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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6화 (16/150)

< 16화 짐꾼 쟁탈전 - 황도 (4) >

"역시, 넌 전력을 내지 않았구나."

내가 그녀를 바로 따로잡자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몬스터를 해치우며 일점돌파를 했다. 난 그녀의 후방에서 그녀가 앞만 보도록 주변을 정리해줬다. 그녀는 한 방위, 나는 세 방위를 맡는 셈이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하구나. 어찌 그런 어린 나이에 높은 성취를 얻었을까."

"어린 나이 아닙니다."

"아, 실례했군. 옌시 사람들은 동안이니까. 나이가 몇인가?"

호구조사를 몬스터들의 피가 흩뿌려지는 곳에서 하네. 이게 베테랑의 위엄인가. 나는 나이를 설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도 사람이 신원은 있어야 될 거 아니야.

몇 살로 하지. 내 지금 외형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나이를 절충해보자.

"열아홉에서 스물쯤 됩니다."

"나이에 쯤이 어디 있나?"

"빠른 년생입니다."

"그건 옌시의 셈법이냐? 트라프비체에서는 듣도 보도 못했구나."

내가 원래 빠른 년생이라서 이렇게 대답하는 게 좀 습관이다. 이해 못해도 어쩔 수 없지. 열아홉부터 술 마실 수 있으면 열아홉하고, 스물부터 술 마실 수 있으면 스물하지, 뭐.

"어쨌든 보기보다 동안이구나."

"감사합니다."

어느새 잡담을 하다 보니 우리는 몬스터들의 진을 모두 뚫어버렸다. 생각보다 일찍 뚫었네. 내가 많은 방위를 맡아서 그런가. 칸나도 살짝 놀란 눈치다.

"꽤 두터워 보였는데, 이렇게 빨리 뚫을 줄이야."

"다 대위님 덕분입니다."

"과례는 곧 비례에 가깝다. 에퍼리. 뒤를 보지는 않았지만 뒤를 느낄 감각은 있다."

그녀가 날 질책했다. 하지만 정색하면서 하는 질책은 아니고, 약간 따끔한 느낌. 하긴 괜히 겸손 떠는 것도 재수 없긴 하지.

"마더 트리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네 차례다. 내가 널 데리고 나온 이유는 이거야. 물론 강해서기도 하지만."

칸나가 말했다.

"마더 트리의 뿌리를 찾아라. 아직 너는 전입 오기 전이지만, 첫 임무다."

아직 감각이 다 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뿌리가 땅 속으로 뻗은 것만 알면 됐다. 내가 정찰 스킬을 가동하니 땅 전체에 잔뿌리들이 거미줄처럼 보였다.

"뿌리가 아주 한가득입니다."

"그건 나도 안다. 마더 트리가 우리를 완전 잡아먹으려고 작정했군. 여기서 제일 깊은 뿌리로 연결되는 걸 찾으면 된다."

뭐야. 나한테 짬때리는 거였네. 이거 칸나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다만 복잡할 따름이지. 꼬인 선에서 제일 긴 줄을 찾으면 된다 이거지.

근데 하나씩 어떻게 따라가고 있냐. 사다리타기도 다섯 명 이상이면 힘들다.

나는 전입신병 기본세트에 있는 검을 들었다. 그리고 땅에 꽂은 다음, 마나를 검 끝으로 방출했다.

계속, 계속. 땅이 마나의 색이 푸른 색으로 달아오르고 곧 붉은 색이 된다.

"뭐하는 짓이냐? 그러다 탈진이 온다!"

"찾는 중입니다."

찾는 중이 아니라, 사실 뿌리를 다 자르고 있다. 뿌리들이 툭툭 끊어진다. 마나는 땅 끝으로 계속 뻗어간다. 내 마나가 땅 속에서 회오리치는 게 느껴진다.

알아서 나와라, 이 정도면. 슬슬 느껴지네. 수많은 자식을 잃은 어미의 고동이.

"찾았습니다."

내가 그 말을 하고 칸나를 바라보았다. 칸나는 여지껏 보지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넌 대체 얼마나 괴물인 거냐?"

"괴물은 밑에 있습니다."

이제 땅 속은 흙이 없는 마나의 공터와도 같다. 내가 작은 마나를 실어 발 굴림을 한 번 하니 땅을 감싸던 지면이 비산하고 우리는 밑으로 떨어졌다.

"꺄악!"

시종일관 침착했던 칸나가 이럴 줄은 몰랐던지 비명을 질렀다. 칸나에게서 들어보는 최고음정이었다.

나는 먼저 몸에 힘을 실어 내려간다음, 칸나를 받았다. 칸나가 날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너, 이런 걸 하려면 말을 해줘야 될 것 아니냐!"

"죄송합니다."

칸나는 그리고 위를 바라보고는 입을 살짝 벌렸다. 너무 깊긴 하네. 갈수록 넓어지는 싱크홀의 구멍. 우리는 제일 좁은 곳에 있다.

"···할 말이 없다."

"여기 땅 속이라 공기가 안 좋습니다. 말하지 마시지요."

"한 마디를 안 지는 구나."

칸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 그녀도 마더 트리가 어디 있는지 느꼈을 거다. 왜냐하면 바로 옆에 있거든.

이제, 돌입한다.

1근위대장, 바리트 소령은 2근위대와 함께 필사적으로 몬스터를 막고 있었다. 몬스터를 막으면 열매는 또 떨어지고, 갓 태어나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몬스터들은 또 달려들었다.

"진을 더 촘촘히 해라!"

바리트의 선택. 수레바퀴를 굴릴 수는 있다. 아직까지 그 정도의 힘은 있다. 이 진형을 움직이면서 빠져나올 가능성은 반반.

하지만, 이미 특공대를 보내 놓은 마당에 수레바퀴를 굴릴 수는 없다.

"2근위대! 에퍼리라는 놈은 뭐하는 놈이야?"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공정하기로 유명한 칸나 대위의 총애를 받는 것인가. 그는 보지도 못했는데.

"저희도 모릅니다!"

"내일 전입오기로 한 신병입니다!"

2근위대의 기사들은 몬스터를 막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바리트 소령을 더욱 혼란스럽게 할 뿐이었다.

전입신병? 아니, 신병도 아니지. 전입도 안 했으니까. 그런 놈에 뭘 봐서 특공대까지 데리고 가느냔 말이다.

모든 특공대는 생존 확률이 적다. 칸나가 그렇게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전입도 오기 전의 신병이란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 압니다."

1근위대 부중대장 중 한 명이 말했다. 바리트의 귀가 쫑긋해졌다.

"뭔데?"

"그 놈, 미친놈입니다."

부중대장은 오늘 아침 연무장에 있던 일을 설명했다. 그는 아침 연무장에서 개인 훈련을 하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칸나와 에퍼리의 시험 때는 그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빡빡하기로 소문난 칸나의 중대에 불쌍한 신병이 또 시험을 받는구나, 생각했지만 가면 갈수록 시험의 양상은 이상해졌다.

신병이라는 놈의 몸놀림은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잔상을 몇 개씩이나 남기며 움직이는 기술. 그것도 칸나가 그린 원 안에서. 또한 칸나의 마지막 공격은 분명 칸나 전력의 80%는 담은 공격이었다.

시험인데 그만큼 했다는 건, 직접 맞붙어 본 칸나가 그 정도를 써도 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다.

그런데, 그 신병은 칸나의 공격을 곡예라도 하듯 검극을 맞추어 해소시켜버렸다. 그 정도면 적어도 칸나보다 세 단계 위의 사람일 것이다.

"지금 칸나 대위의 등위가 어떻게 됩니까?"

"소드 엑스퍼트 3이지."

등위는 각 분류마다 5계층씩 나누어져 있다. 소드 엑스퍼트 5를 넘어섰다면 소드 스페셜리스트. 그렇다면 그 자는 소드 스페셜리스트 1 등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 정도면 최소 중령급의 등위 아닌가.

"특공대는 돌아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절대로 돌아옵니다."

부중대장이 그 생각을 하고 확신했다. 바리트는 그가 무슨 의미로 확신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그들의 복귀를 바라며 이 부대를 사상자 없이 지휘할 뿐이었다.

남은 시간은 5분.

"마더 트리를 어찌 잡을 생각인가? 참고로 마더 트리는 한 순간에 공격해야 한다. 일순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곧 죽은 목숨이 될 거다."

별로 위기감은 안 드는데, 칸나의 목소리가 위압적이라서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겐 지금 생사의 갈림길처럼 보이겠지만, 내겐 그녀의 신뢰도를 얻는 핑크빛 실크로드처럼 보이는 걸.

"걱정하지 마십시오. 칸나 대위님.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상관을 지킨다는 말은 하지 마라. 옌시 사람이라 한 번만 넘어가주마. 트라프비체 군에서 그런 말을 하면 군기 위반 징계다."

미친. 바로 호감도 하락. 역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니까. 나는 그냥 입을 닫고 보여주기로 했다.

"여기 마나가 뭉쳐있습니다."

"그래. 가장 강한 공격을 일시에 쏟아부어야 한다."

가장 강한 공격? 그건 즉 폭발력 있는 공격을 말하는 걸 텐데. 난 원래 일대다보다 일대일 승부에 강한 사람이라 대물량전 공격이 거의 없다. 물론 마나만 쏟아 부으면 되긴 하겠지만. 그건 어쩌면 마더 트리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그걸 자양분으로 삼을 수도 있을 테니.

확실한 공격, 그게 필요하다. 난 스킬창을 잠시 뒤져보았다. 없네. 대물량전 공격 없음.

레이드 종류에 따라 헌터들이 불렸던 은어들이 있지. 한 마리의 강한 마수가 주된 게이트면 보스사냥이라고 하고, 어중이떠중이 마수들이 드글거리면 양치기라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난 보스사냥에 특화된 헌터였다. 그래도 양치기가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마더 트리가 얼마나 될지 모르기에.

"이 와중에 내면을 보면 어쩌라는 얘기냐? 넌 전장 나가기 전에 스킬도 파악 안 하고 오나?"

그새 들켰네. 난 험험, 하고 스킬창을 껐다. 칸나의 호감도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네. 아, 이게 아닌데.

어쨌든 지금 나는 칸나의 부대에 속해있는 사람. 일단 칸나를 믿고 따르는 수밖에. 이 세계관에 대한 전개는 내가 알고 있지만, 현지인만 알고 있는 세계관 역시 있는 법이다. 지금은 칸나가 나보다 정보우위에 있다.

"하나, 둘, 셋하면 네 전력을 쏟아붓는 거다."

"알겠습니다."

일단 해보지, 뭐. 모르긴 몰라도. 칸나가 숫자를 하나씩 셌다.

"하나."

칸나의 검 끝에 푸른 기가 모인다. 그것들은 회전하면서 구체를 만들어간다.

"둘."

나는 아직 어떤 공격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몸속에서 마나를 예열시키고 있다. 마나가 내재되어 있는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있다.

칸나의 검 전체에 푸른 아우라가 돌고, 검 끝에는 대포알처럼 큰 푸른 마나 구체가 모였다.

그때, 마더 트리가 우리의 마나를 느꼈는지 우리 쪽으로 가시가 달린 나무뿌리들을 촉수처럼 뻗어왔다.

"셋!"

칸나의 마나 대포가 날아가고, 난 망설이다가 뒤늦게 심장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마나를 전부 검의 끝에 발산시켰다.

내 눈에 들어온 건, 내가 들은 검이 검병부터 부서지고, 검의 뿌리가 부서지고, 검신이 부서지는 모습이었다. 그 모든 파편들이 커다란 레이저 캐논처럼 날아갔다.

콰과과과과광!

귀가 먹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기다란 터널이 만들어졌다.

퍼덕, 퍼덕.

우리 주변에 검은 나무뿌리의 파편이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고 알리는 것처럼 튀어 올랐다. 무슨 낚시에 걸려 뭍으로 나온 물고기도 아니고.

난 손으로 차양을 펴 이마에 갔다 대고 터널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없네, 아무 것도 없어. 이제 마나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더 트리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사라지고 말았네.

"칸나 대위님 말이 맞았습니다. 한 번에 공격해야 하는 군요."

내가 칸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근데 칸나는 어느 샌가 부터 날 바라보고 있었는지 날 이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천둥에 놀라 울음을 멈춘 아기와도 같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칸나가 물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만든 터널 끝 쪽에서부터 어둠이 가까워졌다.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친. 이것 때문에 고민했단 말이야. 땅 속에서 마나를 다 쏟아 부으면 지반이 약해질 걸.

왜 모든 힘을 쏟아 부으라고 해가지고. 난 칸나를 속으로 탓하며 칸나를 안았다.

"꺅! 뭐하는 거냐?"

오늘 칸나의 비명을 두 번이나 들었네. 아주 이득이다. 제2근위대의 기사들은 몇 년 동안 근무했어도 이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봤겠지? 나도 소설에서 칸나가 비명을 질렀다는 묘사는 본 적이 없다.

"올라갑니다. 꽉 잡으시길 바랍니다."

터널이 무너지고 있음과 동시에 내가 싱크홀의 벽을 타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 터널이 무너지면 싱크홀 또한 타격을 입을 거다. 빨리 빠져나가야지.

나는 마지막 발에 힘을 줘 도약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중에서 밑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터널의 모든 부분이 무너지고, 짙은 흙먼지가 깊은 구덩이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우리가 있는 쪽의 공기는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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