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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x9999-20화 (20/176)

20화 : 데이트와 라이프는 한 끗 차이 (3)

“민혁이는 B-2 구역 엄호해! 우린 바로 B-1 구역 진입한다!”

“네!”

촤악!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위층 공략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쉴 새 없이 사방을 적시는 붉은 피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인간들이 전력을 다해 몬스터와 싸우는 것처럼, 몬스터들도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에게 죽을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내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최현! 정신 차려!”

“네!”

내가 제대로 싸우고 있는 게 맞는지, 내 팔다리가 온전히 붙어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해야만 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전투는 끔찍할 정도로 잔혹했다.

“B-1 구역 점령 완료. 잠시 휴식한다.”

“우욱…! 욱……!”

휴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입을 막고 떨어진 곳으로 가서 속을 게워 냈다.

주변에 몬스터들의 내장이나 팔다리가 아무렇게 굴러다니는 것도 역겨웠지만,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계속 싸우느라 너무나 지친 상태였다.

13층은 D-10 구역까지 존재했는데, A 구역을 완전히 공략하는 데만 무려 두 달이 걸렸다고 한다.

저번처럼 중간에 게이트라도 생기면 점령했던 구역을 내주는 일도 있으니 하나의 층을 공략할 때 얼마나 많은 전투가 벌어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

“아…. 감사해요.”

그녀가 준 물을 마시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윤지는 정말 기계인 것처럼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로 몸에 잔뜩 엉겨 붙은 피를 씻어 냈다.

수많은 대련을 반복하고 나서 그녀와는 제법 가까워졌다.

처음에 의심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그녀와의 대련은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었고, 그건 지금 이 전장과 다르지 않았다.

몬스터들은 오직 날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으니까.

“다들 조금만 힘내라고, 오늘은 B-2 구역까지만 점령하면 끝나니까.”

“…전혀 위로되지 않는데요.”

“하아…. 술 마시고 싶다.”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장에서 느낀 건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팀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나는 헌터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저 매번, 싸움에서 폐를 끼치지 말자는 일념 하나로 싸우고 있었다.

“자, 봐.”

앉아서 숨을 돌리고 있는 내게 다가온 이신예가 갑자기 내 다리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왜…. 왜요?!”

잠시 나를 쏘아본 그녀가 아래에서부터 바지를 걷어 올렸고, 허벅지 쪽이 길게 찢어진 게 보였다.

너무 긴장한 상태라서 다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정신 차려. 누군가의 부상 하나가 팀 전체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어. 너에게 등을 맡긴 동료가 네 실수로 죽을 수도 있다고.”

“…죄송합니다.”

이신예는 내 다리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외웠고, 하얀빛과 함께 내 상처가 아무는 게 보였다.

확실히 그녀는 뛰어난 헌터였다.

이렇게 빠르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헌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알았는데, 그녀는 다른 치유계 헌터보다 치유할 수 있는 양이 많았다.

물론 부상의 심각함에 따라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이신예는 에너지의 총량 자체가 남들보다 월등했다.

“알면 됐어. 앞으로 조심해.”

처음에는 까칠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매번 전투가 끝나면 귀신같이 본인도 알지 못한 부상들을 찾아낸다.

그녀에게 부상을 들키면 다들 멋쩍게 웃으며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고, 그 모습은 어쩐지 꽤나 즐거웠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곳 몬스터들은 대부분 언데드야. 상처를 입으면 심각해질 수도 있어. 자기 몸은 자기가 확실하게 관리해.”

“네!”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은 오전이었는데 오늘 안에 한 구역만 더 점령하면 된다는 것은 썩 반가운 일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이 지겨운 곳에서 잠시 탈출이구나.”

“…무슨 회사원이 휴가 나가는 거 같은데요.”

“차라리 회사원을 하고 싶다.”

심윤성 아저씨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작은 물통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뚜껑을 열자마자 냄새가 퍼져서 옆에 있던 나는 뭘 마시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쉿.”

내가 눈치챈 걸 알았는지, 그는 검지를 입으로 가져가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전투 중에 술을 마신 걸 알게 된다면 이신예랑 유지한 아저씨가 가만있지 않겠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심윤성 아저씨의 공범이 되어 주기로 했다.

아저씨가 건네준 물통을 입으로 가져갔고, 쓴맛이 목을 타고 위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지쳐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과 깨질 듯한 두통을 잠시나마 잊고 싶었다.

“아저씨는 던전 나가면 뭐 할 거예요?”

“집에서 아이들이랑 놀겠지. 나도 나름 가장이거든.”

“정말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심윤성 아저씨는 표정을 찌푸렸다.

“뭐냐, 그 반응은? 내가 결혼해서 자식까지 있다는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이냐?”

“아… 하하! 설마요.”

애써 손을 저으며 그의 말에 부정했다.

“결혼한 지는 4년 차. 2살짜리 아들내미 하나 있다. 원래는 게이트 공략팀에서 일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가정이 생기니까 돈이 많이 필요하더라고.”

“그렇군요.”

“와이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집안이 가난해서 하나씩 채워 가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아저씨는 힘들어 보이면서도 어쩐지 즐거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저씨가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나가면 가족한테 가는 거냐?”

“아…. 가족은 여동생밖에 없어요.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지만.”

“뭐?! 그럼 바로 병원부터 가 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 녀석은 저보다 훨씬 강해서 아마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제가 실종됐었으니 협회에서도 보상금도 나왔을 거고… 그다지 걱정되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되지 않을 리 없었다.

아직 21살밖에 되지 않았고, 유일한 가족이니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아저씨에게 말한 것처럼 그 녀석을 믿고 있는 마음이 더 컸다.

분명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자, 그럼 조금만 더 힘내 보자고.”

유지한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켜자,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이번 전투만 끝나면 정말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보이는 건 ‘레이스’ 7마리, ‘스켈레톤’ 5마리, ‘스켈레톤 궁사’ 4마리, ‘섀도우’ 3마리.”

“그만큼 보인다는 건 그 두 배쯤 있다는 거군.”

“그렇죠.”

민혁의 보고와 함께 유지한 아저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력계가 있었으면 언데드 놈들은 쉽게 잡을 수 있을 텐데, 아쉽네.”

“다음에 올라올 땐 데리고 오던지.”

“아…. 그러고 보니 저희가 자리를 비울 동안은 어떻게 되나요?”

내 물음에 민혁이 옆으로 다가와 대답해 줬다.

“다른 팀이랑 교대하는 방식이야. 던전에서 한 달 동안 전투하면서 지내고, 밖에 나가서 다시 한 달 동안 쉬다가 들어와. 매번 같은 팀이랑 교대하는 건 아니야.”

“그렇구나.”

“그래서 다음에 들어오면 새로운 구역에 배정받아서 이어서 전투를 하는 거지.”

결국, 던전 안은 공략이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는 건가.

“현이가 선봉으로 진입하고, 이어서 윤지와 민혁이가 엄호해 줘. 나랑 윤성이 형은 주변에 숨어 있는 다른 놈들을 처리하면서 전진할 테니까.”

“오케이.”

“네!”

전투가 이어질수록 내가 이 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기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젠 다른 팀원들도 내게 한 사람 몫의 임무를 줬기에 괜한 자부심이 생겨났다.

전에는 다들 나를 지켜주기 위해 움직였지만, 이젠 누구도 날 걱정하지 않는다.

카앙-!

가장 먼저 앞으로 돌진해서 스켈레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뼈에 갑옷을 씌워 놓은 듯한 모습의 스켈레톤은 반월도를 들어서 내 검을 막아 냈다.

일부러 크게 움직여서 검이 닿는 소리도 최대한 주변에 들리도록 했다.

어차피 내 역할은 주변의 시선을 끄는 것뿐이니까.

파앗!

이어서 들어온 차윤지와 민혁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몬스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훑고 지나가면 몬스터들이 가루로 변했고, 어떻게 싸우는지 눈으로 따라가는 것도 벅찼다.

“위쪽 스켈레톤 궁사들 조심해!”

“괜찮아! 내가 맡을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신예가 앞으로 나와서 우리 앞에 베리어를 펼쳤다.

타앙-! 탕!

날카롭게 날아오던 화살들은 베리어에 부딪혀서 힘없이 떨어졌다.

“좋아! 하나씩 정리하면서 전진해!”

“뒤쪽! 뒤에 스켈레톤 기사다!”

“베리어 아직 괜찮아?!”

“여유 있어요!”

***

“하아…….”

“후우…….”

너무나 지친 나머지 다들 아무런 말도 없이 바닥에 대충 널브러져 있었다.

지쳐서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고, 혹시라도 누군가 말을 시킬까 봐 눈을 감은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다들 고생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다.”

처음으로 겪어본 전장은 온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힘겨웠다.

조금만 눈을 감고 있으면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다.

“다들 힘든 거 알지만, 확실하게 주변 확인하고 바리케이드 설치하자. 그 후에는 마음껏 쉬게 해 줄 테니까.”

“네.”

“아휴 죽겠다.”

모두 유지한 아저씨가 가장 고생한 걸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로 임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고, 혹시라도 놓친 몬스터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의 전투는 너무나 힘들고 지쳤지만, 여기서 싸우면서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처음에 느꼈던 팀원과의 절대적인 신뢰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우리 팀원들이 지독하게 강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가 질 일은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푹 쉬어. 다들 고맙다.”

유지한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쉴 수 있도록 자신은 계속 주변을 정찰하고 있다.

“…정말 저분은 괴물이 아닐까.”

“우리가 괜히 대장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니까.”

“크흐흐…. 그건 그렇지. 몬스터 같은 헌터라.”

이제 이곳에서 나간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헌터 협회에 보고하지 않고 던전에서 나가기 위해 이 팀과 동행했지만, 다음 달이 된다고 해도 이곳에 같이 오진 않을 것이다.

즉, 우리가 이곳에서 내려가면 더이상 함께 싸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길드에 들어오라는 제안은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복수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아. 데이트 약속은 잊어버리지 않으셨죠?”

빙긋 웃으며 차윤지에게 묻자,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데이트라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나와의 내기에서 졌다는 것에는 매우 분해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는 것도 나름 즐거웠다.

평소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있는 그녀가 유일하게 자신의 표정을 드러낼 때였으니까.

“빨간 망토와 데이트라니…. 무시무시한 신인 헌터군. 조심해. 저 녀석 팬한테 암살당할지도 모르니까.”

“그러게. 내가 살면서 윤지가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심윤성 아저씨와 이신예가 우릴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이신예 옆으로 다가간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물었다.

“저기…. 데이트에서는 보통 뭘 하나요?”

“뭐?! 너 설마…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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