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옌시의 짐꾼 (4) >
내가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검은 나무 앞에서 아이리가 울부짖는 장면. 그녀는 온갖 강한 척을 하고 다녔지만, 검은 나무 앞에서는 어쩌지 못할 정도로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내 생각엔, 여기서 그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설 속 트라우마가 터지는 장면에서는 이런 대사가 있었다.
- 다시, 모두를 잃는 건 싫단 말이야!
그렇다면, 아이리는 여기서 모두를 잃는단 말인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 모두 중에 나는 포함되어 있는 사람이니까.
거미가 다시 발을 내게로 뻗어온다. 피하는 건 무리가 없다. 팔이 좀 덜렁거리고 뜯어진 신경이 계속 고통을 주고 있지만 이 정도는 참을만하다.
"집사 아저씨, 그거 안경 좀 빌립시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아저씨의 안경을 갈취했다. 속도 하나는 지금 날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나는 벌어진 손목을 안경줄로 꿰매고 매듭은 안경알로 지었다. 손바닥을 쥐고 펴보니 손가락 마디가 한 쪽 밖에 안 닫혀 진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얼떨떨해 보이는 집사에게 난 또 다른 물음을 던졌다.
"집사 아저씨, 눈이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원래라면 나지만, 안경을 뺏겼으니까 아가씨겠지."
뭐야, 여기 호위무사들 아이리보다 약해? 그럼 여기 왜 데리고 온 건데. 좀 이상하잖아.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아이리 영애님!"
"···왜?"
나는 바로 아이리에게 다가간 다음, 멀쩡한 팔로 아이리의 목덜미를 쥐고 들어서 제일 시야가 탁 트인 곳으로 놔주었다. 그러니까, 정중앙에.
"너, 너, 뭐하는 짓이야?"
아이리가 완전 사색이 됐고, 집사 포함 호위무사들 역시 사색이 됐다. 괜찮아, 어그로는 내가 끌 거니까.
내가 그녀를 짐처럼 들자 모든 이가 나를 경악하듯이 바라보았다. 미안, 잠깐만 쓸게. 어차피 난 여기 사람도 아니니까. 아니, 여기는 계급사회니까 반역죄인가.
난 최대한 아이리에게 내 할 말을 전했다.
"지금부터 제가 벽에 글씨를 쓰고 다닐 겁니다. 그걸 큰 소리로 외쳐주세요. 모두 집중, 영애님만 하는 겁니다. 괜히 이런 상황에 목소리까지 겹치면 저 헷갈려요. 트라프비체 언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샤아악!
눈으로 보기보다 귀로 먼저 듣고 반응한다. 귀로 먼저 듣기보다 몸이 반응하면 더 좋다. 하지만 나는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다.
그 바람에 아이리 귓전에 몬스터의 다리가 스쳤다.
"너, 이 나쁜놈!"
아직은 욕 많이 안 배웠나보네. 너 별명이 욕설 기관단총이었는데.
그래도 예상대로 된 건, 거미가 나를 여기서 일순위로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판단한 듯하다. 다른 사람한테 어그로 끌리는 것까지 생각하면 끔찍하지. 그것까지 막아줘야 되잖아.
난 마물의 공격을 끌고 다니며 성하지 않은 손으로 글씨를 썼다. 너무 가까이 접근한다 치면 단검으로 한 번씩 쳐냈다.
원래 내가 좀 명필이라 싸인도 잘 나갔는데, 손목이 덜렁거리니까 글씨가 괴발개발이다. 집중력 낮은 학생이 억지로 깜지를 쓸 때 나오는 필체다.
"저 새끼 뭐하는 거야?"
이상할 만도 하지. 귀하디 귀한 공작영애를 중앙에 두고 벽에는 이상한 문신을 그리고 있으니.
난 등 뒤를 바라보았다. 거미발은 여전히 내 등을 향해 쏘아지고 있으며, 검은 나무에 걸쳐있는 거미는 다리를 하나씩 바깥으로 꺼내고 있었다.
"꺄악!"
갑자기 아이리가 비명을 질렀다. 거미가 이제 모든 다리를 이용해 나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거미의 입을 중심으로 8개의 다리가 일제히 펴졌다. 귀족 영애인 아이리가 직관하기는 징그러운 광경이었다.
"조용히 하십시오. 그러다 타게팅 바뀝니다."
내가 말하자 아이리가 입을 꾹 닫았다. 옳지. 그렇게 있어라.
난 계속 내가 써놓고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의 문자를 계속 썼다. 손목이 반이 나갔으니 어쩔 수 없지. 나와 아이리의 고초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벽에는 이상한 문자들이 적혀졌다.
"쟤 지금 뭐하는 거야?"
"단어 쓰는 것 같은데?"
"하나도 못 알아보겠다."
하나는 알아봐야지. 그러라고 쓰는 건데. 난 지금 내 스킬창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적어주고 있는 거다. 아이리는 체념한 듯 내가 쓰고 있는 벽들을 바라보고 있다.
"너 글씨 진짜 더럽게 못 쓰네.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 팔목이나 보시지요."
"아."
아이리가 내 덜렁거리는 팔목을 보고 얼굴을 찡그린 다음에 돌린다. 너 사람 구하려다 다친 건데 그런 얼굴을 하면 쓰나.
"알아보는 것부터 말해줘요."
"내가 왜?"
"안 그러면 여기서 다 죽을 테니까. 거미 속도 못 봤어요?"
아이리는 고집을 부렸다. 이 상황에서도 고집을 부리다니 정말 내추럴 본 악역영애 인정이다.
"···저기 피 묻은 글씨는 사체 해체라는 뜻."
"어디요, 아. 오케이."
【스킬 : 사체 해체 Lv MAX 개방】
【스킬 : 사체 해체 Lv MAX 사용 중】
이 스킬을 가지고 있으면 더욱 부드럽게 썰리겠지. 아까는 피육 자르는 것도 엄청 힘들게 했는데. 그때의 시체 해체는 진짜 오로지 내 짬으로만 한 거다.
"계속 말해요. 계속. 아무 거나."
아이리가 등 뒤를 바라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거미의 촉수 같은 발이 날카로운 창의 모양을 하고 달려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리에 가려져서 잘 안 보이거든? 이런 미친 상황에서 하나 읽어준 것도 감사해야지."
"읽을 기회 한 번 드립니다."
"뭐?"
나는 그녀 위의 천장에 발을 박은 다음 잠깐 멈췄다. 사방에서 거미발이 날아온다.
"읽어!"
최대한, 최대한 끌자. 그녀의 시야를 가렸던 8개의 다리가 모두 내게로 모인다.
내 반말에도 그녀가 뭐라 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빠르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지금 정도면 아직은 괜찮다. 지금은 좀 힘든데. 아니, 지금 이 정도면 많이 힘든데.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이러다 죽겠는데.
"환영, 환영 검술!"
그녀의 입에서 드디어 공격형 스킬이 나왔다.
나는 땅으로 떨어지고, 아이리를 내 품 속으로 돌린 다음 빠져나갔다. 늦게 빠져 나와 거미발들이 내 전신에 깊게 긁혀 땅에 떨어질 때는 난 피투성이였다.
【?? 스킬 : 환영 검술 Lv 7 개방】
【?? 스킬 : 환영 검술 Lv 7 사용 중】
됐네. 이거면 됐지.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뺀 다음 그녀를 다시 호위무사가 있는 쪽에 갖다 놓았다.
내가 그녀를 놓자마자 아이리는 현기증이 난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한 팔로 은빛 검을 한 번 휘둘러보았다. 가볍고, 무게중심이 잘 갖춰져 있다. 이 정도면 확실히 명검이라 할 만하다.
거미의 발이 내게 쏟아져 내려온다. 근데 내가 했던 검술이 환영 검술이었던가. 그냥 나는 내가 편한 대로 싸운 것밖에 없는데. 내가 내 검술을 환영 검술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아니고 말이야.
거미의 발들이 순식간에 잘려나간다. 다리만 움직이는 소리만 내던 거미가 드디어 비명을 지른다.
"샤아아아아악!"
거미의 발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흩뿌려진 발이 어떤 호위무사 발 앞에 떨어진 듯 그는 남자치고는 높은 비명을 질렀다. 다시 보니 머리를 질끈 묶은 그 놈 맞다. 적당히 꼴불견이어라. 적당히.
"이거 하나면 충분하겠다."
내가 쓰던 검술 맞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아직 내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고, 부상도 많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무뎌질 차례만 남았다.
이 정도면 많은 대가를 치렀다. 이제는 빠른 승리를 쟁취할 차례다.
"들어와, 이 새끼야!"
내가 감명 깊게 본 영화의 대사가 울려 퍼진다. 그냥 내가 레이드할 때의 말버릇이다. 이런 거라도 있으면 좀 재미있게 레이드할 수 있나 싶어서. 심지어 거미가 들어오지 않고 내가 들어갔다.
서걱.
그러나 뭐 재미없지. 몇 십 년 을 한 건데 재미있겠냐. 거미의 입부터 뚱뚱한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졌는데, 집사가 기함을 했다.
"그렇게 썰면 안···"
이미 썰었는데. 썰고 나서 말하면 어떡하라고.
"젠장, 모두 방어태세! 짐꾼, 너도!"
갈라진 거미의 몸에서 보라색 안개가 자욱하게 퍼진다. 안개는 기체가 아니고 가는 실처럼 퍼져 벽에 달라붙고는, 부풀어 올랐다.
곧 오만가지 글씨가 적힌 벽들은 보라색 종기에 먹혀버린 다음 계속 부풀어 올랐다. 이거 저러다 터지면 어떻게 해. 난 슬쩍 손을 갔다 대봤지만 타는 듯한 고통에 손을 빼버리고 말았다.
"저기에 잠식되면 죽는다!"
만약 아이리가 방어 스킬 하나만 말해줬어도 저런 안개에 죽지는 않을 텐데, 저런 도움 안 되는 년을 봤나. 난 어쨌든 화재가 난 것처럼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허나 벽의 종기는 점점 부풀어 올랐고, 청색 심줄이 보여서 곧 터지기 직전이었다.
쾅!
그때, 난 종기 하나가 터져서 안개가 뿌려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가토스 2황자다! 다 탈출하라!"
저기서 아이리와 어울릴 것 같은 금발녹안의 미남자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외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중갑을 입은 기사들이 한 무더기가 있었다.
호위무사들과 아이리와 집사는 재빨리 나가고, 나는 맨 뒤를 지키며 나갔다. 내가 나가자 가토스는 문을 닫았다.
그때, 거품이 터지고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방 안에서 계속 났다. 문 너머로 보라색 물이 흐르고, 문이 연기를 내며 부식되었다.
"빨리 나가라, 빨리!"
가토스는 외쳤다. 어떻게 된 일이야. 가토스는 나도 아는 사람이다. 이 소설의 서브 남주, 가토스 황자가 아닌가. 여기 와서 처음 보는 게 악역 영애고, 두 번째로 보는 게 서브 남주라니. 뭔가 연예인을 보는 느낌이다.
우리는 15층부터 내리 달렸다. 전방에는 가토스가 서서 리젠된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후방에는 집사가 서서 안개의 속도를 보고했다.
결국 안개는 3층 즈음에서 멈추었다. 그래, 뭐 무한동력도 아니고 계속 나오겠어. 우리는 속도를 줄이며 바깥 공기를 마셨다.
"푸하악, 푸헤엑!"
가뜩이나 숨을 참고 있었던 데다가, 갑자기 달리게 된 공작저의 사람들은 폐 끝까지 숨을 긁어모아 뱉어댔다.
"어디 다친데들 없나?"
"전 괜찮습니다. 황자 저하."
아이리가 나한테 대한 것과 정반대로 예를 갖추며 말했다. 트라프비체 제국의 예의. 왼쪽으로 옷의 옆을 당기고 오른쪽 팔로 배를 대며 숙이는 인사. 귀족의 예법이다.
"여기, 여기 다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급하게 말했다. 누가 다쳤어? 난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외친 사람은 집사였고, 집사가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맞다. 나 다쳤지. 집사의 외줄 안경으로 억지로 꿰맨 곳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고, 그 사이로는 피가 철철 새고 있었다. 그래도 참을 만은 했다. 헌터 시절에 워낙 다쳐봤어야지.
결국 나중에는 리바이어던에 먹혀서 죽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때 진짜, 엄청 아프게 죽었다. 리바이어던의 이빨에 반 토막 난 다음에, 상반신만 그 놈 위액에서 5분을 살아 있었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S급 헌터의 생명력이 처음으로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손을 못 쓸 수도 있겠군···"
가토스 황자는 내게 바로 달려와 상처를 자세히 보고는 침음을 흘렸다.
가토스 황자는 서브 남주의 속성에서 상냥함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자주인공 입장에서 약간 힐링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상냥함은 나 같은 짐꾼에도 해당되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일단 내 힐로 응급처치를 해주지. 공작저의 의사는 있나?"
"아, 지금 공작님과 함께 토벌을 나가셔서···"
그래서 1급 기사들이 안 온 거네. 어떻게 된 일인지 대강 이해는 된다. 그래도 이 정도도 못 고치나. 나는 별로 걱정은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 여자주인공이 가히 신의라고 불릴 만 하거든.
"그럼 여기서는 응급처치만 하고 치료는 황도를 가서 해야겠군."
그 말에 모두가 놀랐다. 무슨 옌시 짐꾼에게 그 정도까지 해주냐는 눈빛이었다. 여기 트라프비체의 풍토는 대략 알지. 트라프비체와 옌시는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트라프비체는 서양이라면, 옌시는 동양풍의 느낌. 나는 아마 거울은 못 봤지만 옌시, 옌시 거리는 것 보니 동양사람으로 환생했나보다. 아니면 아직 꿈일 수도 있고.
"마차를 대기해놔라. 아이리 영애, 황도에서 검은 파장을 조사해 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전하, 저희 공작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점 유감입니다."
"영애가 벌인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잖소. 우리도 황도에서 검은 기운을 느끼고 바로 출발한 거요. 사망자가 없으니 그래도 다행이오."
악역영애 특징. 황자 앞에서는 요조숙녀다. 어쨌든 원작에서 아이리는 가토스 황자에게 구함 받아서 살았던 거였었네. 퍼즐이 맞춰진다.
내가 불편한 의전을 받으며 황자와 같은 마차에 타려고 하자, 뜬금없이 집사가 손을 들었다.
"저희 공작가가 다치게 한 사람입니다. 제가 책임자로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집사?"
아이리마저 뭔 행동이냐는 듯 집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집사는 아이리한테 무례하게도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토스 황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들어는 주마, 하는 식이었다.
결국 기사들과, 라피테스 공작령의 집사와, 가토스 황자와, 나의 불편한 동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