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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2화 (2/150)

< 2화 옌시의 짐꾼 (1) >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지옥인지 천국인지는 확인해봐야 했다. 단순히 모바일 가챠겜이나, 화투패를 확인하는 긴장감과는 완전히 다르다.

내 28년 인생이 전부 평가받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난 눈을 열어가면서 점점 절망에 빠졌다.

이곳은 어둡기만 했다. 어둠과 암흑은 곧 지옥이요, 빛과 광휘는 천국이라. 난 지금 지옥 속에 있는 것일 테다.

"야, 이 새끼 죽은 거 아니야?"

"옌시가 옌시했네."

"눈 슬슬 뜨는데?"

뭔 소리들이야. 내가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설마 저승사자들인가. 저승사자들이라기엔 좀 가볍긴 한데.

그때 어떤 부드러운 손이 내 눈동자를 크게 벌렸다. 갑자기 받은 빛에 난 눈을 꼭 감으려고 했지만, 그 손은 내 눈을 놔주지 않았다.

"깨있는 거 맞네."

"아이리 공작 영애님! 더러운 옌시 놈을 직접 만지시다니요!"

"너희나, 쟤나 나한테는 마찬가지로 더러워."

아이리 공작 영애?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럼요, 아이리 라피테스 공작 영애의 손앞에 세상 깨끗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알고는 있구나, 흥."

그녀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내 눈꺼풀을 만진 손을 물로 닦고 다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우악한 손이 고양이를 들듯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잡아 올렸다.

"옌시 놈은 패야 말을 듣는다더니."

옌시? 아이리? 라피테스? 그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하나로 조합된다. 그 단어의 퍼즐조각들은 하나의 그림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내가 마지막에 읽던 로맨스판타지 소설,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이라는 동판화를.

"1층 초입부터 고블린한테 쳐맞고 기절한 다음에, 일어났는데도 기절한 척을 해?"

"야, 무서우면 그럴 수도 있어. 얘 싼 값에 데리고 온 애라며."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근데 여기 애들은 왜 이렇게 다 키가 크냐. 주변 사람들이 날 둘러싸고 날 내려다보니 기분이 아주 나쁘다.

"여기 트라프비체 제국입니까?"

"얼씨구? 기억상실 코스프레까지? 이 새끼 완전 진국인데? 그래, 맞다. 여기가 트라프비체지. 그러면 네 고향인 냄새나는 옌시겠냐?"

이것 봐라. 여긴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란 말씀인가. 트라프비체 제국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여기는 확실히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의 세상이 맞았다.

"오늘 10층까지는 돌아야 돼. 10층이 소드 엑스퍼트 시험 통과 기준이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영애님!"

영애라고 불린 여자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은빛 머리 중간을 폭포처럼 땋고 뒷머리는 길게 풀어헤친 아름다운 머리다. 머리만 아름다우랴. 얼굴 또한 흰 피부에 적안은 그야말로 우유와 루비로 조각한 인형과도 같다.

그나저나 아이리 라피테스라고 했지. 내가 아는 아이리 라피테스면 여기서는 참 성질이 더러운 년인데. 물론 그 성질은 내 눈을 잡을 때부터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고블린이다, 너희들 다 뒤로 물러나!"

아이리는 신난 듯 자신의 머리색과 닮은 은빛 검을 들고 달려갔다. 고블린은 비명조차 못 지른 채 두 동강으로 절단이 나고 말았다.

"역시 영애님이십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소드 엑스퍼트급 아닙니까?"

"얌마, 소드 마스터급은 되지."

염병하네. 소드마스터급은 내가 있는 세상 기준에서 S급 헌터인데. S급 헌터가 상위 0.04%라고 생각하면, 택도 없는 소리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아이리겠지만, 그녀는 그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을 뿐이었다.

"야, 짐꾼. 빨리 시체 수거 안해?"

누군가가 내 등을 밀었다. 아까 아이리한테 소드마스터라고 아부하던 그 놈이었다. 떡진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전형적인 양아치 느낌 나는 놈이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블린의 시체 앞에 밀려져 갔다.

뭐, 이런 시체보다 잔인한 건 많이 봤으니까 그렇게 역겹지는 않다.

그나저나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는 로맨스판타지라 이런 현실적인 장면 안 나왔다고. 그저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꽁냥대는 것만 나왔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일단 여기는 이 세계의 던전과 같았다. 나가는 길도 모르고, 일단 아이리의 눈총이 너무 매서워 시체를 해체하기로 했다.

시체 해체도 당연히 로맨스판타지에는 금기인 장면. 난 그냥 헌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서 옆에 있는 단검으로 몬스터를 해체했다. 이런 건 내가 빠꼼이지.

왜냐하면 헌터에게 의뢰를 넣는 놈들은 언제나 최상급의 사체와 부산물을 원하니까. 물론 S급 헌터 정도 짬 좀 되면 시체 뒤처리는 안하지만, 그래도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푹, 찍!

나는 능숙하게 단검으로 고블린의 시체를 해체했다. 애초에 더럽게도 잘라놨네. 아이리가 이걸 잘라놨을 때부터 이 시체는 B급이다.

"영애님, 저런 건 보지 마십시오."

아이리 옆에 있는 줄이 달린 안경을 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아마 집사인 듯하다. 아이리 역시 보기 싫었는지 얼굴을 돌렸다.

이런 거 안 볼 거면 여기 왜 왔냐. 난 속으로 비웃으며 고블린 입 가장 깊숙한 곳의 잇몸을 도려냈다. 이빨이 잇몸 째로 뽑혀 나와 마치 틀니와도 같았다. 이래야 이빨의 신선함이 살지.

"쟤 뭐야?"

"시체 처리 하나는 미쳤네."

"하긴 짐꾼이 저런 것만 잘하면 됐지."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런 말들을 무시하고 일단 시체를 처리했다.

가죽은 가죽대로, 고기는 고기대로, 뇌나 내장은 깔끔하게 벗겨서 땅에 묻었다. 내장이 가죽에 묻으면 가죽이 금방 상하니까.

"얼추 끝났네."

나는 뒷주머니에 있는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신기하게도, 가죽 주머니 안에 구획이 빛나는 선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게 로맨스판타지 세계의 마법이라 이거지. 신기하네.

나는 그것을 열고 시체를 구획대로 담고 내 등을 밀친 놈에게 던져주었다. 그 놈은 마치 용암 덩어리라도 받듯이 가죽주머니를 손 위에서 몇 번 튕기더니 간신히 잡았다.

"뭐 쥐라도 잡아? 호들갑은. 저 옌시보다 네가 더 찌질이 같다."

"저 새끼가 말도 없이 던졌잖아."

그 놈은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캐치 못한 게 내 잘못이냐. 난 살짝 비웃어주고 얼굴을 돌렸다.

"야 옌시···"

"짐꾼이 아주 A급이군. 옌시 사람이라 싼 값에 데려왔는데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그 놈의 시비는 집사 선에서 막혔다. 집사 선에서 막힐 반항이면 깝치지 좀 마라.

"영애님, 가시죠."

"응. 근데 너무 느리다."

"저렇게 정밀하게 손질하는 짐꾼이 A급인 겁니다."

"고블린 사체가 얼마나 나온다고 손질해? 그냥 대충 하라고 해."

나한테 직접 말하면 되지. 굳이 그걸 집사를 통해서 말해야 하나. 하긴 아이리 라피테스를 아는 나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뭐라 하면 내가 목이 날아가니까.

그녀는 공작가의 하나뿐인 영애로, 여자주인공인 마리나의 아치 에너미였다. 소위 말해 악역 영애라고 하지. 얼굴은 예쁜데, 인성은 더럽고,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 전형적인 로맨스판타지 악역이다.

"자, 출격!"

아이리는 천진난만하게 검을 들어서 우리를 지휘하듯 말했다.

아마 내 옆에 있는 건 공작가들의 호위병 같다. 그러니까, 이름 없는 평민들이지.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뒤따라 걷자 앞에 아이리 옆에 있던 집사가 내 옆으로 왔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이름이 뭐냐고. 트라프비체 말은 할 줄은 아는 군."

나도 모르겠다. 왜 할 줄 알지. 분명 처음 듣는 언어인데. 나는 고민했다. 주환영이라는 이름을 쓸까.

근데 여기는 로맨스판타지. 동양풍의 옌시여도 서양풍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고증 안 된 흔한 로맨스판타지다. 왜냐하면 그게 멋있으니까.

"어, 이름이 없나?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잠깐만요. 생각 중이에요."

"이름을 생각한다고?"

이름 없는 삶은 싫어. 어이없어 하는 집사를 앞에 두고 생각했다. 환영을 영어로 하면 뭐더라.

그때, 내 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환영 : Apparition [? æp?? r?? n]】

이건 또 뭐야. 사전인가. 반투명적으로 보이는 창은 집사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에 이런 설정이 있었나. 그나저나 발음까지 들리네.

"에퍼리션입니다."

"에퍼리 션? 성도 있구만. 혹시 옌시에서 한 가닥 하던 사람인가?"

그 뜻이 아닌데. 어쨌든 내 성은 션이 되었고 이름은 에퍼리가 되었다.

"지금 옌시가 혼란스럽다는 말은 들었는데."

몰라, 그런 거.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은 트라프비체가 거의 주 배경이기 때문에, 옌시는 언급만 되고 나오지도 않는다.

"그나저나 시체 처리가 아주 출중하군. 공작저에서 정규직으로 둬도 될 정도로 능숙해. 다만 몸이 좀 비리비리한 것 같은데. 짐꾼도 해야 되니까 벌크업만 좀 하는 건 어떤가?"

취업 제안이야? 됐어. S급 헌터 가오가 있지. 이건 뭐 스카우트도 아니고 그냥 물류센터에서 사람 빈다고 전화하는 거랑 똑같잖아.

"생각해보고요."

"그래. 아니, 공작저 정규직을 마다하나?"

"말이 정규직이잖아요."

나도 S급 재능 따기 전에 상하차 좀 해봤는데, 그때 사원님이라고 부르더라. 말이 사원님이고 정규직이지. 대하는 건 그냥 비정규직이잖아. 그런 건 사양이다.

"만약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이력서에 스킬 다 적어가지고 오게."

"뭔 스킬이요."

난 그렇게 말하고 문득 깨달았다. 아, 여기 스킬이 있는 세계지. 헌터 세계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다만 헌터 세계는 그냥 짬이고, 여기는 스킬이라는 걸 붙였지.

오히려 조금 더 번거로운 세계가 됐다고 할까. 그럼 내가 아는 것도 스킬이 없으면 못하는 건가, 싶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움직임으로 순간적으로 집사의 뒤를 잡으려 했지만, 발이 꼬여서 넘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뭐하는가? 춤은 왜 춰?"

"아니, 취업 제안을 받아 신나서···"

개쪽팔리네. 다른 호위병들은 날 보고 빵터졌다. 아이리는 내가 쾅 넘어진 걸 보고 경멸의 눈빛으로 보고 있다.

아이리는 우리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다가 집사를 앙칼지게 불렀다.

"집사! 내 집사야, 저 옌시 놈 집사야! 우리 공작저 겸직 금지인 거 몰라?"

"갑니다, 영애님!"

집사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 귀띔을 주었다.

"공작저 위치는 알지? 알아서 이력서 써서 찾아와. 봉급 협상은 거기서 하자고."

누가 간다고 했어? 집사는 내 어이없는 눈빛도 못 본 채로 아이리의 곁으로 떠났다. 아이리는 집사가 오자 자연스럽게 몸을 앞으로 돌리고 계속 걸어갔다.

집사는 벽의 위를 보더니, 갑자기 아이리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저 사람이 미쳤나. 저 광년의 앞길을 막다니.

"언제 10층까지 오셨습니까. 11층까지는 안 됩니다."

"아, 쉬웠어. 너희들 얘기할 때 2층 올랐다."

걸어다닌 것밖에 없는데 2층이나 돌파했다고? 여기 던전은 내가 아는 방 구조랑 비슷하네. 방 형식으로 되어 있는 던전. 한 방을 돌파하면 층을 클리어했다고 했지. 하긴, 이 글을 쓴 작가도 내가 있는 세계에서 썼으니 참고했겠지.

"공작님께 신신당부 받은 내용입니다. 11층은 네임드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입니다."

"그냥 15층까지 한 번에 뚫어버리지? 소드 엑스퍼트 투 따고 싶은데. 차라리 그게 우리 아버지를 행복하게 하는 일 아닐까?"

"절대 안 됩니다!"

"나한테 절대라는 말을 쓰지 마. 집사.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내 총애를 받는 건 아니잖아?"

저거, 저거. 아버지 뻘한테 말하는 꼬라지 봐라. 저러니까 악역 영애인데다가 안티도 제일 많았지.

쟤만 나오면 댓글이 아주 욕으로 도배가 됐다고. 물론 나도 기여한 바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연 급에 가까운 인물인 만큼 죽지는 않겠지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 띠껍기 그지없다. 내가 파티장일 때 저런 사람이 있으면 바로 방출했다. 물론 내 앞에서 그런 사람도 없었지만.

"11층으로 가자!"

아이리의 다시 신난 말투에, 호위무사들이 말없이 따랐다. 집사의 한숨이 10층 던전에 짙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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