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옌시의 짐꾼 (3) >
던전의 방은 모두 조명이 달려있었지만, M층으로 향하는 통로는 어둡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열고 들어온 문이 자연스럽게 닫혔다.
저 문은 이제 열리지 않겠지. 왜냐하면 모든 던전은 그 방의 몬스터를 해결해야 열릴 테니까.
복도 너머, 불길해 보이는 문이 보인다. 마치 서커스에서 호랑이가 통과하는 문처럼, 네모난 문에는 보라색 불길이 휘몰아치고 있다.
"들어가기 전에 각자 스킬 점검해!"
집사는 이제 아예 호위무사들한테 반말을 했다. 심기가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다. 아이리도 그걸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그 말에 아이리도, 집사도, 호위무사들도 뭔가 멍을 때리는 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할 수 있을까? 난 조심스럽게 기대감을 가지며 속으로 되뇌었다.
'스킬.'
그러자 반투명한 스킬창이 나타났다. 창의 레이아웃은 아까 내게 환영 단어를 알려준 때와 같다. 이게 스킬창이라는 거였구나.
"짐꾼, 넌 뭔 스킬 있냐?"
"일단 사체 해체 스킬은 최소 7렙인데?"
몇몇 호위무사가 관심을 가지고 내 곁에 왔다.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 스킬창에는 지렁이들과 돼지꼬리 같은 말만 가득했으니까.
그러니까, 못 읽겠다는 얘기였다.
"못 읽겠는데요."
"뭐야, 문맹이야?"
"하긴, 옌시 놈들은 트라프비체 말이 어렵다고 안 배우곤 하지."
그들은 내게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떠나갔다. 그게 나도 마음이 편했다. 아니, 말은 할 수 있는데 왜 해석은 못하냐고. 진짜 짜증나네.
내 스킬창은 빽빽했다. 하지만 읽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혹시 아까 내게 환영의 뜻을 알려준 사전이 무언가를 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결국 난 여기서 유일하게 내 편 같은 집사 곁으로 찾아갔다.
"집사님."
"짐꾼, 왜?"
같은 짐꾼이라는 단어라도 날 경멸하지 않는 느낌. 지금도 화난 상태일 텐데 말투가 평안한 걸 보면 그래도 냉정한 사람인 것 같다.
"죄송한데 이거 하나만 읽어주시면 안 됩니까? 스킬창에 있는 거라."
"아, 문맹이군. 스킬을 못 읽으면 말짱 도루묵이지. 스킬은 신이 부여한 힘이니까."
"그래서 옌시가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리는군요."
소설에서는 그러던데. 하지만 집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옌시는 스킬 말고 달리 사는 방법이 있어. 우리의 신은 그렇게 무자비하지 않네."
"그렇군요."
"자신을 비하하지만 말게. 몸이 깨질 때까지 고생하면 그 깨진 틈 사이에 답은 무조건 보이기 마련이니까."
"공감 가는 팁이네요."
나는 살짝 웃고 땅에다가 해체용 단검으로 스킬창을 보고 따라 썼다. 집사는 살짝 얼굴을 갸웃하더니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속한, 이라는 뜻이군."
오케이, 그럼 이건 뭘까. 난 최대한 비슷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움직임이라는 뜻이군."
알았어. 나는 신속한 움직임이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군. 그걸 자각하자, 내 스킬창에 지렁이 같은 글들이 뻣뻣하게 뻗고, 혹은 직각으로 구부러져 글자를 만들어냈다.
결과는 이것이었다.
【스킬 : 신속한 움직임 Lv MAX 개방】
【스킬 : 신속한 움직임 Lv MAX 사용 중】
"스킬 맞지? 조금 낯선 스킬 이름이군."
나는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이리가 보라색 불길이 휘몰아치는 문을 퉁퉁 두드렸다.
"집사, 빨리 들어가자. 여기 좀 덥다."
"스킬 점검은 다 하셨습니까?"
아이리의 부름에 집사는 바로 아이리에게 달려갔다. 그래, 뭐. 스킬이 워낙 많으니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신속한 움직임이면 내가 빠르게 움직일 때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내가 헌터 시절에
'신속한 움직임!'
을 외치면서 움직이고 다니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거 하나면 난 죽진 않을 것 같다. 난 조용히 신속한 움직임을 운용해봤다. 확실히 아까 탭댄스 추다가 넘어질 때와는 다른 움직임이다. 이게 스킬의 힘이구나.
"악!"
머리를 묶은 호위무사가 비명을 질렀다. 당연하지, 내가 뒤로 가서 뒷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왔거든.
"뭐야, 어떤 새끼가 때렸어?"
"뭔 개소리야, 임마."
"아니, 아프진 않은데 누가 툭 건드렸어."
난 최대한 세게 때린 건데, 이것도 스킬이 없으니까 약한 건가. 아니면 이 몸이 S급 헌터의 힘을 받아들이기엔 약한 걸 수도. 이 몸은 누군가의 몸일 테니까.
"던전 입장하기 전에 기본기가 안 되어있군. 너희는 이번 상황을 떠나서라도 재계약을 고려해보겠다."
집사가 냉엄한 말투로 말했다. 아이리는 호위무사들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저 M층에만 관심이 있었다.
호위무사들은 조용히 투덜거렸다.
"아, 너 때문에."
"진짜 누가 때렸다니까."
"종유석에서 떨어진 물방울 맞았겠지."
호위무사들은 결국 탓을 머리 묶은 남자에게 전부 돌렸다. 주변인들 사이에서 재계약 건의 책임자가 된 그는 풀이 죽었다.
"하, 진짜 걸리기만 해봐라."
걸어보던가. 지금 강하지는 않아도 도망갈 자신은 있다. 어차피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도망갈 능력이다. 아이리는 이 던전을 잘 돌파하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다.
왜냐하면 그녀는 마리나와 만나야 하니까. 그게 그 소설의 흐름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죽지 말아야 한다. 난 이 소설의 틀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니까.
"들어간다."
아이리가 설레는 목소리를 하면서 문을 밀었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검은 새순이 돋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 검은 새순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고 있다.
이곳에서는 타락한 나무라는 것이 몬스터의 둥지 같은 곳이다. 색깔에 따라 랭크를 나눌 수 있는데, 검은색은 예외다.
검은색은 이 세계에서 최강 빌런인 '악마'가 서식하는 나무니까. 아, 소설이 시작되기 직전이군. 난 그렇게만 생각했다.
소설에서는 검은 나무가 우후죽순으로 자라 트라프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시작하니까 말이다.
"모두 내 뒤로 물러서라."
"집사! 죽고 싶어?"
아이리는 외쳤지만 집사가 아이리를 순식간에 들어 호위무사 중간에 딱 떨어뜨려 놓았다.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한 B급 헌터 정도?
그래, 역시. 아이리 정도 공작 영애가 오는데 괜찮은 호위 무사 정도 하나는 있어야지.
"지, 집사?"
아이리가 당황스런 목소리를 냈다. 그녀도 집사의 본신 무력은 몰랐던 모양이다. 집사는 아이리를 무시하고 그가 낀 외줄 안경을 뺐다. 그가 낀 외줄 안경에 마나가 깃드는 게 느껴졌다.
여기도 마나가 있구나. 그래, 명칭이 다르고 묘사가 잘 안 됐다 뿐이지, 이곳의 판타지는 우리 헌터 세계를 참고했음이 틀림없다.
"호위무사들은 영애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라. 목숨을 다해 지켜라."
흐물흐물하던 금줄의 외줄 안경이 뻣뻣하게 퍼지는 것으로 모자라 길어졌다. 그 엄숙한 목소리에 아이리 역시 딴죽을 걸지 못했다. 강하다, 저 사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 호위무사들도 칼질 꽤나 해본 사람들일 거니까 알 거다.
"짐꾼, 너한테도 우리 영애를 부탁한다. 넌 우리 사람이 아니라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난 네 비밀을 알고 있거든."
그는 날 보며 피식 웃었다. 비밀? 뭔 비밀. 나도 내 비밀을 모르는데.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그는 허공에 누구를 내려치듯 손을 홱 질렀다.
아, 내가 아까 꽁지머리 뒤통수 때렸을 때의 얘기구나. 그걸 봤어? 눈썰미가 빠른 사람이네. 하긴 B급 헌터 정도 되면 내 잔상 정도는 볼 수 있겠지.
"호위무사들은 호위진을 펼쳐라."
그 말과 동시에 검은 나무의 새순에서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뻗어져 천장에 박혔다. 그곳에는 불온한 기운이 뚝뚝 떨어졌다.
난 순간 리바이어던을 만날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불안했지. 힘과 불안감은 언제나 반비례한다. 내가 지금 힘이 없다고 느끼면, 불안감은 커지기 마련이다.
"아무도 도발하지 마라. 아직은 새순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를 그냥 보내줄 수도 있어."
집사는 나지막하게 우리에게만 들리게끔 말했다. 빽빽거리던 아이리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지 조용히 했고, 호위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장까지 뻗은 나무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들도 알겠지만, 나도 이 조짐을 알고 있다.
타락한 나무가 몬스터를 생산할 때의 상황이다.
팡!
커질 대로 커진 물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지더니 몬스터 한 마리가 나왔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점액이 찐득하게도 묻어 있었다.
"캬아악!"
지옥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은 그 목소리가 집사의 출발 신호라도 되듯 집사가 달려들었다.
그는 외줄 안경을 빙빙 휘두르더니 안경 부분으로 마수의 볼을 후렸다. 마수의 볼이 크게 한 점 뜯겨나갔다. 그의 안경은 이제 안경이 아니고 미니 철퇴 같은 느낌이었다.
몇몇 호위무사들이 집사를 도우려 움직이려고 했지만 집사가 버럭 외쳤다.
"호위진을 해체하지 마라! 오로지 중요한 건 영애뿐이다."
"집사, 괜찮아. 우리도 도울 수 있어."
"조용히 하십시오. 영애님. 지금은 비상 상황입니다."
집사의 말에 아이리가 입을 꾹 닫았다. 원작에서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는 빽빽 소리를 내질러야 되는데, 의외로 지르지 않았다.
그녀의 악독함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됐던가. 나는 살짝 의문을 표했지만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물방울들이 계속 부풀어 오르고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그저 그런 몬스터들뿐이었다.
물방울이 터지기 전에 집사는 물방울에 외줄 안경을 날렸고 물방울이 터지면 그 안에 점액덩어리로 범벅된 마물들의 시체가 있었다.
"이게 끝인 거야?"
"이 정도면 우리가 나서도 되겠는데?"
호위무사들이 주절거렸지만 이 상황에서 심각성을 느낀 건 나와 집사뿐인 것 같았다. 분명 이럴 리가 없다.
집사는 본능으로, 나는 책을 읽은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검은 나무가 얼마나 위험한지.
검은 나무는 곧 천장에 박힌 가지를 V자로 뻗어 왼쪽과 오른쪽에 박고, 계속 가지를 뻗어나갔다.
푹, 푹, 푹, 푹, 푹, 푹.
마치 부드러운 흙에 묘목을 심듯 작은 나뭇가지들이 엇갈려서 벽에 박힌다. 검은 나무의 맹렬한 기세에 집사도 몇 걸음 뺄 수밖에 없었다.
곧 나뭇가지는 우리의 앞에 촘촘히 거미줄처럼 쳐져 있게 되었다. 이건 내가 알기로 검은 나무의 방어였다.
난 순식간에 아이리 정면으로 가서 몸을 최대한 숙였다. 그 직후에 검은 나무의 중심에서 파장이 터지면서 엄청난 기세가 몰려왔다.
멍하니 발만 땅에 붙이고 있던 호위무사들은 날아가고, 살짝 감이 있어 앞으로 무게중심을 하고 있던 호위무사들은 간신히 버텼다. 나도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뒤를 슬쩍 보자, 아이리 역시 멍하니 있던 것이 내가 앞을 막아주지 않았으면 날아갔을 터였다.
"···천한 옌시 놈이, 누구 앞을 가로막느냐."
아이리는 떨면서 그런 말을 했다. 그래, 넌 원래 그런 년이니까 고맙다는 말도 들을 걸 생각도 안 했다.
그나저나 진짜 문제는 다음의 것이었다. 곧 나뭇가지의 틈에서 흐물흐물한 8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가 기어 나왔다. 몸통은 두 마디로 나눠져 있었고,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저 놈은 얼마나 강한 거지.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는 로맨스 판타지다. 주 묘사는 가테스와 마리나의 연애고, 남자주인공인 가테스는 그냥 강해서 무력적으로 부침을 겪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저 몬스터의 무력을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독자인 나는 힘든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심상치 않습니다!"
집사는 우리의 앞을 막아서고 외쳤다.
거미는 재빠르게 흐물거리는 다리를 뻗어 집사를 공격했다. 집사는 재빠르게 외줄 안경을 좌우로 잡아당겨 막으려고 했지만, 나는 보았다. 거미다리 끝에 칼날 같은 예기가 있다는 것을.
나는 반사적으로 나가서 단검으로 그 거미다리를 막았다. 아니, 막은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단검도, 나도 미약한 상태였다. 난 단검이 갈라지는 걸 눈으로 보고 거미다리가 내 정수리부터 가르려고 하는 걸 보았다. 난 곧바로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돌리고 뒤로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팔목이 반이 잘려 덜렁거렸다.
"큿!"
난 비명을 참으며 뒤로 빠져나갔다. 누군가가 나를 보며 멍하니 말했다.
"뭐, 뭐하는 놈이야, 저놈?"
지금은 대답해 줄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