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짐꾼 쟁탈전 - 공작령 (3) >
"역제안?"
"처음 들어보는 단어군."
그럴 수도 있나. 제안을 하면 당연히 역제안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사실 여기는 제안이라는 단어와 지시라는 단어가 혼용되는 계급사회이기는 하지.
"1주일."
"1주일?"
"1주일 동안 번갈아서 있어보겠습니다. 제가 갈 곳이 어디인지 그 다음에 판단하도록 하죠."
"허···"
가토스와 집사가 동시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한테도 이건 도박이다. 이건 무례한 행동이니까. 하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왜냐하면 공작저에서도, 황도에서도 만날 사람이 있거든.
- 마리나, 우리는 영원한 친구야.
- 마리나, 친구끼리 그런 건 다 공유하고 살아야 됩니다.
어제 본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의 대사가 내 안에서 재생된다. 이들은 그야말로 마리나의 절친. 한 사람은 공작저에 있고, 한 사람은 황도에 있다.
제일 중요한 점. 이들은 여자주인공의 조연 친구 포지션으로, 남자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내게 가능성 있는 사람들은 그들뿐이었다.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들지 않는다. 그게 모든 모태솔로들의 생각이니까. 물론 단순히 겁이 많은 거지만.
"···허허."
집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한 사람은 한 나라의 황자, 한 사람은 제국 2인자의 대변인. 누구에게 갑질을 당해봤을 리가 없다. 그 둘에게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당황하는 게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간을 보겠다는 말이겠지?"
가토스가 물었다. 황자라서 아직 비즈니스 단어가 입에 정착이 안 돼 있네. 하긴 비즈니스 단어를 쓸 일이 없지. 직설적으로 말하면 알아서 다 듣는데. 그래도, 너 1점 감점.
"간을 보겠다니, 말씀이 심하십니다. 전하. 적을 둘 곳을 신중히 선택하는 건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알프레도, 좋았어. 역시 네가 사회생활은 더 잘하는 구나. 너 가산점 1점 추가. 이러니까 내가 무슨 수련회 교관이라도 된 느낌이네.
함성소리나 들어볼까, 했지만 바로 황자에게 목이 잘릴 것 같으니 그만 나대도록 하자.
"그래, 내가 실언했군. 그러면 어디에 먼저 적을 둘 텐가?"
와, 황자도 자존심이 없나. 대놓고 간본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나를 챙겨주려고 하네. 집사는 내 스킬이라도 봤다지만 얘는 진짜 뭘까. 이러니까 네가 독자들한테 골든 리트리버 취급 받는 거 아니야.
나는 동화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들은 뭘 하는 지 대충 눈치 챈 것 같다.
"동전을 튕겨서 앞면은 황도, 뒷면은 공작저로 하죠. 괜찮지 않습니까?"
"그래··· 이제 마음대로 하거라."
가토스는 살짝 체념한 듯하다. 집사는 가토스의 이런 모습이 흥미롭다는 듯 곁눈질을 하고 있다. 하긴 황자가 이런 거는 처음 보겠지. 난 애초에 가토스가 호구 같은 사람인 걸 잘 아는데.
핑!
태양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번갈아서 비추며 그들에게 난반사를 날린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동전에 얼굴을 찡그렸다.
탁!
난 손등에 동전을 내려놓고 천천히 열었다. 그들의 시선이 내 손등에 집중되는 게 재밌어서 더 느리게 열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는지 그 순한 가토스가 성질을 부렸다.
"거, 좀 빨리 좀 하면 안 되나?"
"죄송합니다. 손목이 다친 곳이 아직 다 낫지 않아서."
"아, 그렇군. 내가 그걸 잊고 있었어. 미안하네."
한 번만 더 장난치면 골든 리트리버가 핏불테리어로 변하는 장면을 볼 뻔했네. 그 장면은 나중에 소설 후반부에나 나오는 레어한 장면이라고.
손등을 펴니 나온 곳은 뒷면이었다. 알프레도는 환한 웃음을 짓고, 가토스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모두 첫 번째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흠, 그렇게 됐군. 그럼 1주일 뒤에 마차를 보내겠네."
"제가 걸어가도 됩니다. 걷는 걸 좋아해서."
"그래? 알겠네."
가토스는 삐진 듯 망토를 홱 두르고 치료실 복도를 빠져나갔다. 좀 웃기네. 황자가 삐진 꼴이라니. 마치 저 처량한 뒷모습이 오늘도 맛없는 사료 먹었네, 하는 느낌이다.
"그럼 갈까?"
"네."
이들은 모르고 있겠지. 내가 공작저로 가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에서 정독하니 우선순위가 보이더라고.
황도에 있는 절친은 당분간 그곳에 계속 있겠지만, 공작령에 있는 절친은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가줘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꼬셔보리라.
"운이 좋군."
알프레도가 흐뭇한 듯 말했다.
운이 좋기는. 동전 튕기기 하나 조작 못하면 그게 S급 헌터냐? 나는 그저 알프레도에게 웃어주고 말았다. 간다, 딱 대.
"예라우프 라피테스 공작이네. 반갑네."
"에퍼리 션입니다."
수염을 길게 기른 그가 내게 뒷짐을 건네며 말했다. 아직 악수할 짬은 아니라 이거지. 난 트라프비체의 예법은 알고 있다. 대충 읽어도 자주 나오는 내용이라.
나는 왼쪽으로 옷깃을 당기고, 오른쪽 손으로 배를 가린 다음에 고개를 숙였다.
"호오, 트라프비체 예법을 알고 있군?"
"어깨 너머로 배웠을 따름입니다."
라피테스 공작은 허허 웃었다. 난 시선이 느껴져 저 멀리 2층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이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리는 내 눈과 마주치자 바로 밑으로 숨어버렸다.
"재밌는 사람이군."
"농담은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일류지. 전쟁을 하기 전에 이기는 것이 일류 장수고, 농담을 하기 전에 웃기는 사람이 유쾌한 사람이지."
라피테스 공작가의 뜻밖의 고평가. 그나저나, 여기 내가 읽은 책들을 쓸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영어는 옌시 고전어로 짬뽕되어 있고, 전쟁을 하기 전에 이기는 것이 일류라는 건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내 기사와 대련 한 번 해보겠나?"
아, 라피테스 공작의 뜻은 이것이었다. 내 능력을 어느 정도 알아챈 집사에게 귀띔을 들었겠지. 그리고 나를 바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중갑을 입은 기사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나왔다. 규칙적인 발걸음 때문에 마치 기계군인과도 같았다. 저 가슴쪽에는 심장이 아니라 핵 플라즈마라도 있을 것만 같다.
"공작님께서는 일류가 아니로군요."
"뭐?"
라피테스 역시 표정을 숨기는 것은 잘 못하는 성격이다. 특히 나 같은 낮은 사람한테는 더욱 그렇겠지. 알프레도는 아예 대놓고 기함을 한다.
지금은 조심스럽게 다뤄야한다. 집사야 그냥 따까리일 뿐이지만, 라피테스 공작은 진짜 사자거든. 물론 내가 여기서 물리지는 않겠지만.
"백전백승(百戰百勝)은 비선지선자야(非善之善者也),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이 선지선자야(善之善者也)라고 하였습니다. 공작께서는 저를 싸우기 전에 굴복을 못 시키셨습니다."
"···허허."
라피테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나중에는 광소를 터뜨렸다.
"옌시 녀석이 명장 카멜의 저서까지 꿰고 있구나! 아주 재밌는 녀석이로고!"
다행히 잘 됐네. 그나저나 손자병법이 카멜의 책이 됐어? 라피테스는 자신이 아는 게 나오니까 주절거리는 타입인 듯 말을 이었다.
"그래,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적병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지. 그렇다고 내가 너를 이것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을꼬? 네게 묻겠다."
여기서는 또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내가 그래도 공대장 역할을 많이 맡아서 병법도 많이 공부했다고. 은근히 도움도 많이 됐고.
"병문졸속 미도교지구야(兵聞拙速 未睹巧之久也). 전투는 미흡하더라도 신속해야한다고 들었지만, 정교하게 하기 위해서 장기전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사옵니다. 이왕 하는 거 빨리 끝내겠습니다."
"이거 웃기는 놈이군, 빨리 끝내겠다라?"
오랜만에 문자를 쓰니까 머리가 아프네. 난 예능 나와서 웃는 것만 해봐서 이런 건 처음이라고. 내가 무슨 교양 프로그램 PD도 아니고. 그래도 내가 생각하면 스킬창에 읽었던 문구가 자세히 뜨니 다행이었다.
라피테스 공작은 유쾌해보였지만, 중갑기사는 모욕을 받은 듯 온 몸을 떨었다. 내가 문자만 남발하고 빨리 끝내겠다고 하니 몸이 다는 모양이었다.
"이봐, 프루, 지금 저 옌시 소년이 자네를 무시했네."
"알고 있습니다."
라피테스 공작은 거기다 장작까지 집어넣어주었다. 알프레도의 표정이 당황스러워졌다.
"아직 이 자는 손목이 다 낫지 않았습니다. 대련은 다음에 미루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자의 말을 듣지 못했나?"
라피테스 공작이 알프레도를 싸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알프레도는 바로 호랑이를 만난 요크셔테리어처럼 깨갱거리며 찌그러졌다.
"이봐, 옌시 소년. 이 자는 우리 기사단에서 최연소지만, 최연소 소드 엑스퍼트 2를 딴 자이기도 하다. 자신이 있는가?"
"자신 없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멋있게 말한 게 역으로 돌아오는 느낌.
미안한데, 이런 것도 연출이야. 방송 생활 오래하다 보면 다 이런 거 익히게 돼.
"질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 웃기는 놈이로군!"
라피테스 공작이 이제는 박수까지 치면서 웃었다. 프루라고 불린 중갑기사는 아예 얼굴을 붉히고 검까지 먼저 빼어들었다.
"대련장까지 갈 것도 없다. 여기 정원의 풀에 너의 피로 거름을 주지."
"이봐, 프루. 진정해라. 재미있는 녀석 아니냐."
라피테스가 프루의 어깨를 잡고 웃었다. 나는 냉정해졌다. 이제는 웃기지도 않을 거고, 웃지도 않을 거다.
라피테스와 알프레도가 우리를 대련장으로 인도했다.
"이봐, 무슨 깡으로 그렇게 계속 나대는 거지?"
이미 내게 반감이 생긴 프루는 계속 시비를 걸었지만 난 한 마디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싸울 때는 항상 마음가짐을 정갈하게 해야 하니까. F급 던전에서도 다치는 A급 헌터들이 있다. 물론 몬스터한테 말고, 발이 삐끗해서 염좌가 걸린 정도. 그리고 그런 방심이 심해지면 나중에 목숨을 잃는 거다.
우리는 곧 공터에 나왔다. 대련장은 정원의 반대편이었는데, 저 멀리 창문에서 또 아이리가 보였다. 복도를 넘어와 우리의 싸움을 구경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싸움이 어지간히 궁금한지 피하지도 않는다.
"그럼 대련하도록 하겠네. 프루, 중갑을 벗고 목검을 착용해라."
"네. 공작님."
"자네는 목검 하나만 있으면 되겠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목검을 받은 다음 각자의 자리로 섰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우리의 사이에 모래 먼지가 끼어들었다.
"이 모래먼지가 사라지면 싸우는 걸로 하지. 어떤가?"
나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람을 확인했다. 금방 그칠 바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도 똑같은 방법으로 바람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와 나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싸움의 시작을 재고 있는 것이었다면, 난 그냥 바람의 세기가 궁금해서 잰 것이었다.
모래먼지가 걷히는 게 싸움의 시작이라면, 싸움을 하는 건 간단하다.
모래먼지를 없애면 되니까. 나는 곧바로 정중앙에 뛰어들어 허공을 검으로 갈랐다. 순식간에 모래먼지가 좌우로 갈라지고 우리 사이에는 쾌청한 햇빛이 비춰졌다.
나는 햇빛이 비추는 길을 따라 검을 찔러갔다. 그는 기겁하며 검을 사선으로 들어 막았다. 미안하지만, 내 검은 한 손으로 막을 수는 없을 걸.
나도 소드 엑스퍼트라는 기준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대충 B급 헌터를 상대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윽!"
아닌가, 잘 못 막네. C급 헌터인가. 나는 마나를 조절하며 검을 뒤로 둘렀다. S급 헌터이다 보니 신입 헌터 양성소에 강의를 나갈 때도 있는데, 그때 이벤트 겸으로 신입 헌터들과 가끔 대련할 때도 있다.
그때 다치게 한 게 워낙 많아서 조금 조심스러워지네. 근데 내가 먼저 위험한 수를 써서 다치게 한 적은 없다. 가끔 어떻게든 내 눈에 띄어보려는 신입 헌터가 오버해서 살수까지 날리면 나도 그냥 반응해주는 거다.
살기의 반응은 본능적인 것이니까, 어쩔 수 없이 다치게 하는 거지.
"이야아아앗!"
자신에게 드리워진 압박감을 걷으려고 프루가 고함을 지르며 내게 검을 내질러온다. 그래, 내가 말한 게 이런 상황이다.
대련에서 살수를 쓰는 상황. 이러면 내 S급 헌터의 본능은 발현될 수밖에 없다.
【스킬 : 반사신경 Lv MAX 사용 중】
나는 곧바로 내 심장으로 질러 들어오는 검을 허리를 뒤로 꺾어 숙이고, 내 몸 뒤의 바닥에 검을 꽂아 중심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검을 축으로 돌아 발로 프루의 명치를 강하게 차냈다.
팡!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프루가 대련장 벽까지 날아가서 부딪친 다음 쓰러졌다. 에구, 저거 한 달 간은 쉬어야겠네. 갈비뼈 금갔겠다. 그러게 누가 살수 쓰래?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피테스 공작과 알프레도의 표정, 그리고 저 멀리 창문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이리의 표정이 똑같아서 보는 맛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