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수년 만에 나를 본 제프린은 대뜸 싸움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소드 마스터에 오르면서 자신감이 붙은 듯했다.
하기야,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만 해도 익스퍼트 때는 어림도 못 냈던 일을 시도했지 않은가? 제프린도 비슷할 거다.
“저와 겨뤄보시겠습니까?”
제프린은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도전을 받은 나는 고민했다.
‘이걸 해? 아니면 말아?’
싸운다면 나도 자신은 있었다.
나도 소드 마스터에 올랐고, 중원에서 묘기 몇 가지를 배워왔다.
실전에서 크게 쓸모 있는 기술은 아니어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놀라 자빠질 수밖에 없어 한 번의 대련이라면 반드시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와 또다시 칼을 겨룬다고 해도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랑 싸우게? 왜?”
“시간이 많이 흘렀고, 저도 발전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를 겁니다. 이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럼 네가 이긴 거로 하자. 너는 네 실력을 증명한 거야.”
“예?”
“너 소드 마스터라며, 내가 어떻게 이겨?”
제프린은 머리통을 반쯤 눕힌 다음 말했다.
“아직 익스퍼트에 머무르신 겁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긴. 사람 놀리냐? 내가 너처럼 어디 박혀서 수련만 한 게 아니잖아. 나는 영주고 바쁜 몸인데.”
제프린은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아마 내 수준을 어림잡아 계산하는 듯했다. 그에 나는 마나를 조절했다. 중원에서 배워온 잡기술 중에 하나로 자기 실력을 숨기는 것 또한 있었다.
이게 먹혀든 건지 제프린은 아리송하다는 듯 머리를 천천히 좌우로 기울이길 반복했다.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잘 넘어갔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제프린은 왜 나랑 싸우지 못한다는 걸 아쉬워할까?
왜?
그러고 보니 나는 그랬다. 호승심이나 경쟁심리 같은 게 적었다.
칼을 쥔 놈들은 다들 남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누가 낫나 비교 우위를 따졌는데, 나는 그런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수단으로 칼을 택한 탓인가? 스스로가 발전하고 있다는 감각은 즐거워도 꼭 남들을 이겨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따위는 적었다.
“칼은 아예 손에서 놓으신 겁니까?”
“그건 또 왜?”
“그게 아니라면, 익스퍼트에 머물렀을 리가 없으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그래. 비슷하니까, 그렇게 생각해.”
백사자 기사단에는 또 놀랍게도 레오도 있다고 했다. 그의 실력도 무럭무럭 발전해 작년에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한다.
심지어 제프린이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은 채 레오와 대련해서 대부분 패배했다고 할 수준이니 기사단의 부단장직을 맡기에 적합했다.
레오는 나를 보고는 반갑다는 듯 웃었는데, 곧바로 표정이 움츠러들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모아둔 돈이 좀 있는데….”
수년 전에 레오의 성장에 씨앗을 심어주기 위해 영약을 사 먹인 일이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때도 나는 부자였는데, 이제는 억만장자에 해당했다. 아가레스를 비롯한 극소수의 황족을 제외하면 나보다 부유하다고 단언할 사람은 없으니 제국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
하지만 돈 문제는 언제나 깔끔하게 해야 하는 법이었다.
“됐어. 넣어둬. 내가 그거 받아서 어디다 쓰겠어.”
어지간한 놈이 상대라면 그러했다.
“나중에 네 힘이 필요할 때 도와주기로 했잖아.”
“예, 맞습니다. 하지만 그럴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거 같아서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는 더 나아질 텐데, 그럼 나야 좋은 일이지. 나중에 네가 소드 마스터에라도 오르면 몸값이 어마어마할 텐데, 그때도 넌 날 도와야 하잖아.”
“예,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라도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레오가 제프린을 넘어설 거로 생각했다. 레오가 소드 마스터에 오를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레오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다음에 따로 제프린을 불러냈다.
“지금 시간 괜찮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원작의 비숏 주위에는 무시무시한 놈들이 많았다. 작중 초반에 제프린은 그들에 비해서 정말 보잘것없어 내내 밀리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은가?
카르테아는 죽었고, 이안과 아가레스도 비숏과 전혀 연관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면 비숏의 주위에 남은 건 제프린 하나뿐인데, 뭔가 성과가 있지 않았을까?
내가 누나가 쓴 글을 읽은 건 순전히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해서였다. 그게 아니라면 구태여 그런 걸 보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미 볼 만큼 봐버렸고, 그 끝이 궁금했다.
이미 원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왔다고 해도 결국 가장 중요했던 거.
비숏이랑 누가, 어느 남주가 이어지느냐, 이게 남았다.
나는 기대를 담아 제프린에게 물었다.
“비숏이랑 별일 없어?”
“예, 그분 께서는 무탈하십니다.”
흐음.
아무래도 제프린은 등신인 듯했다.
내가 그를 위해서 해준 건 아니라 해도 다른 남주들을 싹 쓸어 청소해줬는데, 이제까지 뭘 한 건가?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
* * *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안이 운영한다는 마탑을 방문했다.
이제 내 영지로 돌아가면 한동안 외부로 움직이는 일이 없을 듯해서였다.
물론, 이 또한 내가 내 영지와 영지민들을 생각하는 갸륵한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영주실에 엉덩이 딱 붙이고 있는다고 나아질 건 없었으니 순전히 나를 위해서였다. 이제 마음 편히 놓고 놀고먹어야지.
이안이 카테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마탑. 정확히는 실력으로 차지한 곳.
얘는 어떻게 살까 싶어 찾았다.
마탑의 입구에서 카운터를 보는 직원은 내 얼굴을 외워뒀는지 바로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이안이 있을 꼭대기 층으로 이동했다.
“어… 반가워.”
전에 봤을 때는 여기에 침대가 없었던 거 같은데.
마탑에 개인 숙소까지 있는 놈이 왜 꼭대기에서 침대에 누워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 뭐해?”
“일하지.”
“누워서 자는 게?”
“잠은 안 잤어. 그냥 누워만 있는 거지. 이게 내 일이야.”
이안이 말하길, 자기는 집무실에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마탑은 마법사들이 모여 서로의 발전을 도모하는 곳도 맞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체이기도 했다.
여기에 돈을 벌기 위해 이안이 할 줄 아는 건 없었고, 괜히 끼어들지 말고 제국 제일의 마법사로서 마탑의 간판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하는 거라 주장했다.
“편하겠네.”
“어. 편하지. 편해서 죽을 거 같아. 그런데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영지에서 일 다 떠넘겼잖아.”
반박하자면 반박할 수 있었는데, 나도 내심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작금의 이안 같은 삶이 내 목표이기도 했다.
“그리고 놀기만 하는 건 아니야. 다른 애들이 내가 만든 마나핵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반쯤 내 덕인 거지.”
아무래도 이안도 더할 나위가 없이 잘 지내는 듯했다.
“이건 선물.”
나비에와 함께 제국 전역에 음식점을 까는 일은 퍽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귀족들만을 대상으로 장사해도 충분하다며 음식점의 수를 줄이자 했는데, 내가 반대했다.
맛있는 거 먹는 즐거움은 다 같이 나눠야지.
그러면서 또 카를렌을 모방한 디저트 가게를 냈는데, 이게 반응이 좋았다. 내가 이안에게 내민 과자는 가장 인기 좋은 품목이었다.
“먹고 맛있다고 소문 내줘.”
“이거 하나 받고?”
“어.”
내 단호한 반응에 이안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얘가 잘 웃었다.
그는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웃더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꺼져.”
그는 성이 난 척 소리쳤는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얘가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알이 불을 안 뿜었다. 신호등에 불이 안 들어왔는데, 내가 겁 먹을 게 있나.
“맛없으면 맛없다고 소문내도 괜찮으니까.”
이안과는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일부러 툭툭 건드려도 봤는데, 눈에 빨간불이 안 들어오는 걸 보면 여전히 그가 분노 조절에 장애가 있나 싶었다.
아니, 아닐 거야.
그때 카르테아를 죽인 힘을 떠올리니 역시 그건 또 아니었다.
그냥 감정 조절에 능숙해진 거겠지.
원작의 후반부보다 상태가 더 좋아진 듯했다. 그는 뇌의 땅콩이 작은 탓에 감정을 느끼고,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과거에는 그러했다.
“배고픈데 여기 뭐 먹을 거 없어?”
“너는 뭐 가져온 거 더 없고?”
이렇게 툭 치면 탁하고 돌아오는 걸 보아하니 상태가 많이 나아진 듯했다. 어쩌면 다 나은 걸 수도 있고.
* * *
“이제 다 끝났네.”
제국을 반쯤 돌면서 다들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호기심을 채운 다음 내 저택으로 돌아왔다.
큰돈이 매일 같이 들어오는 김에 자그마한 사치로 저택을 키워 멀리서도 번쩍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큼지막해진 집과는 달리 반겨주는 코로망이 없으니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었다. 이블린과 제리코도 제 살길을 찾아 떠났으니 저택에 아는 얼굴이 드물었으나 곧 적응하겠지, 마음을 놓았다.
제국을 반 바퀴 돌며 그간 내가 만든 인연들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혹여나 내가 도와줘야 할 게 있을까 찾아봤다.
결과는 양호.
다소간 이상하다 싶은 친구들도 있었는데, 적어도 자기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친구는 없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왜 그렇지 않은가?
원래라면 없었을 내가 이곳 세상에 라파엘의 몸속으로 뚝 떨어졌다. 그로 인해 원작에서는 행복했을 인물이 나로 인해 불행해졌다면 마음이 쓰일 것 같아 한 바퀴 돌며 확인했고, 적어도 나로 인해 불행해진 인물은 없는 듯하다며 안도했다.
카르테아는 빼고. 걔는 죽어도 쌌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와 몸을 씻은 후에 침대에 누웠다.
역시나 우리 집 침대가 가장 푹신했다. 그 포근함을 만끽하며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내일 아침에는 간장을 사용한 요리를 먹자고.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