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짐꾼 쟁탈전 - 공작령 (1) >
"집사,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내 마차로 들어오겠소?"
가토스는 나를 계속 응급처치하면서 바깥에서 갈색 말을 타는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는 당연히 거절했다.
"신분이 다른데, 어찌 같은 높이를 가진 자리에 앉겠습니까. 저희 짐꾼을 태워주시는 것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왜 저희 짐꾼이야. 이거 웃긴 놈이네. 나 그냥 비정규직이잖아. 그거 한 번 구해줬다고 '우리' 사람 된 거냐.
난 그냥 가토스가 지속적으로 힐 하는 것에서 눈을 떼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완연한 중세 유럽의 풍경이었다. 첨탑이 높게 솟아있고, 바로크, 로코코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재해있다.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의 배경이 그저 작가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중세의 판타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증이 덜 되어 있다는 고증인가.
"그저 내가 궁금해서 그렇지."
"뭘 말입니까?"
"이 짐꾼이 공작령에서 어떤 존재인지."
가토스가 여전히 산들바람 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령의 강령은 이것 하나 아닌가. 경제적으로 행동하라. 지금 자네의 행동은, 경제적으로 보인다네."
"저희도 인간의 도리는 다 합니다."
"그렇군. 내가 실언을 했어."
가토스는 그 말을 하고 커튼을 쳤다. 뭐, 최선을 다해서 힐을 해주고 있기는 하다. 심지어 내게 힐을 해주는 사람이 어디 허접한 신관의 사제가 아니고 이 나라의 제 2황자다. 그런데도 힐량이 약한 건 약한 거다.
"괜찮느냐? 신음 한 번 안 흘리는 게 대단하구나."
가토스가 내게 물었다. 가토스는 착한 사람이지. 안 친해져서 좋을 것 없다. 물론 친해질 수는 없겠지. 그냥 이 사람이 따뜻한 사람이라 날 치유해주는 것일 뿐, 그 외에 연이 있으련가 모르겠다.
"버틸 만 합니다."
"기특하구나. 아직 어린 나이 같은데. 혹시 나이를 물어봐도 되겠느냐?"
스물 여덟···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내 외형을 모르는 상황이지. 난 그냥 새로운 선택을 하기로 했다.
"모릅니다."
"그래? 옌시에서 여기로는 단독으로 넘어온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흠, 옌시의 상황이 안 좋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작가님은 트라프비체만 거의 묘사 하셨는데. 내가 옌시에 대해서 아는 정도는 트라프비체 사람들이 옌시를 차별한다는 것 정도다.
"네 이름은 무어냐?"
"에퍼리 션입니다."
"환영이라는 뜻이구나."
뭐야, 깜짝 놀랐다.
"어찌 아십니까?"
"고대 옌시어로 알고 있다. 언어 공부를 좋아해서."
황태자님이니까 공부도 많이 하셨네. 그나저나 영어가 고대 옌시어라. 그냥 내가 아는 상식이 뒤죽박죽 되어있다.
"부모는 있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 저 세상에도 없고.
"그렇구나.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겠다. 환자한테 내가 실례를 저질렀구나."
거참, 황태자라는 놈이 실례라는 말을 달고 사네. 그게 더 불편한 것인지도 모르고. 특히 이런 계급사회에서는 더 불편하다.
내가 가토스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어서 그렇지 만약 그냥 옌시 짐꾼이었으면 황송해 죽을라고 했을 거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황도로 도착했다.
나는 곧바로 치료를 받았다. 여기는 마법이 있는 세계. 손목이 반 정도 날아간 정도는 쉽게 치유가 가능하다. 물론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그 돈은 공작가의 집사가 모두 지불했다. 엿듣기로는 한 3천 골드 정도 되었다고 했나. 여기 1골드가 우리 세계에서 십만 원 정도 된다고 했으니, 내 손목에만 3억을 쓴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가토스가 말했지만, 나도 그 이전부터 라피테스 공작가의 악명을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득 우선주의.
보통 과도하게 이득을 취하려면 명분이 필요한데, 이들에게 명분은 공작가라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니 주변의 이득을 모두 긁어먹는 것이다. 아이리의 성격 형성도 어쩌면 거기서 영향을 받았겠지.
그러니까, 그 집사가 3억을 줘서 내 손목을 고쳐 줄 의리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난 그게 궁금했다.
"우리를 구하려다 다친 건데, 어찌 이 푼돈도 지불하지 못하겠나?"
"그런가요?"
3억이 푼돈인 배포는 그렇다 쳐도, 왜 이렇게 찜찜하지. 애초에 이 집사라는 사람은 소설 속에 나오지도 않으니 속내를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집사는 소설에서는 이미 죽었을 테니까. 내가 살려준 거다.
"이게 빚은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지. 왜 이렇게 사람이 의심이 많은가."
집사가 살짝 짜증을 내려다 말았다. 얼씨구, 짜증까지 참아. 여기서는 천민 그 이하의 취급을 받는 옌시 사람, 그것도 짐꾼한테. 공작가의 집사가. 뭔가 더 수상해진다.
"대신, 제안이 하나 있네."
그러면 그렇지. 꿍꿍이가 없으면 3억을 쾌척할 리가 없지. 나는 일단 들어나 보기로 했다.
"무슨 제안이요?"
"공작령에서 일하게. 봉급은 내가 공작님께 말씀드려서 최대한 많이 받게끔 해놓겠네."
여기는 최저시급도 없는 세계. 그저 하인은 주는 대로 받는 것이라 비교할 것도 없다. 물론 나도 이 세계의 실정 같은 건 모르고.
애초에 가테스와 마리나가 노는 데 돈 얘기가 왜 나오겠냐고. 황자랑 성녀의 데이트인데 서로 더치페이 하는 게 나오겠어?
"제가 뭔 일을 하는 건데요?"
"그냥 공작령 소속이 되는 거네. 자네의 업무는 내가 찾아보기로 하지."
막무가내 스카우트네. 업무도 모르고, 급여도 모르고, 그저 사람만 보고 스카우트 하겠다는 건데, 그저 내가 아이리를 위해 손목을 내줬다고 해도 그게 이렇게까지 되는 건가. 아니면 이 세계의 불문율을 내가 아직 모르는 걸 수도 있다.
"치료는 다 끝났나?"
집사가 나와 말하고 있던 와중 가토스 황자가 커튼을 치고 들어왔다. 뭐야, 너 아직도 안 가고 있었어? 얼마나 착한건데.
"음, 신관이 뭐라고 하든가?"
"네, 황자 저하. 치료는 성공적으로 됐으나 신경이 붙으려면 시간이 좀 걸려서 당분간 무리는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군."
마치 환자 보호자 둘이서 대화하는 느낌이네. 난 이 상황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일단 조연을 만난 건 좋은데, 나도 어느 정도 나를 파악하고는 움직여야 될 거 아니야. 스킬도 아직 다 개방 못 했는데.
"그래. 집사, 내가 잠깐 이 소년과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나?"
"네? 어떤··· 아닙니다. 나가 있겠습니다."
집사가 반항하려다 가토스 황자의 표정을 보고 바로 줄행랑을 쳤다. 아무리 가토스 황자가 착하다 하더라도 황자는 황자. 그의 명예는 그의 것만이 아니다. 트라프비체의 것이지.
또 이런 클리셰도 있잖아. 가토스 황자 같은 사람이 화내면 엄청 무섭다고. 난 한 번 봤는데, 진짜 무섭더라고. 집사는 잘 빠진 거다.
"손목은 괜찮나?"
"괜찮습니다."
나는 손목을 그 앞에서 돌려보면서 말했다.
"자네 치료비는 황도 측에서 지불하려고 했는데, 공작가 집사가 굳이 자신들이 내겠다는 군. 세금 내라고 할 때는 그렇게 인색하더니, 왜 그러는 지 모르겠어."
가토스가 푸념을 했다. 그 모습이 조금 소시민적이라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래, 집사랑은 무슨 얘기를 했지?"
나는 그때 살짝 느꼈다. 가토스 눈빛에 살짝 날카로움이 깃드는 걸. 무언가를 노리는 듯한 눈빛이다. 난 그때 거짓말을 할까, 진실을 말할까 잠깐 고민했다.
근데 나도 살다보며 느낀 점이 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면 굳이 안 해도 된다는 것이며, 이유가 있더라도 내가 거짓말이 들켰을 때 무마할 수 있는 상대한테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가토스 황자에게 무마할 입지도 없다. 난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집사가 내게 공작령의 일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가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왜 알고 있어. 뭐 눈치라도 줬었나. 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단지 그 행동이 의심될 뿐이지.
"무슨 일?"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공작령으로 들어오라고만 하더군요."
"그것 참 의심스러운 일이군."
대놓고 의심스럽다고 말하네. 원래 설정 상 2황자 측과 공작가 측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제1황자와 제2황자는 제위 다툼을 벌이게 되어 있으며, 각자 귀족들은 라인 따라 줄줄이 선다는 것.
라피테스 공작가는 제1황자인 가테스 황자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기수였다.
"나도 그럼 제안하나 해도 되겠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내가 다 불안해진다. 왠지 지금은 내가 어떤 말이 나올 줄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밑에서 일하게. 봉급은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아무 것도 아닌 저를 이렇게 챙겨주려고 하시니 당황스럽습니다."
나는 지금 보여준 것도 없는데. 아, 물론 거미를 베기는 했지. 집사는 그것 때문에 그렇다 쳐도 황자는 내가 거미를 썬 걸 본 적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걸까. 그냥 황자의 의무로서 허름한 자를 구휼하는 게 취미인가.
"제가 가면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누군가의 시종을 맡게 되겠지. 나는 아니야. 난 시종이 지금도 많거든."
그래도 할 일을 명확하게 말해주는 건 마음에 드네.
"저는 트라프비체의 예법을 정확히 모릅니다. 사실 문자도 모릅니다."
"말은 잘하는데? 아, 그럴 수도 있지."
황자는 잠깐 허공을 바라보더니 내게 한 가지 제의를 더했다.
"문자와 예의까지 알려주지. 이건 어떤가."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진짜 궁금하다. 대답을 모호하게 했던 집사와는 달리 황자는 즉각 답을 내놓았다.
"자네는 남을 위해 희생하려는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은 드물어. 자네가 황도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황도에서만큼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게 어려운 곳은 없다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가. 하긴, 황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아첨하려는 부류밖에 없을 테니까. 진실을 파악하기가 어렵겠지.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을 쓰겠다라.
"나는 사람 보는 눈이 형님보다는 없지. 형님은 냉철한 사람이야. 그에 비하면 내 눈은 흐리멍텅하지."
가토스는 자신의 빛나는 녹안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뜨일 정도라면, 자네는 어지간히 커다란 원석이라는 거야. 집사도 그걸 알아본 셈이지."
"그렇습니까."
가토스는 나름대로 내게 납득할만한 답을 주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선택을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산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숨기고 있는 삶의 목표가 있다.
그건 바로 삶이다. 모든 삶의 목표는 삶이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이미 한 번 잃어버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원동력으로 움직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생각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내 말에 가토스는 일어났다.
"부담을 줘서 미안하군. 어쩌면 부담감 때문에 신경 붙는 속도가 느려질 수도 있겠어."
"전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더 내 수하로 들이고 싶군."
가토스는 웃으며 치료실을 나갔다. 이제 나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일단 지렁이들이 가득한 스킬창을 열어보았다. 역시 내가 아는 단어가 아닌 스킬들은 해금되어 있지 않았다. 답답하기 짝이 없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스킬창은 굉장히 다용도다. 여기서 전자책도 읽을 수 있고, 마법의 영창도 적어둘 수 있다.
자신만의 편안한 비밀 메모장이라고 할까. 이 중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테크놀로지다.
나는 스킬창과 씨름을 하며 기능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터치도 되네. 난 손바닥을 대어 밀어보았다. 책꽂이라는 창이 나왔다.
책꽂이가 있으면 뭐해. 아마 여기 책일 텐데. 난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책꽂이의 목록을 보고 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것들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