도 싱숭생숭했다.
그녀는 조용히 연금술 학부의 건물을 찾아 비숏을 만났다.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그때 일은 제가 정말 미안해요.”
“무슨 일입니까?”
“같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뵈었어요.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나비에는 여러 곳에서 연금술사들을 만나 향수 제품을 만드는 것과 관련해 토의했는데,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우선은 원하는 향을 정확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획일적인 방법으로 향을 만들어내어도 만들어낼 때마다 조금씩 향이 다르고는 해서 상품으로 판매하기 곤란했다.
다음으로는 향의 지속성이었다.
무도회 등과 같은 자리에 참석하는 이들을 타겟으로 만든 제품이라 적어도 4시간, 가능하면 8시간은 향이 지속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의외로 어려웠다.
향을 강하고 거칠게 만들수록 오래 갔는데, 이 경우 막 향을 발랐을 때 그 냄새가 지나치게 세 오히려 불쾌감을 자아냈다.
막 학부를 벗어난 연금술사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했고, 이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이들은 무리한 걸 요구해댔다.
해서 남은 게 비숏이었다.
아직 학부생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실력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아직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니 몸값이 쌀 거라는 계산은 덤이었다.
“저랑 같이 일해보는 게 어때요?”
비숏은 나비에가 가져온 종이들을 한 장씩 천천히 넘겼다.
나비에를 앞에 앉혀둔 채로 한참 동안 문서를 읽은 후에 종이들을 한 대 모아 책상에 탁탁 쳐 정리하고는 답했다.
“나쁜 제안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도 알겠습니다. 과거 있었던 일을 묻어두고 일과 관련된 일만 이야기해보자면, 우선은 저도 이전에 찾아가셨던 연금술사들만큼의 권리를 받고자 합니다. 제 기술이 그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아하하, 그야 당연하죠.”
비숏의 반응은 나비에의 예상보다 배로 호의적이었다. 자신을 제대로 된 연금술사로 인정해줬다는 점에서 점수를 딴듯했다.
더군다나 비숏은 나비에가 이전에 만난 연금술사들이 무엇을 요구했는지 알지 못하는 터였다. 비숏이 말하는 비율이나 권리는 귀여운 수준이었던지라 나비에는 군말하지 않고 동의했다.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같이 일하게 돼서 기뻐요.”
“분발하겠습니다.”
“네! 우리 꼭 성공해요.”
원하던 만큼 호구 잡지는 못해도 괜찮은 조건으로 계약을 얻었다. 비숏은 현재 집중하고 있는 일이 없는지라 향수를 만드는 일에 바로 몰입하겠다고 했다.
“고마워요.”
나비에는 웃으며 제 영지로 복귀했다.
돈이 필요했다.
카르테아와의 파혼을 대가로 요구했던 것 중에 상당수는 이미 받아내었으나 대부분이 가문의 장기적인 이득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그녀 본인이 얻은 재물은 적었으니 홀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어올 구멍이 여럿 찾아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영지, 베치아로 돌아가 바삐 움직였다.
다소간 소원했던 영애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모임에 참석하며 친목을 다졌다. 제품을 만들어낸 후에 급하게 찾으면 눈치가 보이니 미리미리 모임 등에 끼어들어 얼굴을 비추었다.
신분이 귀하거나 발이 넓은 영애들을 상대로 제가 하는 일을 설명하며 완성한 후에는 선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반응은 좋았다. 그렇게 생활하는 중에 라파엘이 찾아왔다. 그는 최근에 암암리 돌고 있는 황태자의 실종과 관련해서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무거운 일인지라 그녀는 남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라파엘을 끌었다.
직접 챙긴 다과를 라파엘에게 건내며 말했다.
“황태자님을 직접 죽이신 건가요?”
카르테아의 실종과 관련해 문제가 차츰 커지고 있는 시기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카르테아가 죽은 게 아닌가 하고 소문이 돌았다. 특히 카르테아와 싸움을 벌였던 장소가 거론되었다.
이안이 뒤처리를 깨끗하게 한 덕에 마나와 관련된 흔적을 남긴 건 아니었어도 하루 사이에 산이 부서졌다. 단순히 산사태가 내린 게 아니라 지형 자체가 무너졌으니 이상하게 볼 법도 했다.
“비슷해.”
라파엘이 카르테아와 싸웠던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설명하니 나비에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정말 증오하기는 했는데 제 손으로 복수하고 싶기도 했고. 시원하기는 한데, 제가 공들이고 시간을 쏟아부었던 일이 망가졌다는 게 실감이 나서요.”
“나도 하고 싶어서 했던 건 아니야. 필요했으니까 한 일이지.”
“네….”
“너는 어떻게 지내?”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를 기억하세요? 향수요. 그걸 만들어 파려는 고 애쓰고 있죠. 이거 좀 맡아보세요.”
나비에는 시제품이라며 쌀알 크기의 물건을 라파엘에게 내밀었다. 분사하는 액체가 아니라 피부에 비비면 자연스레 녹아들어 향을 남기는 식이었다.
“참, 그리고 비숏 양과도 화해했어요.”
“어떻게?”
“제가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했죠. 그리고 같이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비숏 양도 좋다고 했고요.”
라파엘은 나비에의 이야기를 들으며 건네준 물건의 냄새를 킁킁거렸다.
무겁고 부드러웠다.
아직 이런 물건이 시중에 도는 게 아니라 냄새 자체보다는 그 지속성 따위가 더 중요한 시점이라 무어라 평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그냥 기분 좋아지라고 좋다는 말을 몇 번 해줬다.
“저는 이렇게 살 거 같아요. 결혼 같은 거 안 하고요. 가족들과 이야기도 해놨어요.”
“그래?”
“네. 부모님 두 분 모두 완강하게 반대하셨는데, 그냥 제가 그럴 거라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축하해. 네 영지가 번영했으면 좋겠네.”
* * *
어지간한 일들을 모두 끝낸 시점이었다. 나는 기대했던 일을 확인하고자 코로망에게 말했다.
“간장을 찾는 일은 어떻게 됐어?”
“오고 가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물어봤는데 소식이 없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그럴 거까지야.”
애초에 무리한 부탁이었다. 나조차도 그 흔적을 찾지 못해 맡겨둔 일이었는데, 그 결과물을 바라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간장.
내 기억 속의 음식 하나하나에 모두 침투한 조미료였다. 간장을 메주로 만들고, 메주는 콩으로 만든다는 것까지는 알아도 그 구체적인 방식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긴 삶을 살아갈까? 마나를 익힌 이들은 노화도 늦어 수명이 더 길다고는 한다는데, 100년쯤 되지 않을까?
그 시간 동안 이곳 음식 문화도 무럭무럭 발전하겠지만, 과연 간장이 나타날지는 의문이었다. 남은 세월, 맛난 음식을 먹으며 살기 위해서는 간장이 꼭 필요했다. 해서 이 세상을 빙빙 도는 한이 있더라도 간장을 찾기로 하였다.
세상의 지도를 구했다.
아직은 제국의 주변만을 간략하게 그린 물건이었지만, 이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새로운 대륙을 찾아 나선 콜럼버스의 심정이 이러할까?
“같이 가자. 너 할 일 없잖아.”
이안은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가본 적 없는 곳은 좌표를 특정하는 게 어려웠으나 항해 중에 비상 탈출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냥 전문 탐험가들한테 맡겨. 뭐 한다고 직접 가는 거야?”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같이 가자.”
“그 조미료라는 건 어떻게 아는 거야? 그깟 조미료 하나를 찾는다고 무작정 배를 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너, 너무 멍청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간장이 아니라 다른 조미료였다면 나도 이렇게 찾아 나선다고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간장은 달랐다. 내 남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꼭 필요했다.
거기다 카르테아가 실종되고 흉흉한 시기의 제국을 벗어난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었다. 곧 있으면 제국의 황제가 바뀐다. 그 자리를 놓고 다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가장 힘이 강한 건 아가레스였어도 계승 순위를 믿고, 종교를 들먹이며 버틴다면 아가레스도 곤란해졌다. 여기 머물렀다가는 내가 터트린 일이니, 협조하라며 아가레스가 귀찮게 굴 수도 있는데, 배를 타고 떠나면 이를 예방할 수 있었다.
“그래, 가자….”
간장을 구한다면 뭘 먼저 할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