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짐꾼 쟁탈전 - 공작령 (5) >
나는 일주일간 임시로 예프린 라피테스의 호위무사를 맡았다. 호위무사들의 방은 예프린의 방 바로 옆에 있는 넓은 방이었다. 수는 약 20명 정도 되었다.
방의 내부는 이층 침대가 여러 개 있는 내무반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주 개판이었다.
2층 침대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속옷들이 걸려있고, 서랍은 반쯤 열려있는 게 태반이었으며, 용도가 반대인 가구들이 한 곳에 몰려있었고, 쓰레기통에서는 몇 달은 씻지 않은 냄새가 났다.
"힘들다고? 여기가?"
코를 파면서 말하는 이 자는 여기서 최고참이었다. 본인 말로는 15년 동안 예프린을 호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1살 때부터 호위무사를 한 거지.
"공작님께 그렇게 들었는데요."
"흠, 공작님이 뭘 잘 모르시는군."
그는 코딱지를 아무데나 튕기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여기는 제국 제일의 꿀보직이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최고참의 말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옆방이 예프린의 방 아니야? 이렇게 고성방가 해도 돼?
"근데 저 놈은 왜 갑자기 우리 쪽으로 온 거래요."
2층 침대에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귀신 같은 놈이 물었다. 내게 던전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그 머리 묶은 놈 맞다.
"그거야 공작님이 알지, 내가 아냐?"
"야, 네가 어느 정도 힘 좀 쓰는 놈인 건 아는데. 여기는 위계서열이 있는 곳이거든? 그러니까 조심하자?"
띠꺼운 건 여전하네. 나는 그냥 부딪치기 싫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이 방만 보면 위계질서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예프린은 이런 사람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예프린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뭔가가 잘못되기는 했지.
- 내 이름?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
- 조용히 해. 집중해야 하니까.
- 넌 너무 조잘조잘 말이 많아.
- 닥쳐. 내가 말을 할 때는, 끊지 마라.
이게 다 누구의 대사일까. 바로 예프린의 대사다. 심지어 그 예쁘고 귀엽다는 마리나에게 한 대사. 보기만 해도 한기가 올라오는 지문이다. 근데 그런 예프린이 이런 놈들을 방치하고 있다니.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슬슬 도련님 산책하겠네."
"B조는 수고해라. A조는 오늘 산책 비번이다."
"B조 다 나가!"
B조로 추정되는 호위무사들이 탄식을 뱉는다. 내가 가만히 있자 머리를 풀은 자가 나를 가리켰다.
"야, 신입. 도련님 호위하면서 정원으로 나와."
"나요?"
"그럼 너지."
그래. 뭐 나야 예프린하고 많이 보면 좋지. 지금 예프린 상태도 좀 알아야겠고. 그 냉정하던 예프린이 지금 어떻길래 호위무사들의 상태가 이런지 알아야겠다.
나는 복도로 나가 바로 옆의 예프린 방문 앞에 섰다. 난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음, 도련님?"
이렇게 말하려니까 좀 이상하네.
"그래. 나갈 거야."
처음 들어보는 예프린의 목소리. 정말 유약한 목소리다.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한다. 이런 목소리로 그런 냉기가 풀풀 넘치는 대사를 하지는 않았겠지.
곧 문이 열렸다. 그는 빨간 넥타이에 검은 꼬마 정장을 입었다. 푸른색 머리는 남자답게 귀가 파이고 짧게 깎여 있었고, 적색 눈은 아이리와 똑같이 보석처럼 빛났다. 꼭 껴안고 싶을 정도로 귀엽게 생겼네.
"가자. 너는 오늘 처음 보는 호위무사네?"
"네. 에퍼리 션이라고 합니다. ···도련님."
내가 예의를 갖추면서 인사했지만, 그는 보지도 않고 홱 지나쳐버렸다. 이건 좀 예프린 같네.
"나한테 그렇게 과하게 예의 차릴 것 없어. 설렁설렁 해."
뭔 애 입에서 설렁설렁 해라는 말이 나오냐. 이게 공작가의 조기교육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가정교사도 없는데.
사실 예프린은 소설 중반부부터 나오는 사람이다. 작중 시간으로도 3년이 지나서야 나오는 인물. 그만큼 내가 아는 예프린과 나이 격차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너, 에퍼리라고 했지?"
"네."
"첫 명령이야. 들어가서 자. 내가 알아서 정원 갈 테니까."
예프린은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눈빛에는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공작가의 위엄은 물론이고, 평범한 호위무사보다 눈빛이 죽어있다.
난 예프린을 쫙 한 번 훑어보았다. 당연하지만, 굉장히 무례한 일이다. 특히 이런 중세 계급사회에서는. 예프린은 예상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래. 오늘 수고했어."
뭘 했다고?
나는 바로 호위무사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호위무사들의 방은 살짝 한산했다. B조라는 사람들이 나가서 그런 것 같았다. A조의 호위무사들은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잠이나 자라고 하지?"
"네."
"그게 보통 도련님의 첫 명령이야."
호위무사들은 킬킬 웃었다.
사람에게는 첫 인상이 중요하다. 첫 인상에서 호구처럼 보이면, 호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이 호위무사들이 예프린을 호구처럼 보고 있는 것이다.
"어때? 꿀이지?"
그래. 만약 내가 정기적인 월급을 받는다면 이만한 곳이 없겠네. 널널한 상관, 별 볼 일 없는 일과, 꽤 많은 급여.
목표가 그저 사는 것이라면, 이런 곳도 나쁘지는 않겠네. 아닌가, 반대인가. 하루하루 죽어가는 걸 버틸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곳이지.
하지만 난 하루하루가 아깝다. 지금도 날 기다리는 수많은 여자친구 후보들에게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하니까.
"보통 산책 나가면 어디로 가십니까?"
"여인의 호수 쪽으로 나가시지. 보통. 수영을 좋아하시거든."
"호위라고 쫄지 마. 그냥 혼자서 거니는 걸 좋아하시거든. 부끄러움도 많으신 분이라서, 수영할 때는 모든 사람들을 물러. 그때 짬 좀 찬 사람들은 아예 시내로 나갔다 오지."
자랑이다. 이 새끼들아. 난 이들한테 들을 만한 정보는 다 들었다.
"그럼 전 화장실 좀 갔다 오겠습니다."
"너 화장실 어딘 줄 알아? 여기 저택 넓은데."
누군가의 말을 무시하고 난 그냥 방을 나왔다. 화장실은 당연히 어디 있는지 모르지. 난 조용히 창문을 뛰어넘었다. 여인의 호수를 찾아서.
"야, 오늘 도련님 몇 시간 있으실 것 같냐?"
"한 시간 정도 있으시겠지. 도련님 체력에 뭘."
"근데 요즘 점점 시간이 느는 것 같아. 기분 탓인가?"
난 헛소리들을 하는 호위무사들 몰래 여인의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몰래 들어올 필요도 없었다. 원래는 촘촘해야 할 호위 스팟들이 구멍이 뚫려 있었으니까.
니들이 호위무사냐, 그냥 허수아비냐. 그렇게 묻고 싶다. 물론 진짜 호위무사들이라도 내 움직임을 알아채는 건 어렵겠지만.
여인의 호수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호수와 그 근처의 숲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조용하네.'
내가 숲 속으로 들어와서 느낀 건 바로 그거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이라 동물들도 없고, 새도 없고, 물 흐르는 소리마저 없다. 가끔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부대끼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내가 시종에게 여인의 호수를 물어보자, 그는 아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었지. 귀족들이 공작령에 오면 꼭 가는 곳이라고.
확실히 특이한 나무들이 많아 보인다. 비싸 보이는 꽃도 많이 펴있고. 내 느낌은 평화로운 곳이라기보다는, 평화를 파는 공간 같다. 생동감이 없어서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이렇게 기분 나쁜 곳에 예프린이 있다는 말이겠지. 어느덧 호숫가에 도착했다.
수영을 하고 있어야 할 예프린은 없었다.
"도련님?"
난 마치 어리버리한 신입 호위무사의 목소리를 냈다. 오랜 방송생활로 단련된 기가 막힌 연기였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이제는 급박한 신입 호위무사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액션까지 합쳐지니 모노드라마가 따로 없다.
이 정도면 명분은 만들었네.
난 호수를 바라보았다. 파장 없는 호수. 물은 마치 나는 결백하다는 듯 바닥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바닥에는 물을 더 밝게 하려고 에메랄드가 깔려 있었다.
"너는 내가 자라고 한 신입 호위무사 아니니?"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예프린이었다. 내가 짐짓 허겁지겁 뒤를 돌아보았다. 예프린은 내가 처음에 보았던 그때 그 단정한 차림 그대로였다.
"아, 그래도 첫 날부터 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도련님이 걱정되어서 들어와봤습니다."
"음, 그렇구나. 선배들이 얘기 안 해?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해. 지금 잠깐만 자리를 비워주겠어?"
예프린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지어 내게 나가는 길까지 안내해주었다. 이러니까 호구 취급당하지. 소설에서는 냉정함의 화신인 예프린이 이러고 있으니까 좀 웃기긴 하다.
"여기는 동물도 없고, 위험한 해충도 없는 곳이야.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밍기적거리자 예프린이 재차 말했다. 심지어 예프린은 내 손을 잡고 바깥으로 이끌려고까지 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연기는 정신, 기, 육체가 합일이 되어 다른 사람으로 빙의하는 것을. 아직 예프린은 메소드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왜냐면, 이렇게 대놓고 딱딱한 손을 붙들면 누구라도 알게 되지 않는가.
"도련님."
난 예프린이 끌어당겨도 움직이지 않았다. 예프린이 불안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왜, 왜?"
"연기는 그만하시죠. 저도 연기를 그만하겠습니다. ···아가씨."
그 말과 동시에 예프린의 표정이 싹 굳었다. 떨리던 눈동자도 음유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소리지?"
그, 아니,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장보다 차갑게 됐다. 그래, 이래야 예프린이지.
난 처음부터 예프린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프린은 여자니까. 막내 도련님을 말할 때도 내가 모르는 공작저의 다른 사람이 있었나 생각할 정도였다.
"예프린 도련님, 아니, 아가씨는 여자가 아닙니까?"
"···날 모욕하는 것이군."
예프린의 허리춤에 달린 장식용 검이 빼어들어졌다. 발검하는 실력이 심상치가 않네. 많이도 훈련했나보다. 아이리보다 낫다.
내가 아까 복도에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볼 때, 눈에 띈 건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이었다. 공작도 무심하시기는. 아무리 문관이라지만 이런 기사의 손을 몰라본단 말인가.
"그게 아니오라···"
"닥쳐. 내가 말을 할 때는, 끊지 마라."
예프린이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검을 내 목에 들이댔다. 검 끝에는 푸른 마나가 시퍼렇게 응집되어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공작저의 비밀이다. 내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넌 없는 죄를 뒤집어써서 처형당하게 될 거다."
그래, 라피테스 공작은 그런 사람이지. 알고 있어서 별 감흥이 없다.
"그러면 제가 공작님께 새로운 비밀을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아가씨께서 몰래 여인의 호수에 생긴 던전에 다니고 있다는 비밀 말입니다."
내 말에 예프린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겠지, 자신이 여자인 건 공작가의 비밀이라고 쳐도 자신이 훈련을 하고 있다는 건 혼자만의 비밀 같았으니.
예프린이 입을 떼려고 할 때 숲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호위무사가 그녀를 호위할 시간이 돌아온 듯했다.
그녀는 장식용 검을 허리춤에 넣고는 호위무사들이 우리를 발견하기 직전 조용히 말했다.
"너, 오늘 밤에 내 방으로 와라. 아니면 귀족모욕죄로 즉결처형을 해주마."
호위무사들이 예프린에게 오자, 예프린은 다시 어깨를 좁히고 목소리를 떨리게 했다. 또 봐도 연기를 참 잘하네. 살짝씩 실수가 있어서 그렇지.
호위무사들이 집중한 건 평상시와 똑같은 예프린보다 나였다.
"어, 넌 왜 여기 있냐? 방에 있는 거 아니었어?"
"화장실 찾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뭔 미친 소리야?"
몰라도 돼. 호위무사들 틈 사이에서 예프린이 날 앙칼지게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소녀의 방을 밤에 침투해도 되려나.
물론 내가 아무리 모태솔로라지만, 이게 그린라이트가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굳이 등의 색깔로 치자면 그녀의 눈 색과 같은 적색등이라고 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