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짐꾼 쟁탈전 - 공작령 (2) >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난 책을 대충 읽는다. 솔직히 말하면 웹소설 독자가 모두 그렇잖아. 정독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런 책을 읽을 때 하는 거지,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일 때는 속독모드지.
웹소설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장르 특성상 그렇다는 거지. 물론 웹소설도 정독하는 사람 많은 거 안다. 그냥 내 버릇이 그렇다고.
그런 점에서 내 스킬북 책꽂이에 있는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는 내게는 단비와도 같다. 마치 절대평가인 과목의 중간고사를 오픈북으로 친다는 느낌이야.
"별의 별 책이 다 있네."
심지어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 뿐만이 아니라 내가 전생에서 읽은 책들이 모두 꽂혀져 있다.
내가 S급 헌터를 하면서, 말년에 하라는 의뢰는 안 하고 책만 주구장창 읽었거든. 물론 아냐 순문학.
"성문기본영단어는 뭐냐?"
이건 또 뭐야. 내가 S급 재능을 발현하기 전에 수능 공부를 할 때 읽었던 책인데. 아, 설마. 나는 깨달았다.
그래, 이 세계관에서 한글을 영어로 바꿔주는 그런 편한 기능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환영을 영어로 뭐였지, 하고 생각할 때 에퍼리션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건 이 성문기본영단어였던 것이다. 스킬북 책꽂이에 있던 거니 자동으로 발현이 된 거지.
나는 성문종합영단어를 폈다. 그곳에는 내가 읽던 웹소설 전자책 뷰어 같은 레이아웃의 틀이 떴다.
【환영 : Apparition [? æp?? r?? n]】
여기 있네. 환영이라는 뜻. 다른 단어들도 많다. 난 보기 만해도 지루해져 성문기본영단어를 닫았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가 다시 읽어야 될 책은 이 수많은 책 중에서도 명확하다. 바로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리가 너무 앳되보였거든.
적어도 마리나가 스무살은 되었고, 아이리도 그쯤 되었을 텐데. 지금 아이리의 나이는 고작해야 중학생,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이봐, 황자님이 뭐라 말씀하시던가?"
누군가가 커튼을 확 치고 들어왔다. 아, 지금 복잡하구만 갑자기 들어오고 난리. 난 짜증을 확 냈다.
"알 거 없잖습니까. 전 안정이 필요하니 좀 나가주시면 안 됩니까?"
솔직히 말하고서도 난 당황했다. 난 여기서 그저 옌시 비정규직 짐꾼, 저 사람은 그래도 무력도 한가닥 하는 걸 보니 공작가에서도 총애 받는 집사.
하지만 집사는 내 말에 깨갱하며 바로 짜졌다. 진짜 내가 그렇게 필요한 인재인가.
"알았네. 잘 쉬게."
"죄송합니다. 지금 다쳐서 신경이 민감합니다."
"이해하지. 내가 이해 안 하면 어찌하겠나. 자네가 없었으면 난 죽은 목숨인 걸 아네."
알면 다행이고. 나는 아프지 않은 손으로 휘휘 저어서 집사를 쫓아냈다. 내가 생각해도 무례함의 극치다. 여기는 계급사회니까. 적어도 저 집사는 공작가의 집사니까 남작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닌가. 내가 중세시대 체계를 어떻게 알아. 난 민주사회의 일원인 걸 어쩌라고. 안 보이면 장관은 물론이고 대통령도 씹어대는 나라에서 왔다니까. 그런 내 본질은 쉬이 바뀌는 게 아니었다.
"아, 아예 여기 들어오는 사람 좀 막아주시면 안 됩니까? 좀 혼자 안정을 취하고 싶어서요."
"그러도록 하지."
그래도 아주 공작가 집사 부려먹는 맛이 쏠쏠하네. 내가 마치 공작이 된 기분이야. 난 다시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를 켰다.
그리고 그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미쳐버린 만연체 문장이라도 되는 만큼 문장을 하나씩 곱씹으며 계속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집사, 무슨 짐꾼 하나 다쳤다고 황도까지 가는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먼저 검은 나무의 조사를 황도에 맡기지 말고 우리가 하는 게 우선 아닌가? 일처리가 왜 그래?
"중요한 일입니다."
집사는 마법 구체를 이용해 공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법 구체인만큼 사람의 얼굴이 볼록하게 나와서 공작의 얼굴이 웃기게도 나왔지만 집사는 절대로 웃지 않았다.
-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라. 검은 나무는 위험한 만큼 기회인 걸 알지? 그걸 황도에 날름 줄만큼의 중요한 일이라?
"인재를 봤습니다."
- 뭔 인재?
"이번에 싼 값에 용병으로 고용한 옌시의 짐꾼 있지 않습니까. 그 자식이 심상치 않습니다."
- 진짜 죽고 싶나? 뭔 옌시 짐꾼놈이 지금 검은 나무보다 중요하다고?
라피테스 공작의 싸늘한 목소리가 집사를 강타했다. 하지만 집사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아는 걸 전부 말한다면 공작 역시 납득할 걸 알기 때문이었다.
"스킬을 100가지는 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 ···뭐?
황당하다는 듯한 공작의 음성이 울린다. 공작이 이어 말했다.
- 말이 되나? 아니, 말이 되긴 돼. 근데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지?
"봤습니다."
집사가 본 건 그의 스킬창이 아니었다. 그가 벽에 휘갈긴 이름들이었다. 그는 분명 공허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명 내면을 보는 눈. 스킬창을 볼 때는 무언가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초점은 명확하다. 그는 내면을 보는 눈을 하며 벽에다 무언가를 계속 휘갈겼다.
처음에는 집사도 그냥 뭔 이상한 짓인가 했다. 그것도 귀하디귀한 영애를 붙들고 하는 짓이라니. 허나 그건 글자가 굉장히 더럽다 뿐이지 트라프비체 문자였다.
그는 스킬창을 보고 자신의 스킬을 계속 썼던 것이었다. 벽에다. 왜냐하면 읽을 수 없으니까. 옌시 사람이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도 그것이었다. 트라프비체 언어를 모르면 신의 축복인 스킬을 사용할 수도 없으니까.
- 무슨 스킬이 있었는데?
공작의 물음에 집사는 잘 대답할 수 없었다. 안경도 그때는 없었고, 글씨가 너무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알아본 스킬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자는 무조건 잡아야 될 사람이었다. 집사는 확신했다.
"제가 읽을 수 없는 스킬도 있었습니다. 아마 고유명사인 듯합니다."
- 고유명사? 고유 스킬이군.
공작의 흥분된 음성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까의 차가움과는 결이 다른 차가움이었다. 아까는 불타는 얼음이었다면, 지금은 차가운 불길이었다.
"제가 아는 건, 환영검술이라는 이상한 스킬과, 신속한 움직임, 사체 해체, 리더십 등이었습니다."
- 말도 안 되는 군. 리더십 스킬은 거의 한 대대를 이끌어야 얻을 수 있는 스킬이 아닌가.
"분명 속사정이 있는 사람인 듯합니다. 그리고 강합니다. 검은 나무의 가디언도 그가 격퇴했습니다."
- 그래. 그건 들었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군.
공작이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면 용납이 된다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집사는 여기가 분수령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설득은 시켰다. 이제는 조건의 차례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 뭔가.
"가토스 제2황자가 그를 노리고 있습니다."
- 하. 그 놈은 당최 도움이 안 되는 군. 그도 그가 스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걸 아는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다만 가토스 황자가 그런 사람을 챙겨주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 젠장.
공작이 탄식했다. 공작과 가토스 황자는 마치 대륙의 양극점에서 태어난 듯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 일단 그 자를 한 번 보고 싶군. 어떻게든 공작령으로 데려와.
"조건을 어떻게 제시하면 되겠습니까?"
- 내가 '어떻게든' 이라 말하지 않았나?
"알겠습니다."
집사 앞의 마법구체는 그렇게 검게 물들었다. 공작에서 일방적으로 끊은 것이다. 자, 어떻게든, 이라. 이런 조건을 준 공작은 오랜만인데.
이 말을 들었을 때 집사가 공작의 신뢰를 배신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그저 자신의 것도 아닌 공작저의 돈을 퍼주면 되니까.
그렇지만, 그 옌시의 짐꾼은 뭔가 꺼림칙했다. 애초에 그 능력을 가지고 몰랐다는 것도 웃기고, 던전에서 짐꾼이나 사체 해체를 한다는 것도 말도 안 된다.
"어떻게든."
집사는 공작의 키워드 단어를 되뇌었다. 어떻게든, 이면 된다는 거겠지.
지금 내 상황을 살펴보자. 난 트라프비체 언어를 모른다. 일단 이것을 아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내 힘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다지 어려운 관문도 아닐 테다. 그냥 이러면 해결 된다.
짝, 짝!
"집사님?"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내가 존댓말을 하고 있고, 집사가 반말을 하고 있지만 갑을 관계는 확실하다. 집사는 왠지는 몰라도 내 방문 앞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고대 옌시어-트라프비체어 사전을 좀 보고 싶은데요."
"그게 왜 필요한가? 그건 언어학자들이나 공부하는···"
"그냥 사오면 안 되나요?"
"알겠네."
잘했어. 알프레도. 네 이름은 모르지만 일단 내 안에서는 알프레도로 하는 거로 합시다. 집사 이름은 알프레도가 제격이니까.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아 그는 내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셔도 돼요."
그의 표정은 평안하기 그지없다. 역시 프로 집사. 내가 띠꺼울 만도 한데, 그의 표정은 마치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표정이다.
"더 필요한 것 있나?"
그는 내게 두꺼운 고대 옌시어-트라프비체어 사전을 건네면서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나가려고 할 때 내가 물었다.
"이 사전 제 자비 부담입니까?"
뒤에 금액 보니까 1골드 99실버라고 되어있는데, 19만 9천원아니야. 좀 비싼데. 하긴 사전이 좀 비싸긴 하지.
집사는 아주 사람 좋은 웃음을 뗬다.
"그럴 리가 있나. 공작령에서 대는 걸세."
"그럼 로맨스 소설책 좀 사다줘요. 언어 공부 좀 하게. 원래 언어 공부는 소설책으로 해야 빨리 늘거든요."
"아하, 알겠네."
이래도 표정 안 굳혀? 독하다, 독해. 나는 싱긋 웃으며 집사를 배웅했다. 곧 내 침대 옆에는 로맨스 소설 5권이 쌓였다.
자. 난 이제 스킬창을 켰다. 성문기본영단어와 트라프비체-고대 옌시어, 즉 영어-트라프비체어 사전. 근 10년을 놓았던 영어와 새로운 언어의 벽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 팔은 다 나았다. 뭐, 별 것도 없지. 솔직히 이 정도면 S급 헌터의 스킬을 다 찾으면 자연치유 될 정도인데. 괜히 3억이나 썼어. 어휴.
"그래, 이 정도면 오래 기다린 것 같군."
"왔나?"
내 치료실 앞에는 가토스 황자와 가칭 알프레도가 날 반겼다. 알프레도와 가토스 황자는 서로 마주치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물론 알프레도는 바로 눈을 깔았지만, 그 의도는 정확히 전달되었다.
"집사는 왜 아직도 안 돌아갔지? 공작령에서 의무는 다 하지 않았나?"
"황자님 역시, 집무가 밀려있으신 걸로 압니다."
"하하. 난 이 자에게 볼 일이 있어서."
"저도 그러합니다."
난 천생 여자는 안 꼬일 운명인가. 이 둘이 여자였으면 진짜 난 행복했을 텐데. 아, 여기 로맨스판타지 세계 아니야. 그러면 예쁜 귀족 영애들도 많을 거고.
그럼 나는 괜히 헌터 이런 거 안 하고 동영상이나 만들어서 커플 크리에이터 이런 걸로 살고 싶은데? 몬스터 잡는 것도 은근히 3D 직업이라고.
"그래, 결정은 했나?"
"그래, 결정은 했나?"
두 사람의 말이 겹친다. 뭐야, 메아리도 아니고. 좌우로 똑같은 말이 다른 목소리로 들리니 마치 음향 시설 좋은 영화관이라도 온 것 같다.
"음, 무슨 결정 말이지?"
"무슨 결정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전하?"
대충 나에게 러브콜을 날린 건 둘 다 알고 있을 텐데. 견제 하는 거 봐라. 나는 사실 마음의 결정을 했다.
"결정은 했습니다."
내가 그들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기대에 가득 찬 시선이 모였다. 아, 부담스러워. 이런 시선, S급 헌터 때 많이 받아보기는 했지만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실 전 입신양명이 꿈입니다. 옌시 사람이지만, 트라프비체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실 거짓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밖에 할 게 없다.
"그렇다면 황도만큼 적합한 곳도 없군."
"공작령에서는 자네를 기사로 만들어 준남작까지 만들어 줄 수 있다네."
"겨우 준남작?"
황자와 알프레도의 눈이 다시 짧게 부딪친다. 내가 뭐라고 이런담.
"그래서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릴 게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의뢰를 받을 때 쓰는 수작이기는 하지. 어이, 계급사회에서 계급으로만 밀어붙이던 사람들이 민주사회의 협상방법은 알려나 몰라.
당신들 보다 내가 협상기술은 훨씬 발달되어 있을 걸. 내가 단어사전을 공부하면서 제일 많이 찾았던 단어가 뭔지 알아?
【스킬 : 협상 Lv MAX 사용 중】
꽤 어려운 단어라 한참 찾았다. 내 스킬이 가미된 기름진 혀가 날렵하게 움직인다.
"역제안을 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