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짐꾼 쟁탈전 - 황도 (1) >
"공작령은 어떻던가?"
지루한 여행길. 아무리 남자라도 말동무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일주일 째 말을 타고 가고 있으니까.
물론 황자의 여행이니 근위기사들도 있고, 텐트도 그들이 알아서 쳐주고 식사도 맛있게 나오지만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가토스 황자가 말했다.
"별로 재미가 없지. 공작이 백성들의 유흥거리를 다 뺏고, 거기다가 생산 시설만 만들어놨으니. 아무리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지만, 어찌 사람이 생산만 하며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뒷담화 봐. 하긴 가토스 정도면 솔직한 편이지. 원래 로맨스판타지에서 험담과 조리돌림은 기본이라고. 헌터 세상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익숙해지기 쉽지는 않겠다.
"그나저나, 예프린 라피테스가 가출했다는 군."
난 갑자기 말에서 넘어질 뻔했다. 아니, 그걸 먼저 말해야지. 그게 재밌는 내용인데.
"언제 가출했답니까?"
"오늘 받은 전서구에는 이틀 전이라고 되어 있더군."
황자는 하루에 한 번씩 하얀 전서구를 받는다. 외지에 나가 있어도 업무의 연장이라는 거지. 여기는 주 52시간 근무제도 없는 곳이니까.
"무슨 공작령에 비상 지하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땅굴을 파고 탈출한 모양이야. 대단도 하지."
가토스는 껄껄 웃었다. 만약 자신의 라인이었다면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겠지만 1황자 라인이니까 그저 우스갯소리로 되는 거다.
그나저나 벽에 걸려있던 그 날이 닳아있던 수많은 검들은 모두 훈련하느라 쓴 것이 아니었구나. 땅을 파느라 쓴 거지. 어쨌든 대단하다 예프린. 다음에 보자.
가토스는 넌지시 물었다.
"자네의 활약인가?"
"아닙니다."
난 딱 선을 그었다. 실제로 그러니까. 예프린은 원래 나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가토스는 흐음, 하면서도 내 활약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원래 높으면 높은 신분일수록 답정너인 경우가 많지.
"곧 황도에 도착할 거네. 자네의 예의범절이야 내가 봤기 때문에, 잘 해 줄 거라고 믿네."
가토스는 말했다.
"혹여, 자네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부끄럽지만, 귀족들은 옌시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다네.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아."
알고 있수다. 난 뭐 그런 놈들 별로 신경 안 쓴다. 내가 잘나면 그만이지, 뭐. 내가 별 볼 일 없었을 때는 연락도 안 되던 녀석들이 S급 재능을 발휘하자마자 바로 오더라고.
초등학교 동창, 유치원 동창, 어린이집 동창까지 연락이 와서 잘 됐다는 둥의 연락. 심지어 고등학교 몇 십 기 선배라는 사람들이 사업 투자를 권유하기도 했고.
"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행이네."
"제가 옌시 사람이라는 건, 절 구성하는 아주 작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거 멋진 말이군."
샤라웃 예프린. 조금 멋있는 말이라 갖다 썼어. 역시 귀족이라서 언어 구사력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던 부분이다.
"부럽구나."
"뭐가 말입니까?"
"내가 황자라는 건,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든."
가토스는 커튼을 열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 분지에 높은 벽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제 황도구나."
황도의 중앙, 하얀 성의 첨탑 끝이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1주일 간 제2황자부에 소속될 에퍼리 션이라고 합니다. 모두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트라프비체의 예를 취하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시종장, 시종들, 근위기사, 요리사, 황궁도서관 사서 등 출장을 나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제2황자부의 핵심인물들이 있었다.
당연히 내가 부른 건 아니다. 제2황자가 부른 거지. 눈치 없기는. 이등병 온다고 사단장이 연대장까지 부르는 경우도 있나.
"여기서 지금 에퍼리가 필요한 곳이 있나?"
황자가 물었다. 난 솔직히 별로 관심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저희야 항상 일손이 부족합니다."
"저희 인력충원을 결재 올렸는데 계속 반려가 돼서···"
"저희가 제일 인력이 부족합니다."
"저희야말로!"
차례대로, 제2황자 요리부, 집사부, 회계부, 청소부.
음. 그러니까, 나는 생각하지도 않는 곳이라는 거다. 나는 적어도 명예를 가지려고 여기에 왔다.
내가 굳이 명예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명예욕은 전생에 다 채웠지. 다만, 여기 있는 조연들이나 주연들이 거의 귀족이니까 그들에게 비비려면 그나마 작위가 필요하단 말이었다.
"전 근위병으로 가고 싶습니다."
내가 그들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모두 거절하고 말했다. 나를 마치 착한 막내를 바라보던 눈빛이던 그들이 일변했다.
"쳇, 몸도 비실비실하게 생겨서 무슨 근위병?"
"황자님, 뭐 이런 놈을 데려오셨습니까?"
황자가 착하니까 밑에 놈들이 개판이네. 마치 예프린의 호위무사들을 보는 듯하다. 물론 그들과는 다르지. 이들은 일은 잘 할 거 아니야.
단순히 황자가 착하니까 허물없이 말하는 것뿐이다. 물론 나에 대한 증오는 별개고.
"칸나 대위?"
황자가 그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침착하게 있는 근위기사를 불렀다. 그래, 너 맞잖아. 칸나. 칸나 카라모프.
후에 마리나의 근위기사가 되는 너. 마리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는 너. 제2황자 근위기사에서 있다가, 마리나의 눈에 들어 마리나의 근위기사로 보직변경한 사람.
난 이 자를 보러 여기에 왔다. 일러스트만큼, 아니, 일러스트보다 더 예쁘네.
백금색 단발과 푸른색 눈동자가 참 잘 어울린다.
"현재 근위대는 추가 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칸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 왜. 그냥 넣어달라고. 군대에서 인력이 충분한 게 어딨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브라만 상병이 고향으로 내려간 걸로 아는데?"
"현재 병력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부대의 분위기를 해칠까봐 두렵습니다."
칸나가 말했다. 할 말은 한다. 칸나콜라.
"제가 분위기를 해칩니까?"
"그래."
내가 묻자 칸나는 즉각 대답했다. 난 다시 물었다.
"제가 옌시 사람이라 그렇습니까?"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지."
진짜 솔직하네. 칸나가 옌시 차별주의자일리는 없다. 그녀는 공정한 사람으로 알고 있으니까. 다만 그녀는 부대 내의 옌시 차별주의자도 고려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그걸 잘 다루는 게 지휘관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날 도발하는 것이냐?"
칸나가 피식 웃었다. 황자는 흥미로운 듯 지켜보다가 한 마디 끼어들었다.
"한 번 써보는 게 어떤가? 칸나 대위."
"싫습니다."
내가 알기로 가토스는 군단장도 같이 맡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러니까 지금 중장한테 대위가 싫다고 한 거 맞지? 미쳤다, 미쳤어.
칸나의 철벽 수비. 이 정도면 황제도 못 뚫을 것 같다.
하지만 칸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건 분명 불필요한 말이었다. 단순히 분위기만 해친다면 어쩔 건가. 나도 조용히 있을 수밖에. 그렇지만, 그 거짓말이 끼어들음으로써 내가 비빌 여지가 생겼다.
"병력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뭐?"
내 말에 모두가 나에게 집중했다. 이건 칸나가 가토스에 대한 반발과는 완전히 달랐다.
칸나와 가토스는 친분이 있고, 나와 칸나는 친분이 없으며, 칸나는 그래도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없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지금 그 말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군?"
"네, 그렇습니다."
내가 말하자 칸나의 표정이 굳었다.
"에퍼리, 그만하게. 더 이상 하면 귀족모욕죄로 간주될 수도 있다네."
가토스가 날 말렸지만 여기서 들어가면 내 꼴만 우스워질 뿐이다. 내겐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 책과 유추할만한 근거들이 있다.
"왜 그 말이 거짓이라는 지 말할 수 있겠지? 거짓이 아니라면 자네는 날 모욕한 거다."
칸나가 옆의 검집을 위협적으로 철컥거렸다. 평화로웠던 제2황자궁이 긴장감으로 채워졌다.
"첫째. 저는 공작저에서 검은 나무를 봤습니다. 아직 새순 단계이기는 했지만, 검은 나무는 트라프비체 대륙의 지하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나무. 하나가 발견되었다면, 이미 대륙 전체에 퍼질 징조라는 것입니다."
이건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의 설정. 두 번째 근거는 설정과 내 유추가 합쳐진 것.
"둘째. 검은 나무가 생기기 시작하면, 자연히 추종자들인 검은 무리 역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흑마법을 쓰는 그들은 제국보다 검은 나무의 징조를 일찍 눈치 채겠죠. 지금 공작령뿐 아니라, 그들을 진압하려고 병력을 움직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리를 그렇게 허접한 호위무사들과 던전을 돌게 하지 않았겠지. 공작도 역시 근처로 토벌을 자주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검은 나무는 이 세계에서 가장 암적인 존재다. 마리나가 퇴치할 것이기도 하고. 그곳에는 평소 몬스터들보다 강한 마수들이 나오며, 마기를 흩뿌린다.
"그런 마당에 황도를 수비하는 제2황자 근위대가 병력이 충분하다니, 어폐가 있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칸나의 잘못은 없다. 그저 사족을 덧붙인 잘못이다. 굳이 따지자면 말꼬리를 잡는 내가 이상한 거지. 그래도 난 근위대로 들어가야 할 목적이 있다.
"어떻습니까, 칸나 기사님."
"···틀린 말은 없군."
칸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토스 황자도 놀란 눈치다. 검은 나무가 대륙 전체로 퍼지게 되면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제국에게는 있지만, 아직 공적으로 알리진 않았을 터.
그걸 내가 알고 있으니 조금 놀랐겠지. 내가 확신하기로, 지금은 소설 시작 직전이다. 검은 나무가 대륙 전체에 퍼지기 직전. 곧 마리나가 수도로 등장하겠지.
그러니까, 근위대나 병사들은 제일 바쁠 때라는 것이다.
"허허. 칸나 대위가 한 방 먹었군, 그래."
가토스가 껄껄 웃었다. 칸나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다. 하지만 그녀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소설 속에서는, 이 사람이 대장이던, 소장이던 중요한 게 아니다. 주인공과 가까운 사람이 무조건 강하다. 정신력이던, 체력이던.
"그렇다면 근위병 시험을 제가 즉석으로 보도록 하죠."
"시험?"
"네. 근위병은 원래 모집으로 받고 있으나, 이렇게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사옵니다. 그리하여 제가 직접 시험을 보겠습니다."
칸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따라와라, 에퍼리."
나는 그 말에 칸나의 뒤에 바싹 붙었다. 가토스 황자도 궁금한지 따라가려 했지만, 시종장이 그를 말로 붙잡았다.
"황자님, 결재할 서류가 많습니다."
"저것만 보고 가면 안되나?"
"안 됩니다."
가토스는 결국 시종장에게 끌려가고, 나는 칸나와 둘이 걷게 되었다. 황도는 넓어서 연무장으로 가는 길도 길었다. 칸나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다.
예프린의 굳은 얼굴과는 다르다. 예프린이 얼음 속의 불이라면, 이 사람은 모든 것을 품는 땅이다. 오히려 반대라고 볼 수 있겠지.
이렇게 시험까지 오게 된 것도, 칸나의 상냥함 덕분이다. 그나마 나를 납득하게끔 하기 위해, 편제가 꽉 찼다는 필요없는 거짓말을 친 것이다. 물론 내가 그걸 이용했으니 내가 나쁜놈이다.
우리는 어느새 연무장으로 도착했다. 연무장은 많은 병사들의 훈련으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각 옆에는 날이 서있는 병장기가 걸려있고, 각자의 구획이 있는지 흰 선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칸나 대위님, 충성!"
"충성!"
칸나는 병사들의 인사를 하나씩 받아주며 나를 데리고 빈 구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벽에 걸린 검을 하나 던져주었다. 나는 그걸 받았다. 칸나도 검을 하나 꺼냈다.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겠다. 에퍼리 션. 감독관, 시험관은 칸나 카라모프 대위가 맡는다."
딱딱하기는.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