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무공이라는 기술로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손 대신 발로 걸어 다니는 게 평범하다니, 중원이라는 곳은 참 놀라운 게 많은 곳이군.”
“이곳과는 문화가 다른 곳이니까요. 직접 보시면 또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내가 찾아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지 않나? 죽기 전에 한 번은 보고 싶은데… 그래, 시간이 난다면 자네가 안내해주게.”
“하하하….”
나는 중원에서 가져온 술 몇 병을 상에 올린 후에 아가레스와 떠들었다.
개똥이가 술 빚는 방법을 이곳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었어도 그 방법을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어 그 병 수가 적은 물건이었다.
내가 주도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닌 탓에 아가레스에게 몇 병 주니 그는 크게 기뻐했다. 제국의 것과는 크게 달라 입맛에 맞지는 않았을 텐데, 술이라면 뭐든 좋은 듯했다.
알코울 중독자가 따로 없었다.
“자네, 비결이 뭔가?”
아가레스는 술에 취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후에 말했다. 황좌에 앉은 이후로는 술 마실 기회가 적었던가 혹은 의도적으로 음주를 줄였는지 주량이 준 모습이었다.
“듣자 하니 온갖 곳에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던데, 뭘 어떻게 한 건가? 하기야, 아카데미 시절부터 자네는 그러했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알고 있나 싶은 것들을 잘도 알았어. 이쯤 되니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운이 좋았습니다.”
대답을 피하는 티가 풀풀 나는 내 대답에 아가레스가 얼굴을 구겼다.
“자네, 그거 기억하나? 우리 약속했었는데. 누구보다 내게 먼저 그 비결을 말해주기로 했던 거. 혹시 까먹었나 싶어서 말이야.”
“아닙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
지금은 모든 문제가 다 끝난 시점이었다. 아가레스에게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들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에게 이걸 말해도 괜찮을까?
이곳은 소설 속 세상이고, 나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걸 과연 그가 믿을까? 혹여 믿는다고 해도 그가 불쾌할 게 뻔했다. 그러니 숨기자. 대신에 다른 걸 말해주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꿈을 꿨습니다. 미래가 보이는 꿈이었죠. 아마 아카데미를 입학하기 두어 달 전쯤일 텐데, 그 꿈을 꾸고 나니 사람이 바뀌는 듯했죠. 그 꿈에서는 제가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그것을 피하고자 꿈에서 본 정보를 이용했습니다. 돈을 번 건 그 꿈을 이용한, 덤 같은 거죠.”
“흐음….”
아가레스는 술을 한 잔 마시고는 말했다.
“자네가 아주 사실만을 말한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대로 거짓뿐인 건 아닌 듯도 해.”
“예, 뭐… 그렇습니다.”
“말해줘서 고맙네. 하도 신기해 내가 캐물었으나 내가 꼭 남의 비밀을 캐묻는 사람이 아닌 건 자네도 알지 않나?”
“예, 물론입니다. 그럼 폐하께서는 또 어떻습니까? 힘든 구석은 없는지요.”
아가레스가 황제가 된 데는 내 의견도 크게 지분을 차지했다.
내가 구태여 그를 찾아가서 황제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황좌에 앉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아가레스는 나 때문에 원하지도 않은 황위를 갖게 된 걸 수도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황제는 만인지상의 자리였고, 제국의 꼭대기였다. 그 누구라도 사양하지 않을 가장 값진 의자라 여겼는데, 사람에 따라서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황제는 일이 많았다.
나만 해도 놀고먹는 게 목표인 사람이라 누군가 준다 해도 마다할 것이다. 그러면 아가레스는? 그는 어떨까?
“듣는 이도 없으니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자네가 떠밀어놓고, 속 편하게 말하기는. 재수없군.”
“하하하하… 죄송합니다.”
“자네 바람대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런대로 살만은 해. 자네가 걱정하고 신경 쓸 수준은 아니야. 내 뜻대로 못할 게 없다는 건 만족스럽지. 내가 황제를 하는 건 처음이라 미숙한 구석이 조금 있어 번거롭기는 해도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테니, 뭐 나쁘지는 않아.”
나와 아가레스는 술잔을 기울였다. 전에 그러했듯 내가 먼저 취해 잠이 들었고, 아가레스는 홀로 자작했다.
아가레스는 이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고는 다시금 황궁으로 떠났다. 그는 저택에서 벗어나며 내게 한 가지를 경고했다.
“내가 언제 또다시 올지 모르니 항시 긴장하고 있게.”
황궁 생활이 고달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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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레스 때문에 시끌벅적했던 기간이 끝이 났다. 그가 오겠다고 선언한 시점부터 온갖 것들을 준비했고, 또 그를 모시는 중에 실수하지는 않을까 여러모로 에너지를 쏟았다. 그가 떠나고 난 후에 뒷정리를 하는데, 아직까지도 기가 다 빨린 느낌이었다.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휴식했다. 그렇게 다시금 몸에 기를 채우고 베네치아로 떠났다.
베네치아, 나비에가 카르테아로부터 파혼을 대가로 얻은 영지였다.
의외로 나비에 베네치아는 수완 좋게 영지를 키웠다.
영주로서 능력은 다소 부족한 구석이 있어 여러 곳에서 구멍이 뚫렸는데, 사람을 부려 그 구멍을 메웠다. 무엇보다 그녀가 판매하는 향수의 실적이 좋았다. 그녀가 판매하는 향수가 시장에서 인기가 좋다고 했다.
나는 굉장히 긴 시간 만에 나비에를 만났는데, 그녀는 며칠 전에 만난 사람 마냥 가볍게 나를 맞았다.
“잘 쉬다 오셨어요?”
나비에는 내게 굳이 간장과 관련된 일은 물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까지 내가 제국에서 도망치기 위해 일정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잘 쉬다가 왔지. 혼란스러운 시기에 딴 데 있으니까 아주 좋더라.”
내가 하려는 분야에 일을 같이할 사람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내가 시작하려는 일은 누군가의 도움 혹은 협조가 없어도 반드시 성공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같이하는 쪽이 더 재밌지 않겠는가?
나비에를 찾은 건 그래서였다. 오늘 이렇게 나비에를 만난 데는 내가 제국 곳곳에 열려는 식당과 관련이 있었다. 중원에서 레시피를 구해온 음식들을 팔 예정이었다.
과거, 나비에는 치킨을 맛보고 이걸 메인으로 한 식당을 열자고 말했었다. 그때 그녀가 내놓았던 의견이 떠올라 그녀와 함께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면 맛을 볼까요?”
“자신 있어. 언제든지.”
그녀는 간장을 사용한 치킨을 먹고는 감탄했다.
“놀라워요. 짠맛이 특별해요. 이게 중원에서 가져왔다는 그 조미료지요? 고기 냄새도 훨씬 나아졌어요. 양념으로 덮은 건가요?”
닭고기는 소나 돼지와 비교해서 잡내를 잡는 게 어려운 점이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런 부분에서 현대인들보다 관대한 덕에 대충 했는데, 이번 건 돈을 벌기 위한 음식이었다.
이제는 제대로 해야지.
단순히 양념으로 닭고기의 잡내를 덮은 게 아니라 염지까지 했다. 나비에는 이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할 테니 적당히 웃으며 넘겼다.
나비에는 단짠단짠의 힘에 놀라워하며 박수했다.
“사실 전에 주셨던 닭요리는 심심한 구석이 있었거든요. 새롭고 아주 맛이 좋았지만, 그래도요. 그런데, 잘 어울리는 양념을 더하니 맛이 더, 더 좋아졌어요.”
“네가 보기에도 이건 잘 될 거 같지?”
“네, 꼭이요.”
“같이 하는 게 어때?”
“예?”
나비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제가 맡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데요.”
“나는 맡은 일이 많아서. 그리고 나는 일하는 걸 싫어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하하, 그럼 제가 해야죠. 기회를 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다. 하는 일마다 잘 됐으니 내가 뭘 하겠다고 나서면 따라붙을 사람이 몹시 많았다. 하지만 이왕 할 거라면 아는 사람이랑 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가능한 많은 곳에 식당을 세운다고 정해놨으나 아직 그 위치 따위를 정하지는 않았다.
“어디 쪽에 건물을 사들이고, 어디에 세울지 알아봐 줘.”
“그런 거야 쉽죠.”
잡다한 일 몇 가지를 나비에한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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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었던 사이에 별일은 없었어?”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별일 없었어요. 그냥 잘 지냈죠. 가족들이랑도. 아, 그리고 비숏 영애한테 들은 건데, 거기도 조용하더라고요.”
“무슨 소리야?”
“제프린이라는 기사와 친하게 지내는 듯한데, 아직 혼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다고요. 아직 안 늦었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나를 놀리는 듯했다.
“너는 행복해?”
“아하하, 갑자기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제 뜻대로 풀리는 일이 많아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어요. 아, 거참. 저 아직도 펜싱 하고 있어요. 이제 저를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거 아세요?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이들 중에서는 제가 제일이에요.”
“대단한데.”
항해 중에 가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얘가 잘살고 있을까? 이렇게 만나보니 그게 다 기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알아서 잘 살 거다.
”그러면 다음에 보자. 기회가 될 때.“
”네. 건강하게 다시 봐요.“
베네치아를 떠나며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더 둘러볼 곳은 없나 싶었다. 아까 전 나비에가 비숏과 제프린의 이야기를 떠든 탓인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제프린.
원작에서 그는 아카데미 재학 중에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을 들어보니 그는 소드 마스터에 올라 하오크의 뒤를 이어 기사단장 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얘는 어떨까, 얼굴 한 번 볼까 싶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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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린은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단원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에 집중했다.
그가 강해지길 바라며 수련한 이유는 비숏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를 졸업한 비숏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알아서 잘 살았다. 연금술사로서 이름을 떨쳤고, 그녀 본인이 갈망했던 삶을 쟁취했다.
제프린은 생각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비숏을 위해서라는 감상은 치웠다. 이제 비숏에게 자신은 친구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뭐가 남았을까?
그는 제가 평생 노력을 쏟아온 분야가 무엇인지 곰곰이 떠올렸고, 답을 내렸다.
칼이었다.
비숏과 함께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그는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라파엘은 현재 제국 밖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이건 기회였다.
‘그를 뛰어넘는다.’
수련에 몰두했고, 결국에는 모든 기사의 꿈인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 이제는 라파엘을 상대로도 필승을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가 다시금 찾아왔다.
”다시 한 번 해보죠.“
그는 칼부터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