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당이 되었다-123화 (123/125)

제124화

아가레스 사비 이니에스피.

황제가 된 아가레스가 새로 부여받은 이름이었다. 그는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서 나라를 통치했고, 또한 군림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후회했다.

‘괜한 자리를 맡았어.’

황제가 맡은 바 업무는 대단히 많아서 이전에 잉그레드에서 누렸던 삶보다 삶의 질이 크게 떨어졌다. 기다란 노동 시간과 주변에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감시하는 눈길이 가득했다.

더군다나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마저도 흉흉했다.

황위 계승의 순위가 밀려났던 이가 자리를 차지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아가레스였다.

안 그래도 불편한 방식으로 황좌에 앉아 기류가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가레스는 무시무시한 소문과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수발드는 시종과 하인들은 언제나 긴장하며 아가레스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불편할 줄 알았다면, 단번에 거절했을 것을.’

라파엘은 제게 이런 짐을 떠넘기고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들었다. 그 사유도 가당찮았다. 어느 조미료를 찾기 위해 무작정 배를 몰고 항해를 시작했다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귀찮은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내뺀 거야.’

마음 같아서는 그가 아니라도 괜찮을 일을 굳이 그에게 떠넘겨 고생 좀 시키고 싶었는데, 제국에 없다니 혀를 찰 노릇이었다.

아가레스는 오랜 시간 번거로운 일을 도맡았다. 황위 계승의 순위가 낮은 이가 황제에 등극하면 여러 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또 피바람이 부는 법이었다.

그간 아가레스가 쌓아온 핏물에 다들 지레 겁을 먹은 건지 수상함 낌세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을 놓아도 될 일이 아니었다.

아가레스는 황실을 휘어잡는 데 시간을 쏟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다. 그러던 중에 다시금 라파엘이 제국으로 복귀했다. 아가레스가 황좌를 단단하게 다진 시점이었다.

‘내게 귀찮은 일을 모두 내던지고, 혼자 도망치다니 혼쭐을 내줘야겠어.’

라파엘이 자리를 비운 시기에도 아이작은 빠르게 번영했다. 짧은 시간 동안 제국에는 여러 가지 문화와 물건들이 유행했는데, 어지간한 분야라면 아이작이 다 한 발씩 걸치고 있었다.

‘아는 게 많은 놈이기는 했지.’

아가레스는 이를 사유로 아이작 영지를 둘러보겠다고 발언한 후 황궁에서 몸을 빼냈다. 긴긴 업무에서의 해방이었다.

* * *

아가레스가 내 영지를 방문하겠다고 알렸다. 황위에 오른 그가 나를 호출하는 게 아니라 직접 이곳에 행차하겠다고 선언했다.

카르테아의 실종 이후 황족을 향한 호위가 강화된 탓에 대규모 부대를 거느리고 이곳으로 향했다.

전생의 군바리 시절, 사단장이 부대에 온다는 이유로 연병장에 있는 자갈까지 치우며 청소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사단장도 아니고 무려 황제였다. 어떻게 모셔야 할까? 귀빈이 방문했을 때의 대처법이라면 알고 있어도 황제가 오는 일 같은 경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건 분명 복수야.’

내가 없었던 시기의 제국은 조용하기는 했어도 평온하지는 않았다. 남들 눈치 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아가레스가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느라 고생 좀 했을 거다.

그렇게 아가레스가 고생하고 있을 동안 나 혼자 몸을 빼 편히 보냈으니 심기가 불편했겠지.

‘이를 어떻게 대처한다.’

우선 건물을 하나 새로 지었다.

이곳 저택에 가장 좋은 방은 당연히 영주인 내가 사용 중이었는데, 이곳을 아가레스에게 넘기는 건 모양새가 어색했다. 그렇다고 귀빈실 하나를 내주자니 내가 황제보다 더 좋은 방을 쓰는 골이었는데, 이또한 말도 안 될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황제를 모셔본 영주가 있다면 그를 만나 조언을 구할 텐데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없다시피 했다.

해서 차라리 속 편하게 아가레스 용으로 건물 하나를 새로 지었다. 아가레스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완성해야 하니 돈을 물 쓰듯 쏟아부어 마법사들을 데려와 작업을 시켰고, 수많은 노동자가 이곳에 붙었다.

‘거주 공간은 이거로 해결이야. 그다음은?’

영지에 상비군이라도 있었다면 이럴 때 써먹을 텐데, 그마저도 불가했다. 해서 그냥 축제를 벌였다. 아이작 영지에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시는 날을 기념해 이것저것 사들였고 뿌렸다.

또다시 돈을 바닥에 뿌리는 듯 쏟아부었는데,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서 모은 돈이었기에 아끼지 않고 썼다. 한 가지 분한 건, 영지의 시민들이 아가레스를 환영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민폐 중에서도 민폐였다. 하지만 그가 민폐를 끼친 탓에 내가 돈을 뿌리며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꼴이었으니 시민들은 아가레스를 찬양했다.

그렇게 약 2년 만에 아가레스를 마주했다.

그는 여전히 목에 모피 망토를 두른 채였는데, 그 주위에 노란색이 더해졌다. 원래는 까맣기만 했던 옷에 금색 수가 치렁치렁하니 멀리서 보면 꼭 교통 표지판 같았다.

“잘 지냈나 물어보려 했는데, 행색을 보아하니 아무 부족함 없이 잘 지냈나 보군. 거참 다행이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자네 시민들의 환호를 받아서 나도 기분이 좋네. 이왕이면 자주 방문하는 게 어떤가 싶을 정도로.”

“하하…. 예. 말씀만으로도 황공합니다.”

아가레스의 도발에 나도 소심하게나마 나도 한 가지 복수를 결심했다.

바로 중원에서 가져온 조미료를 맛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이걸 가지고 복수라 할 수 있겠느냐 싶을 수도 있겠으나 이건 크나큰 복수가 맞았다.

아가레스는 내가 제국을 벗어나 항해한 게 황제가 바뀔 때의 소란과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라 짐작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가 표명한 변명거리가 이상하지 않은가? 고작해야 조미료 하나를 찾겠다고 제 영지를 몇 년씩 비워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온갖 의문들이 머리를 잠식할 때 아가레스는 점점 더 궁금해질 거다.

과연 대체 어떤 조미료일까.

그 조미료를 이용해서 어떤 요리를 할까.

무지막지하게 그 맛이 궁금할 게 확실했다.

나는 잠시 짬을 내 주방에 가 중원에서 가져온 비법과 재료들을 숨겼다. 그 후 요리사들을 교육해 이를 아주 모르는 일로 만들었다.

“음식은 어떠십니까?”

물론, 황제에게 진상할 음식이니 그 맛과 질은 최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게 아가레스의 성에 찰까?

황실의 주방장 또한 이와 비슷한 음식을 그에게 제공했을 테니 아가레스 입장에서는 평소에 먹던 음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훌륭하군.”

아가레스는 눈썹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상다리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깔린 식탁 위의 음식들을 보고는 불만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제국을 떠나 여행한 목적이 어느 조미료 때문이라 하더군. 그런데 그걸 사용한 음식은 보이지 않으니 심심한 구석이 있어.”

“아… 간장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제가 여러 곳에 식당을 개업하고자 합니다. 해서 그곳으로 간장을 모두 옮긴 터라 제 저택에 남은 물건이 없습니다.”

나는 눈을 빛내며 아가레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붕어처럼 뻐끔뻐끔 입술을 떼었다가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렇군.”

애써 납득한 척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으나 억지로 표정을 감추었다. 여기서 웃어서 좋을 게 없었다.

아가레스는 수저를 내려놓은 채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히죽 웃었다.

“그런데, 나는 그 조미료의 맛이 궁금해서 말이야. 사람을 시켜서 가져오도록 하게나. 혹여 어려운 구석이 있으면 내 도와줄 테니 말을 하고.”

그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 당연한 걸 요구하는 듯했다. 그가 뻔뻔하게 나오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수가 있어도 그가 간장을 맛보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간장을 구해오죠.”

아가레스는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다시금 식사를 재개했다. 몹시도 분했다.

* * *

정말로 저택에 간장을 필두로 한 재료들이 없는 게 아닌 터라 다음 날 아침, 바로 새로운 음식들이 식탁을 채웠다. 이미 내 저택의 요리사들은 이러한 음식에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들이 실력을 발휘한 음식을 아가레스는 하나씩 맛보았다.

그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미소 짓는 걸 보아하니 속이 뒤틀렸다. 우리의 신경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후 나는 아가레스를 새로 지은 건물로 이끌었다. 건물은 외벽부터 반짝이며 막 지은 것이라는 티를 냈다.

이를 보며 아가레스는 다시금 웃었다.

“고맙네. 나를 이토록 환영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 내 방문을 기리고자 축제를 열어주고, 건물을 지어주다니, 내 친구 하나를 제대로 둔 듯해. 이렇게 지은 건물을 놀리고 있자니 자네도 아까울 텐데, 내 자주 오겠네.”

아가레스는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아니, 그럴 게 아니지. 잠시간 더 이곳에 머무르는 게 어떨까 싶어.”

“황궁의 일로 바쁘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어허, 괜찮네. 내가 자네에게 걱정 받을 만큼 어수룩해 보이나? 얼마나 머물지는 내가 정하기로 하지.”

내가 없는 동안 제국에서 보낸 세월이 퍽 괴로웠던 듯했다. 그가 단단히 삐진 게 명확했다. 나는 화제를 돌리고자 딴소리를 뱉었다.

“어떻게, 제국을 다스리시는 게 적성에 잘 맞으십니까?”

“어떨 거 같나?”

내 질문에 아가레스는 질문으로 답하고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고얀 놈.”

아가레스는 콧방귀를 끼더니 나를 노려봤다.

“나를 버려두고 홀로 도망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제국을 떠나 항해한 건 도망친 게 아닙니다. 그 결과물을 맛보셨지 않습니까?”

“그야 독특하기야 하더군. 다른 뭔가로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예, 그렇습니다. 저는 대공님을… 아니 폐하를 내버려 두고 떠난 게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간장 때문이었던 거죠.”

“이런 자리에서까지 거짓말을 하기는. 자네가 괘씸해서라도 한동안은 여기 머물러야겠어. 음식 맛이 퍽 좋더군, 그래, 그 중원이라는 곳에서 가져온 술도 있다지? 오늘 점심은 그 또한 기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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