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옌시의 짐꾼 (2) >
난 솔직히 이 세계의 던전이 뭔지 모른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자주인공, 마리나고 그녀는 던전을 돌만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던전이나 궂은 전투는 남자주인공, 가테스의 몫이니까. 그때도 짧게 묘사될 뿐, 언제나 포커스는 주인공인 마리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11층이니까 리자드맨도 나오네?"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나오는 몬스터들을 모른다는 얘기다. 솔직히 나는 책을 좀 대충 읽는 버릇이 있다. 왜냐하면 좀 바쁘거든.
S급 헌터는 사실 연예인에 가까워서, 의뢰보다는 CF나 방송일에 나가는 게 더 많다. 그게 더 돈이 많이 되고 덜 위험하니까. 나도 말년에는 의뢰 거의 안 뛰고 CF만 주구장창 찍었다.
의뢰는 국가에서 사정사정하면 나가는 정도. 그때는 국제연합에서 징징거리기에 나가줬는데, 이게 이렇게 될 줄이야.
"아, 피 튀겼어."
아이리가 리자드맨을 베고 울상을 지었다. 리자드맨의 푸른 피가 그녀의 하얀 소매에 묻었다. 참고로 리자드맨이 푸른 피인 것도 처음 알았다.
내가 마리나랑 가테스 연애하는 걸 보고 싶어서 로맨스판타지 봤지, 굳이 내 일상인 몬스터 잡는 걸 보려고 봤을까.
"집사, 닦아줘."
아이리의 이상한 부탁에도 집사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상한 물약을 뿌린 다음 그녀의 소매를 닦아주었다.
그 액체는 꽤 신비한 물질인 듯 소매의 얼룩이 바로 닦여져 나갔다.
"와, 성수를 저런 식으로 쓰네."
"저거 그냥 비누로 몇 번 문대면 지워지는 건데."
호위무사들의 술렁임이 들려온다. 성수는 안다. 근데 지금은 비쌀 텐데 곧 싸질 거야.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12층."
"아가씨. 제발."
내가 시체 처리를 마치니까 아이리가 보란 듯이 외쳤다. 그러나 호위무사들의 얼굴은 평안하다.
당연하지, 뭐. 영애 호위무사니까 약한 놈을 붙여주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공작저 던전이 랭크가 몇이었지?"
"C랭크."
"뭐야. 그럼 최대 34층이잖아. 왜 이렇게 저 집사는 안절부절이야."
"하나뿐인 영애잖냐. 손이라도 비면 바로 목이 잘릴 텐데."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어쨌든 C랭크라. 정확히 어떤 수준인지는 몰라도 낮은 곳인 건 알겠다. 그래도 난 빨리 나가고 싶다.
내가 지금 어쩌다 여기 떨어진 건지도 궁금하고, 지금 이 세계가 어디 쯤 와있는지도 궁금하고, 마지막으로 이 던전을 나가면 내 영혼이 사라질지 궁금하다.
아직 나는 이것이 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니까.
다만 내 바람과 달리 아이리는 계속 더 깊은 곳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12층.
13층.
14층.
15층.
"이제, 진짜, 그만, 하십시오!"
집사가 두 팔을 벌려 막았다. 아이리는 고운 얼굴을 찌푸리는 곳에 썼다. 물론 그래도 고왔다.
"여기서 더 지나가시려면 절 베고 지나가셔야 할 겁니다."
"못 벨 것 같아, 집사?"
"베십시오!"
강직하네. 저런 충신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개차반이 됐다니. 역시 사람의 본성이라는 건 무시 못해. 아니, 그냥 작가가 부여한 성격이니까 작가의 잘못일 수도.
"아, 재미없어. 아직 난 괜찮다니까."
그렇긴 해도 아이리의 다리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아무도 못 알아챘겠지만, 아이리도 슬슬 힘든 것이다.
애초에 장갑을 끼고 검을 쓰는 건 뭔 생각이야. 여기가 펜싱 경기장이야? 실전에서는 손에 검병이 착 달라붙게 잡아야지. 그래야지 검의 감각을 더 잘 느낄 수 있는데. 장갑 끼면 손의 피로도가 오히려 더 증가할 걸.
S급 헌터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지식이 온갖 훈수를 두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그럼 돌아가지 뭐."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이리는 무슨 대단한 결정을 내린 것처럼 새침하게 뒤를 돌려다가,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내가 넘어졌을 때와는 정반대로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야말로 침묵 그 자체. 심지어 그녀가 더 꼴사납게 벽에 부딪치기까지 했는데.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괜찮거든?"
아이리는 창피했는지 더러운 벽에 손을 밀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근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밀은 벽돌이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황급히 달려가 그녀의 몸의 균형이 망가지는 걸 막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는 뜻이다.
그 장면에 집사와 호위무사들이 얼어붙었다. 나도 그 찰나에 본능적으로 나갔을 뿐이지, 조금만 생각을 했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이건 내가 S급 헌터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S급 헌터는 생각이 행동이 바로 옮겨지니까. 생각과 행동이 어긋나는 건 하수나 하는 일이었다.
"너, 너···"
아이리가 말을 더듬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난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넘어져서 크게 다칠 뻔 하셨습니다."
"아니거든? 손이나 떼!"
아, 귀 아파. 난 얌전히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쳐 호위무사들에게로 숨었다. 호위무사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어쩌자고 영애님의 옥체에 손을 직접적으로 댄단 말인가. 지금 영애님이 당황하지만 않으셨어도 뺨을 세 대는 맞았을 게야."
"반성하고 있어요."
나대지 말자. 이제 S급 헌터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돼. 특히 헌터는 그렇지.
헌터가 죽는 이유의 99%는 자기 분수를 몰라서 그렇다. B급 헌터가 A급 던전을 노리고, A급 헌터가 S급 던전을 노려서. 1%는 갑자기 던전 변이가 일어나서 나처럼 죽는 경우겠지.
"그나저나 M층이 있을 줄은 몰랐네."
호위무사가 중얼거렸다. M층은 알고 있지. 남자주인공이 가테스가 M층 전문으로 파고 다녔거든.
M층은 우리나라에도 있는 말로, 그야말로 중간층이다. 여기서는 히든 던전의 느낌이다. 가테스는 남자주인공이니까 히든이 빵빵하게 몰려 있었지.
그 말인 즉슨 이렇다.
"내가, 내가 히든 층을 찾았어!"
아이리는 두 팔을 위로 올리고 외쳤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허락되지 않는 비동이라는 거지. 아이리가 기뻐하는 것도 이해된다. 그리고 다행이다. 히든 층을 발견해 기쁜 아이리가 아니었으면 난 뺨따구를 맞았을 테니까.
"집사, 솔직히 이건 들어가야 된다."
"안 됩니다."
"M층은 어디서 생길지 몰라. 지금 안 들어가면 곧 없어진다고."
아이리의 말이 맞다. 나도 가테스의 시선에서 M층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그런 말이 있기는 했지. 나도 궁금하긴 한데, 솔직히 들어가기는 싫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일승일패.
나를 모르고 적을 모르면 백전백패.
지금은 백전백패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위의 말도 다 그냥 어거지지. 내가 S급 헌터였을 때는 나만 알았어도 다 이기던데.
"집사, 그렇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C랭크 던전에 15.5층 밖에 안 됩니다. 여차하면 우리가 나서면 되니까."
머리를 묶은 양아치가 나섰다. 이것 봐라. 아이리의 눈이 빛난다. 아마도 저걸 노린듯하다. 악역 영애 특징. 자신한테 좋은 말은 귀에 불을 밝히고 들음.
다른 호위무사들도 조금 꺼리는 기색인데, 당당하게도 나선다.
"위프! 넌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내가 찍은 호위무사는 다르다니까."
악역영애 특징 2. 사람 보는 눈이 더럽게 없음. 그러니까 여자주인공에게 막 대하고 터무니없게 남자주인공한테 들이대지.
"아가씨···"
"아, 이건 진짜 내가 다쳐도 집사한테 책임 안 물을 거야. 그리고 호위무사들도 다 B급은 되는데 별 일 있겠어?"
"차라리 기사들이면 저도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 여기 있는 호위무사들로는 안심이 안 됩니다."
오우. 집사의 돌직구. 집사는 아이리를 향해 있지만 돌직구는 호위무사에게 날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나저나 아가씨가 나가는 데 1군 기사들이 안 오고 뭐하는 거야.
"이봐, 그 말은 우리가 안심이 안 된다는 뜻처럼 들리는데?"
당연하지. 뭘 그런 걸 짚고 있어. 집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원래 집에 있는 막내 도련님 지키는 사람들이잖나. 잠깐 기사들이 빠져서 아가씨를 보호한다고 우쭐대지마라."
와. 집사 강하게 나가네. 집사의 목소리도 낮아지고 호위무사들도 얼굴이 붉어진다. 집사의 고공 팩트폭격이 던전의 천장을 뚫고 호위무사들을 초토화시키는 것 같다.
물론 아이리를 위한 충성심에서 나오는 말이겠지만, 나는 잘못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인간적으로 모욕됨을 떠나서, 칼 좀 쓴다는 사람들의 됨됨이가 다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중간한 애들은 거의 천편일률적이다.
직위를 떠나서, 이 사람이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면 막 나가는 것이다. 이런 칼을 쓰는 던전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돌아서 특히 그럴 것이다.
"이봐, 집사. 내 칼 한 방에 목 날아갈 정도면 조용히 있지?"
"난 아가씨를 지키는 사람이지, 너희의 안전을 보위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는 그저 공작저의 장기말일 뿐이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집사와 머리 묶은 호위무사의 말싸움이 격해진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아이리는 그걸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에라, 이 년아.
"투표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누군가가 손을 들어서 물었다. 가장 어린 호위무사였다. 내가 듣기엔 합리적인 말이었던 것 같은데, 모두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봐, 계급이 다른 사람에게 투표를 제의하는 건 반역인 건 알고 있나?"
"모, 몰랐습니다."
하긴, 여기 중세시대였지. 역시 나처럼 가만히 있으면 반이나 간다니까. 하지만 아이리는 흥미로운 미소를 짓고 손을 들었다.
"난 찬성. 다른 애들 투표해봐. 이번 건은 내가 자비롭게 넘어가줄 테니까."
저렇게 엄포를 놓고 공작 영애가 찬성을 하면 누가 반대를 할까. 여기, 그 사람이 있다. 꿋꿋한 집사는 바로 반대에 표를 던졌다.
"저는 반대입니다."
"나는 찬성."
집사와 대립각을 세우던 머리 묶은 호위무사가 손을 들었다. 호위무사들은 눈치 보기 바빴다. 뭐, 여기서는 나대는 거 아니겠지.
나는 슬쩍 손을 들었다.
"반대표에 던집니다."
"넌 짐꾼이라 그럴 줄 알았어. 명예도 모르는 것."
아이리가 날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때리고 싶네. 빨리 이 소설이 180화정도 됐으면 좋겠다. 그때 가테스가 아이리의 뺨을 시원하게 후리는데.
다른 호위무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반대표를 던지고, 찬성표를 던졌지만 결국 압도적으로 찬성표가 많았다. 그들도 결국 공작저의 사람. 고용주인 공작의 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결정났네. 투표도 하니까 재밌다. 아버지가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건은 공작님께 보고하겠습니다."
"하든가, 말든가."
아이리가 집사를 조롱했다. 집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아이리가 밀어낸 벽돌이 있는 벽으로 갔다.
"이제부터는 제 책임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지하시길, 아가씨."
"그래, 그래."
집사는 벽 안쪽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조작하는 듯했다. 곧, 벽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어둠이 뻗어 나왔다.
이게 소설 속에서만 봤던 M층이라 이거지. 아, 갑자기 그게 생각나네. 가테스와 마리나가 던전에 같이 있었을 때, 가테스가 마리나에게 해줬던 말.
- M층에서는 내 곁에만 있어라. 웬만하면 그렇지는 않겠지만, 가끔 던전 랭크를 벗어난 몬스터들이 나오니까.
그 말이 어쩐지 예언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아니다. 그렇진 않겠지. 왜냐하면 여기서 아이리가 죽는다면 소설은 진행되지 않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나는 주문을 외고 맨 뒤로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