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2화 (12/150)

< 12화 짐꾼 쟁탈전 - 공작령 (7) >

"내가 아버지께 식사시간에 들은 게 있다."

여전히 우리는 지하층에 있다. 6일 동안 그는 남장을 하고 식사를 하고, 뻔한 산책 따위의 일정을 모두 접고 나와의 훈련에 몰두했다.

"뭡니까?"

"네가 날 바꾸려고 한다면서? 혹시 이 훈련도 그 때문이냐?"

음, 그런 말을 했었지. 근데 그건 별 생각 없이 한 말이다.

"아뇨."

"어떻게 믿지?"

"그러게요."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솔직히 해 줄 말이 없는데. 아, 그래. 오늘은 6일차. 마지막 바로 전 날이다. 그러면 슬슬 빌드업 시작해야지. 내 생각에는 거의 끝난 것 같긴 한데. 하하.

"산책이나 갈까요?"

"산책?"

내가 수작을 부렸다. 예프린은 뭔 소리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훈련 시간이 부족하다며?"

"부족하긴 하죠. 그래도 훈련은 사제간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아가씨께서 저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훈련도 부질없겠죠."

말 잘하는 거 봐. 이렇게 말을 잘하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여자가 없었냐고. 그래, 나도 하면 한다는 사람이라니까.

예프린은 내 화려한 언변에 고개를 마지못해 끄덕였다.

"그럼, 여인의 호수로 가는 건가?"

"아뇨."

"그럼 어디?"

"공작령 바깥으로 나갈 겁니다."

"···뭐?"

예프린의 황당한 음성이 지하동을 울렸다.

나도 일주일동안 여기 있으면서 어느 정도의 호위 체계는 다 파악해 놨다. 물론 공작령인만큼 삼엄하지만 뚫으라고 하면 못 뚫을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난 라임 집사에게 가 외출증 두 개를 끊어왔다. 왜 두 개를 끊냐고 물어보기에 알 거 없다고 했다. 지금 난 라임 집사를 완전 호구 잡았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진짜 가져왔네. 라임 집사는 외출증 잘 안 끊어주는데."

"제가 여기서 좀 특별 대우입니다."

예프린은 머리를 살짝 풀고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섰다. 얼굴은 살짝 가린 채에, 여시종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내 소매를 살짝 잡았다. 이렇게 대놓고 나가려니까 살짝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일부러 이런 길을 선택한 것도 있다. 흔들다리 효과라고, 나도 이론상으로는 빠삭하다 이 말이야.

정문의 호위무사들은 아이리의 호위무사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우리의 앞 길을 가로막았다.

"잠깐, 어디 가는 거지?"

"예프린 도련님 심부름 갑니다."

"도련님 심부름?"

그들이 미심쩍다는 듯 되묻자 내가 라임 집사의 외출증 두 개를 보여줬다. 원래 몰래 나가려면 이렇게 대놓고 나가야지. 괜히 뒤 잡히면 귀찮잖아.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라고 하였거늘. 물론 이럴 때 쓰는 말 아니다.

"뒤의 여시종은 누구지?"

"도련님의 시종입니다. 제가 여기 길을 잘 몰라서 대동했습니다."

"···그래? 얼굴은 왜 가리고 있대."

"좀 수상한데. 그래도 외출증 있으니까."

그들은 결국 우리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보니까 라임 집사는 여기서 은근히 파워가 센 사람이었다. 풀어질 대로 풀어진 예프린의 호위무사들을 제외하면 다 깍듯하게 인사하던데.

공작저 바깥은 상쾌했다. 뭔가 공작저는 답답한 느낌이 났었단 말이야. 고작 1주일 있었던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니, 16년간 갇혀있던 예프린은 더더욱 바깥에 대한 열망이 컸겠지. 예프린은 바깥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나왔네요."

"생각보다 쉽구나."

"여기서 떠나셔도 됩니다."

"뭐?"

내가 말하자, 예프린이 놀랐다. 곧 이어 예프린은 후후 웃었다.

"이런 식으로 증명하는 구나. 마음에 드는 방법이야."

하지만 예프린은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공작가에서 받은 게 있으니, 내가 할 건 하고 가야겠지."

예프린이 호위무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자 머리를 풀었다. 바람에 날려 머리가 앞뒤좌우로 막 흔들렸다. 그 꼴이 웃겨 난 살짝 웃기고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아니, 그렇게 해주려고 했는데 예프린은 내 손을 탁 쳤다.

"내 머리는 내가 정리한다."

"그러세요."

시무룩하게 하네. 왜 애 기를 죽여. 그래도 훈련 때는 내 말을 잘 따라줬는데. 아닌가, 이게 흔히 말하는 밀당인가.

"난 공작령 바깥으로 나오는 게 처음이다."

"그렇습니까?"

나는 최대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근데 대충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알고 있으면서 그러는 건 정말 가식적이구나."

괜히 했네.

그 이후로 예프린은 말이 없었다. 공작령 바깥은 그저 흔한 산과 모래가 깔린 도로였다. 난 솔직히 산적이라도 나올 줄 알았지만, 공작령 부근에서 대놓고 산적질을 하는 간땡이 부은 놈이 있을 리가 없지.

그녀는 그저 나무와 풀들을 구경했다. 때로는 멈추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여기가 여인의 호수보다는 훨씬 괜찮은 곳이었다.

새 소리와 곤충 소리. 녹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 지평선 위에서 깜빡이는 이름 모를 도시의 불들의 깜빡임. 무례한 등산객이 버려놓은 쓰레기. 말굽과 타이어의 자국. 흙을 움트고 머리를 빼든 다음 다시 숨어드는 개미. 바위의 이끼.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훈련도 자연히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서 침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호위무사들의 방은 여전히 개판이다. 아침 7시 정도는 된 것 같은데, 한 사람 정도는 일어날 법하지 않나.

"야, 막내야. 시끄럽다. 조용히 일어나라."

심지어 이런 소리까지 나오는 상황. 일찍 일어난다고 뭐라 하는 놈도 있다. 에휴.

그때,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어떤 놈이야?"

"나야."

그 나지막한 한 마디에 전부가 기상했다. 들어온 사람은 평소 외출 차림을 한, 나비넥타이의 꼬마정장을 입은 예프린이었다.

"도, 도련님.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왜. 나는 일찍 일어나면 안 돼?"

예프린은 평소와는 다르게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예프린의 이상기온을 느낀 듯 전부 일어나서 침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정리되어 있어 그냥 침대에 앉아서 예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프린과 내 눈이 마주쳤다.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같이 지하실에서 훈련을 할 때, 그 눈빛이다. 그녀는 지금 호위무사들에게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들 연무장으로 나와."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바로 호위무사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뭔 일이야."

"갑자기 도련님 왜 저러셔?"

"아, 오늘 비번인데."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구나. 예프린의 본성을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예프린은 그 성정을 16년간 감추고 살았을까.

우리는 곧 호위무사 옷으로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나갔다.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이라 당연했다.

"에퍼리, 나와라."

그녀는 날 지목했다. 갑자기? 난 예프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난 일단 나와서 예프린의 옆에 섰다. 예프린이 내 두 어깨를 잡았다.

"지금부터 에퍼리가 한 사람을 지목해서 대련을 할 거다. 그리고 대련에 진 자를 위로 모두 해고할 거다."

난 그제야 예프린의 뜻을 알아챘다. 자신이 뿌린 거름은 자신이 치우겠다 이거지. 근데 그걸 왜 굳이 나한테 맡기는지.

어쨌든 상관없다. 거슬리는 사람이 한 명 있었고, 난 그를 혼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말에 조용히 따라주지, 뭐.

"시지포 호위무사와 대련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말한 시지포 호위무사는 내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던 머리를 묶은 그 자였다. 그 자는 여기서 6년차로, 중간 정도 되는 짬이었다.

딱 거르기도 좋네. 어차피 이 위부터는 정말 쓰레기들 밖에 없으니까.

"도련님, 대체 무슨 말이십니까?"

"이런 건 부당합니다!"

"제국 노동법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도련님."

지금껏 꿀이란 꿀은 다 빨고 이제와서 법 들먹이는 것 봐. 물론 민주사회였다면 통할 만한 징징거림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계급사회, 중세다.

"그럼 네가 황도로 가서 법무관을 데려와 나랑 대질시켜라. 난 그를 설득할 자신이 있으니."

예프린이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의 방만함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나뿐 아니라 공작저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고, 너희들을 비웃고 있다. 태형을 치고 쫓아 보내도 모자를 판에, 정당한 기회를 줘도 반발하면 어쩌자는 거냐?"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여기는 꿀보직이었다. 심지어 그들조차 방만한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니. 예프린의 말에 반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쨌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시지포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내게 직접적으로 지목을 당하니 아주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공작가의 자제에게 풀다니, 확실히 기강이 엉망이긴 하다.

예프린이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자세를 똑바로 하시지요. 도련님 앞이십니다."

"뭐?"

시지포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네가 도련님의 어떤 총애를 받는지는 모르나, 아주 건방지구나."

"상스러운 말도 자제해주시고요."

"아니, 해도 된다. 싸움에서 이런 건 비일비재한 일이지. 감정을 죽이고 싸우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감정을 살려서 싸우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예프린이 나름 공정한 답을 내놨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욕을 하라고? 할 수 있지. 왜냐하면 난 오늘 나가는 사람이거든.

"들어와, 이 새끼야."

내 천박한 욕에 시지포의 눈이 크게 떠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너, 조금 칼을 다룬다고 자만하는 모양이구나. 나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아무리 명검이라도 숫돌에 갈지 않으면 평범한 검이 되는 법. 평범한 검에 날까지 갈리지 않으니 몽둥이와 다를 바가 없겠습니다."

"이 새끼가, 진짜···"

내 말에 예프린이 내게만 들리게 풋, 웃었다. 방금 건 내가 좀 압도했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나가면 환호성 들을 정도는 된 것 같다.

긴 말은 필요 없다. 시지포와 나는 연무장에서 맞대고 섰다. 시지포가 나를 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도련님을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아주 요리 실력이 대단하구나."

"지랄하지 말고."

내가 말했다. 그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욕까지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난 너 같은 놈들을 보면 배가 아파."

"뭐?"

"힘도 안 들이고 돈 버는 것들. 누구는 너와 같은 봉급을 벌려고 목숨을 걸고 일하는데, 넌 운이 좋아서 이렇게 훈련도 안 하고 돈을 벌고 있지. 물론 그런 사람이 아예 없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세상의 균형이라는 게 있으니까."

내가 계속 말하자, 그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듯 내게 달려들었다. 느리다. 몇 년 전에는 어떤 수준의 무사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주 형편없었다.

나는 그를 아주 오래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무사의 팔과 허벅지 근육이 쳐질 수가 있는 거냐. 나는 그냥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는 장렬하게 검으로 허공을 갈랐다.

"이걸 피해?"

그는 마치 이게 숨겨둔 한 수라는 듯 말했다. 라피테스 공작의 한숨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는 의미인 듯하다.

"그럼 그걸 맞냐?"

"전력을 다해야겠군. 신입이라 한 수 져줬다."

진짜 던전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지금 해야겠다. 안 하면 너무 답답할 것 같아서.

"적당히 찌질해라, 적당히."

"뭐?"

그는 검에 마나를 모으면서도 성질을 냈다. 집중해서 빨리 모아야 될 지경에 남의 도발에 일일이 대응해주면 어쩌자는 걸까. 피지컬부터 멘탈까지 얘는 실격이다. 심지어 마나 모으는 속도도 엄청 느려. 무슨 90년대 마법소녀도 아니고 말이야.

난 그래도 자비롭게 그가 마나를 전부 모으는 걸 기다려줬다.

"가안···다!"

"와, 좀."

그가 내게 달려들었다. 마나가 담긴 검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쳐내려온다. 나는 처음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그걸 디딤발 삼아 검을 발로 밀 듯 찼다. 검은 내 발이 닿자마자 부서졌고, 내 발은 그의 얼굴을 완전히 덮고 뭉갰다.

꼴사납게 대자로 엎어진 그의 얼굴에 내 신발 밑창 문양의 진흙 문신이 새겨졌다.

"에휴. 너 같은 것도 무사라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모두들 마찬가지였다. 베테랑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마 그보다 잘 싸울 자신이 없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예프린은 내가 보여준 산 속이 인상깊었나보다. 우리에게 들어오기 전 아침에,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가 변화의 의지를 내비쳤다고 한다.

나는 알지만, 물론 거짓말이겠다. 그녀는 도망갈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거다. 그러기 위한 쇼맨십으로 호위무사 정리를 선택한 거다.

만약 여기서 예프린이 그대로 도망가버리면 호위무사들은 또 나태한 채로 공작가에 남아있을 테니까.

내가 시지포를 허무하게 이기고, 당연히 몇몇의 반발이 있었으나 예프린은 간단히 '귀족모욕죄'라는 법령으로 진압해버렸다.

"가는 거냐."

예프린이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예프린의 응접실. 먼지가 가득하기 짝이 없다.

귀족 자제들의 방에는 응접실이 있는데, 예프린은 응접실을 쓸 일이 없었으니까.

"언제쯤 나오실 겁니까?"

"글쎄."

예프린은 웃었다. 그래, 내가 좀 가르쳐줬으니까 시행착오도 덜 하겠지. 그렇게만 자라서 내 품에 안겨오렴. 난 일단 이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예프린은 갈 길이 먼 사람이니까.

"밖에서 만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웠다. 에퍼리."

"아, 그리고."

이건 내 취향 반영인데. 예프린은 바깥에서도 남장을 하기 때문에 머리를 짧게 자른다. 근데 난 생머리 취향이라.

"아가씨는 머리가 긴 게 더 예쁩니다."

"···뭐?"

당황스러운 예프린을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 예를 차렸다. 예프린은 얼떨떨하게 나를 배웅했다.

"정말 예프린을 변화시켰군."

"사실 제가 한 건 없었습니다."

"의뢰는 결과가 중요하지, 과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네."

딱 대기업 회장님들 마인드네. 한 나라의 공작이니 대기업 회장급이 맞기는 하지. 그는 내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임무를 해결했으면 보상이 따라야지."

라피테스가 말했다. 뭔가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일단 묵직하긴 한데, 그거야 확인해 볼 일이지. 가끔 대기업 회장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식사권 이딴 거 넣어놓을 때도 있단 말이야. 죽고 싶어가지고.

난 S급 헌터 때도 그랬는데, 의뢰비용을 눈앞에서 확인한다.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호쾌해서 좋군. 그래."

호쾌하기는, 싸가지 없는 짓이지. 공작이 날 얼마나 좋게 보면 이런 것도 호쾌하다 그럴까. 만약 시지포가 공작 앞에서 주머니를 열었으면 바로 뺨이 날아갔을 걸.

내가 가죽주머니를 열자, 그곳에는 이상한 장난이 쳐져 있었다. 금화를 밑에 잔뜩 깔고, 위에는 처음 보는 화폐가 하나 달랑 있었다.

"백금화네."

"제가 트라프비체 화폐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만 개의 금화 정도 가치가 있지."

이것 봐라. 그러면 10억 정도 된다는 건데. 벌써 내 몸값을 그렇게 책정했단 말인가. 솔직히 내 현생 몸값에 비해서 아직 싸긴 한데, 보여준 것에 비해 과한 느낌이다.

"금화는 그냥 기분 좋으라고 깔아놨네. 원래 봉투든, 주머니든 묵직한 게 기분이 좋지 않은가."

이거, 이거. 의뢰주가 뭘 좀 아네. 하긴 뭘 들고 갈 때 뿌듯함은 실재적인 무게에서 나오니까. 이 정도면 물심양면으로 챙겨줬다고 봐야겠다.

"그렇군요."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겠네. 올바른 선택을 하게. 난 자네가 오면 귀중히 중용할 생각이니."

"고려해보겠습니다."

나는 라피테스가 건네는 손등을 무릎을 꿇어 맞추었다. 마지막까지 예의를 시험해보는 군. 문 앞에서 공작령을 바라본다.

멀리서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창문 사이로 보였다. 마치 필름카메라로 찍는 것과도 같다. 2층 오른쪽 창문이었다가, 2층 중앙 창문에다가, 중간 층계참 창문, 1층 왼쪽 창문, 1층 현관문 창 사이로. 그 누군가는 바로 아이리였다.

"넌 또 왜 나왔느냐?"

"저도 공작령 사람인데요."

아이리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러고 작은 가방을 내게 척 건네주었다.

"열어봐."

안 그래도 열어볼 생각이었어. 가방 안에 가득 담긴 건 나무로 된 작은 북커버들이었다.

뭔데. 내가 아이리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자 아이리가 도리어 신경질을 냈다.

"내가 옛날에 어릴 때 그걸로 공부했었어. 너 문맹이잖아. 그거로 공부나 하라고."

"아, 감사합니다. 한 번 봐도 될까요?"

"그래."

내가 아이리 앞에서 북 커버를 열었다. 북 커버는 비어있었다. 뭐야, 이것도 악역영애의 장난이냐? 아니면 조조가 순욱에게 보낸 빈 찬합과 같은 뜻인가? 내가 아이리를 쳐다보자 그녀는 또 화를 냈다.

"스킬북 쓸 줄 몰라?"

"네."

"하여튼."

아이리는 북 커버를 하나 꺼낸 다음에 그곳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곧 나무로 된 북커버는 연푸른색의 빛을 뿌리더니 아이리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쓰는 거야. 마나를 불어넣어."

"아, 그렇군요."

내가 마나를 불어넣자 똑같은 색깔의 빛이 허공에 떠다니다 내 몸에 들어왔다. 난 스킬창의 책꽂이를 보았다.

그곳 맨 위에 적힌 책 이름은 「기초탄탄 트라프비체어 공부 1」이었다. 책을 보니까 알파벳부터, 기초 단어, 조사까지 꼼꼼하게도 목록이 되어 있다. 공작저가 이걸로 공부시켰으니 이 부문에서는 1타 책이겠네.

"난 3살 때 그거 뗐는데, 너는 열다섯은 족히 넘어 보이니 나보다 한참 느리구나."

"대단하십니다."

"그래, 난 대단해."

"저한테 갑자기 이런 걸 주시는 이유라도?"

내가 말하자 아이리는 우물쭈물했다. 이건 내가 아는 네가 아냐. 넌 나한테 물을 뿌리면서 꺼지라고 해야 될 사람이라고.

"공작령의 사람으로서, 암덩어리를 제거해준 게 고마울 뿐이야. 난 약한 놈들은 싫어하거든. 그 놈들 옛날부터 보기 별로 안 좋았어. 예프린 거라 건들지는 않았지만."

"그렇군요."

"근데 넌 여전히 재수 없어. 나한테 반말한 거 나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

이렇게 미숙한 인사는 살면서 처음 받아보네. 아이리는 얼굴을 붉히고 현관문 쪽으로 도망갔다.

라피테스 공작은 집 안으로 뛰어가는 아이리를 바라보며 허허, 웃고는 나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그에 맞춰 저 멀리 언덕에서부터 으리으리하게 장식된 마차가 먼지를 내뿜으며 달려온다.

"제2황자의 마차로군."

라피테스 공작이 말했다. 나는 라피테스 공작에게 마지막 예의를 갖춰서 인사했다. 이제, 황도로 갈 차례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