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1화 (11/150)

< 11화 짐꾼 쟁탈전 - 공작령 (6) >

"왔느냐."

예프린이 침대에 앉아있었다. 어두워서 그녀의 신형까지는 보이지 않았고 붉은 눈만 보였다. 열어놓은 창문에서는 바람이 그녀의 눈빛처럼 싸늘하게 불어온다.

오늘 일과를 끝내고 호위무사들에게 듣기로는 예프린의 방은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심지어 라피테스 공작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 금단의 구역을 난 하루 만에 손쉽게 정복해버렸다. 금단의 구역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나무 책장과 옷장, 책상. 예프린의 성격답게 방을 꾸미는 용도의 인테리어는 아예 없었다. 굳이 눈에 띄는 건 책상 위에는 작은 초상화였다. 푸른 머리의 금안을 가진, 아름답게 생긴 미녀였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바람이 차갑습니다."

내 말에 예프린이 차갑게 웃었다.

"넌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가? 공작가의 비밀을 어찌 그리 떠벌리고 다니느냐? 모든 죄는 입에서 나온다고 한다더니, 그 말이 틀림없이 진실이구나."

"저를 이 방으로 부르신 건, 그 이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그렇지."

예프린은 시인했다. 달이 움직여, 그녀를 반쯤 비추었다. 전체를 비추는 것보다 반만 비추는 게 오히려 그녀 몸의 곡선이 더욱 부각시켰다. 방에서는 편하게 지내려는 건지 압박붕대를 풀은 듯했다.

"넌 대체 누구냐?"

"에퍼리 션입니다."

"말장난하려고 여기 온 건 아닐 터. 도망가지 않은 용기는 칭찬해주마."

예프린은 아이리와 성격이 비슷하면서 다르다. 아이리는 불 안의 불이라면, 예프린은 얼음에 갇힌 불이라고 할까.

"아까 말씀드렸죠. 바람이 차갑다고."

"무슨 소리가 하고 싶지?"

"바람이 두 군데서 불고 있으니 어찌 차갑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내 말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옷장을 밀었다. 옷장 뒤에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더욱 강해졌다.

"내려와라."

계단의 바로 옆 벽면에는 아이리가 찬 검과 똑같은 은빛 검이 끈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걸 자연스럽게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따라서 내려갔다.

계단 사이사이에는 조명이 붙어있었지만 계단의 높이 자체가 높아서 위험해보였다. 귀족 가에는 흔히 있는 비상구 같은 개념인 듯했다. 여기가 2층이니, 지하까지 뚫려 있으니 참 오래도 내려가야 했다.

"넌 정말 도망치지 않는군."

그녀가 계단의 끝에 쯤 도달해서 말했다.

"도망칠 이유가 없으니까요."

"거짓말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은 그렇게 순수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볼 때는 순수한 건 너 같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나도 이제 어리버리한 연기는 안 하기로 했다. 예프린이 이렇게 진심을 보여주는데, 예의를 갖춰야지.

"아가씨는 절 죽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심약한 내가 본 모습이라 생각하지 마라. 그건 다 연기였을 뿐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가씨가 저보다 약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그녀가 홱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화도 나지 않았고,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

"건방지구나."

그녀는 그리 말하고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다 내려갔다. 나도 곧 지하실에 도착했다.

지하실 천장에는 밝은 전등이 달려있어 방이 훤히 보였다. 왼쪽 벽에는 날이 닳은 수많은 칼이 걸려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수많은 칼집이 나있었다. 이렇게 수련하고 있었구나. 역시 불패의 용병, 예프린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나도 사실 너를 이길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여전히 그녀는 등을 뒤를 돈 채였다.

"여인의 호수에 작은 던전이 열린 건 나도 우연찮게 발견한 건데, 너무 미약한 던전이라 소드마스터들도 그냥 지나치는 곳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내 방의 비밀 통로까지 한 눈에 꿰뚫으니 너의 깊이를 내가 어찌 가늠하겠느냐."

그녀가 그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여기선 네가 아니면 내가 죽는 곳이다. 참고로 난 지기 싫다. 아직 내 재능의 끝을 보지 못했거든. 그러나 네게 지면 그것이 끝이라고 인정하고 물러나야겠지. 세상은 그런 곳이니까."

"왜 내가 아가씨를 죽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왜냐하면 내가 널 죽일 거니까. 이런 마음을 먹은 이상, 네가 날 죽이겠다고 내 안에서 생각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냐."

그녀가 검을 사선으로 떨쳤다.

"검을 들어라, 최대한 좋은 것으로. 무기가 차이 난다고 비겁하다고 여기겠지. 하지만 실전이란 그런 것이다."

"이해합니다."

이건 대련이 아니라 실전이니까. 그녀의 마음 속에선 말이야. 난 최대한 녹이 많이 슨 검으로 골랐다.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귀찮은 성격이네. 장단 맞춰줘도 이러냐. 원작에서도 이렇게 귀찮았던가. 다시 한 번 예프린이 나오는 부분을 읽어봐야겠다.

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쉬었다. 마음 안에 철갑이 씌워지는 느낌이다. 이제 누구도 나의 평정심을 방해할 수 없다.

"검은 한낱 도구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휘둘리는 존재지요.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사람뿐입니다. 물론 그러기도 쉽지 않죠."

"그게 네가 싸구려 검을 집은 이유냐?"

"전 검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검에 마나를 잔뜩 불어넣었다. 검으로 모아지는 기운이 휘몰아져 반경에 소용돌이 같은 기운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에 예프린의 눈이 커졌다.

녹슬고 닳은 검이 내 마나에 깨졌다. 하지만 파편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파편들은 마나로 엉기어져 검의 형태를 띠었다.

"제가 곧 검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알았다. 넌 내가 이기기 힘든 존재로군."

그녀는 곧바로 달려들었다. 급하게 하는 공격인데도 아이리보다 훨씬 정갈하고, 침착한 검로를 지니고 있었다.

예프린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 정도 성취면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역시 그 정도뿐이다.

나는 검을 한 번 휘둘러 예프린의 검을 날려버렸다. 예프린의 검은 천장에 부딪쳐 떨어지고, 그녀의 손바닥이 찢어져 피를 흘렸다.

내 검에 엉긴 마나를 전부 풀었다. 파편은 소나기가 슬레이트에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뭐하는 짓이지?"

"뭐가 말입니까."

"내가 널 죽이려고 했는데, 넌 날 죽이지 않는 건가?"

"네. 제가 언제 죽인다고 했습니까?"

예프린이 날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세상은 중세. 패배는 명예의 죽음이고, 명예의 사망은 곧 인간으로서 실격을 의미했다. 그 명예가 고고한 공작가는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가질 것이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지만, 그건 아주 불가피한 일일 때였다.

"아가씨는 도망칠 생각이지요?"

내가 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무장 해제가 됐다. 냉정한 표정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그것까지 알 줄은 몰랐다는 느낌이다.

"가족에게까지 속이는 본성, 높은 강도의 훈련, 일부러 유도하는 호위무사들의 방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난 그냥 소설 속에서 본 것을 결과론적으로 짜맞출 뿐이었다.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예프린 도련님일 때 보여주는 가식적인 미소를 제외하면, 내게 처음 보여주는 웃음이었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하지만 지금 당신은 약합니다."

난 일부러 예프린의 물음을 무시하고 내 할 말을 했다.

예프린은 밖에 나가서 공작령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장을 하고 다닌다. 물론 주인공인 마리나는 곧 그가 여자임을 알게 된다.

마리나가 예프린이 여자임을 나중에 알아채고, 같이 샤워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로맨스판타지니까 그런 이상한 묘사는 나오지 않지만, 그때 마리나가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 너, 상처가 너무 많다. 내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파여 굳은.

아마 서툰 상태로 나가서 많은 고초를 겪었겠지. 난 그 시행착오를 조금은 줄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 여자친구 후보기도 하잖아. 얘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은 내가 읽은 곳까지 나온 적이 없거든.

"일주일동안 제가 아가씨를 조금 지도해드리죠. 그대로 나가면 많이 다치실 겁니다."

예프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이런 기회는 정말 흔히 오는 게 아니다. 어떤 대기업 회장은 자신의 자제에게 헌터 수업을 시켜달라고 시간 당 2억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거절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전 남의 꿈을 보면 좀 응원해주고 싶거든요."

사실 다른 생각이 있지만. 연애, 연애, 연애.

"너한테는 검술로도, 정신력으로도 진 느낌이구나."

그녀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짧은 머리를 뜯었다. 이건 진짜 눈치 못 챘는데, 그 자연스러워 보이던 머리가 가발이었나 보다.

짧은 머리가 땅에 풀썩 떨어지고, 그녀의 폭포수 같은 푸른색 생머리가 땅까지 내려앉았다. 머리가 너무 길어 한 쪽 눈을 가리기까지 했다.

마치 내려앉은 그녀의 모습은 여신의 조각상과도 같아 보였다.

"너한텐 더 숨길 것도 없구나."

"이건 몰랐습니다."

"그러냐."

예프린은 다시 냉정한 눈으로 돌아와 칼집이 켜켜이 쌓인 오른쪽 벽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들이 되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작은 아들만이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 남자로 산다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나를 낳으신 어머니가 바로 돌아가신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자신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게 어디 쉽습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포기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여자란 사실은 나를 구성하는 아주 조그마한 조각에 불과해. 그걸 더 큰 자유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면, 난 기꺼이 하겠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프린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하지만 나는 남자가 되는 것보다, 공작이 되는 게 더 싫다. 그건 내 인생 전체를 올가미에 묶는 거야. 남장여자의 공작이라, 인생이 어찌 될지 뻔하지 않느냐."

그렇겠지. 들킬까봐 대외 활동도 잘 못하고, 웬만하면 공작령에서 틀어박혀 새장 속 카나리아가 되겠지. 사무일만 하고 말이야. 그건 그녀의 적성에 맞지 않다.

"그래서 난 도망가고자 하는 거야. 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거다. 공작이건, 뭐건 말이야. 차라리 용병이면 좋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어나시죠."

"뭐?"

그녀가 날 앉아서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더 귀엽네. 합격이야, 합격.

"1주일은 짧지 않습니까."

내가 부서진 검의 파편을 구석으로 차버린 다음, 벽의 또 다른 검을 들었다.

"일어나시죠. 아가씨, 제가 수련을 봐드리겠습니다."

내가 검을 들고 트라프비체의 예를 취하자, 그녀는 별 다른 투정도 하지 않고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 다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은빛 검을 들고 검을 수평으로 세운 다음 칼날과 검병을 손끝으로 잡은 다음, 내게 인사를 했다.

트라프비체의 예 중,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예였다. 참, 고지식하기는.

나는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