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20화 (20/150)

< 20화 황제를 위하여 (3) >

내게 이 세계는 공부할 필요가 있는 공간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모든 걸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마리나와 가테스에게 가있는 소설. 이렇게 백그라운드는 조명 하나 없다.

내가 알게 된 백그라운드 1. 던전의 계층. 대략 35층까지 있으면 C랭크, 70층까지 있으면 B랭크, 100층까지 있으면 A랭크, 100층이 넘으면 S랭크 정도로 분류한다.

"야, 너무 깊이 내려가는 거 아니야?"

아이는 적응의 생물. 이 속도도 어느 정도 지속이 되니 익숙해졌는지 내가 이렇게 빨리 달리는 데도 가티스가 입을 열었다.

"보스가 저기 있습니다."

그리고 던전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정말 아무 것도 없다. 1층과 크기가 비슷한 사각형의 방만 계속 이어질 뿐.

물론 던전에서 몬스터들끼리 싸움이 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래서 전멸하는 웃지 못할 경우도 생기기는 하는데, 내가 벽과 바닥을 둘러봐도 싸움의 흔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이렇게 깊이는 큰 형도 안 와봤을 텐데. 나 이러다 크게 혼날 것 같아."

"황자 전하께서 가테스 황자님을 제치셨습니다."

"그런건가?"

아이는 단순한 생물. 좀만 띄워주니까 또 좋아서 웃고 있네. 나와 보스의 추격전은 곧 끝날 기미가 보였다.

던전 보스의 속도는 유감스럽게도 나보다 빨랐다. 내가 사실 S급 헌터 중에서도 빠른 편이 아니었거든. 단순 속도로 따지자면 오히려 느린 편이라.

하지만 나는 여유롭다. 흐릿하지만 도망가는 마수의 깃을 손으로 잡고 있는 듯하니까. 중요한 건, 던전은 폐쇄되어 있다는 것.

"꼭 안 나와서 한 대씩 더 맞는 애들이 있다니까."

그런 놈들을 보면 답답하다. 물론 살기 위해서겠지만. 난 계속 땅을 뚫어나갔다.

어느새 맨 아래층. 느껴진다. 이곳에서 한 번만 더 발을 구르면 난 튕겨나갈 테다. 가티스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던전 보스는 이 층의 끝에 있다.

"그냥 좀 나오면 안 될까."

던전에서 수성전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때, 벽을 투과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오호라, 던전 보스로군. 내가 초감각을 일으켜 보니까 윤곽까지 보인다.

"···안···녕."

난 반사적으로 가티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티스는 날 왜 쳐다보냐는 듯이 마주 보았다. 가티스가 말한 건 아니라는 거지. 하긴 너무 희미하기는 했어.

그렇다면, 이 말은 몬스터에게서 나왔다는 얘기다. 말하는 몬스터라. 그럼 최소 A급 이상인데.

"···어, 날 느꼈구나···."

그 말과 함께 책상 보자기에 덮어쓴 것 같은 형체가 서서히, 그 몬스터의 말같이 느리게도 나타났다.

"···내 이름은···토미···"

"그래. 토미, 안녕."

그래도 인사해줬으니 인사는 받아야지. 가티스 황자는 아직도 못 본 모양이었다.

"황자님. 나이가 여덟이라고 하셨죠?"

"응."

"그럼 지금 잘 때겠습니다."

"그렇긴 하지?"

툭. 툭.

첫 번째 툭은 내가 가티스의 뒷목을 친 툭, 두 번째 툭은 가티스의 목이 힘을 잃고 떨어지는 툭. 난 자연스럽게 가티스를 최대한 구석에 가둬놓고 마나로 공간을 보호했다.

"···저, 아이는, 황족의 피로구나···"

"응. 맞아."

"···넌 아니고."

토미의 형태는 내가 알고 있는 레이스와 똑같이 생겼다. 책상 보자기를 엎어놓은 느낌에 눈처럼 뚫린 두 개의 검은 구멍.

아마 작가님이 천재가 아닌 이상 모든 몬스터를 생각해서 넣지는 않았겠지. 우리가 있는 세계에서 몇 개 갖다 썼을 거다. 그 몬스터가 이거란 거지.

"···친구와의 맹약에 의하면, 황족의 피가···아닌 자는, 배제하기로 되어있다···"

토미의 보자기가 중력을 무시하고 위로 펄럭인다. 검은 구멍에서는 붉은 빛이 서서히 쏟아져 나왔다. 너무 느려서 못 봐주겠다.

"싸우자는 얘기네?"

"···그렇지, 너의 불민함을 책하라···"

"하하."

어이없어서 웃는다, 어이없어서.

내가 눈을 감았다 떴다. 냉정함이 내 마음에 깃든다. 피는 팽팽하게, 심장은 느리게. 내가 싸울 때의 마음가짐.

"···50층부터 150층까지의 마수들을···천 년을 먹었다···"

토미의 형상이 기괴해진다. 레이스 퀸의 설정과 같다. 마수에는 인식(人食)과 잡식이 있다. 인식은 사람만 잡아먹는 종, 잡식은 같은 마수도 잡아먹는 마수다.

레이스는 잡식이다. 마수의 영혼을 빼먹으면 강해진다는 설정이지. 하지만 애초에 약한 몬스터여서 그렇게까지 강한 레이스퀸은 보지 못했지만.

토미의 보자기가 점점 커진다. 흰 색이었던 색깔도 가티스가 보면 광과민성 발작을 일으킬 만큼 색깔이 번쩍거리며 여러 색깔로 계속 바뀌었다.

이제 토미의 몸은 던전 반동을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이렇게 뚱뚱하고 화려한 레이스 퀸은 처음이었다.

"황족이면 죽이지 않고, 황족이 아니라면 죽이는 건가?"

"···맹약에 의하면···그리하다···"

내 물음에 답했다. 이런, 그런 건 내가 싫어하는 건데. S급 헌터니까 온갖 혜택을 받아왔는데, 난 그런 건 최대한 안 받으려고 노력했다. VIP석이라든지, S급 헌터 전용 통로라든지, 그런 건 안 쓰고 다녔다. 그런 건 체질적으로 안 맞아서.

물론 그런 혜택을 받는 S급 헌터들이 불편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은 누릴 자격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게 대체 왜 필요한 거냐고.

근데 그런 걸 다 따지고서도 어이없는 이유가 있다.

"야, 싸움 잘하냐?"

"···뭔 소리냐···?"

각 마수들은 랭크가 있다. 물론 네임드, 언커먼적인 존재들이 있기에 마수들의 랭크 표기는 단일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고블린은 E~D+랭크 정도로 표기한다.

내가 아는 레이스 퀸은 폭이 가장 넓은 마수다. E~S- 랭크. 그러니까, 아무리 영혼을 갈취하고 다녔어도 S-랭크라는 거지.

"난 너보단 잘할 것 같은데."

내가 기세를 피어 올렸다. 난 이 세계에서 전력을 다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괜히 나대는 꼴 같아서.

가끔 S급 헌터 중에서는 술 먹고 건물 깨부수는 애들도 있는데, 난 안 그런 사람이었거든. 그리고 괜히 자랑하는 애도 있었고. 그런 건 어차피 다 나중에 가면 비웃음거리다.

힘을 쓸 때 써야지, 힘의 소중함을 알지.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 지금은 힘을 쓸 때였다. S-랭크면 솔직히 지금의 내 상태로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포대기야, 트라프비체 대제든, 뭐든, 난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

"···황족의 피를, 모욕하지 마라···"

"넌 왜 나 모욕하는데?"

내가 말했다. 토미의 느린 입이 천천히 다물어졌다.

"난 여기서 황족의 피가 아니니까 그만큼의 영광은 못 얻겠지. 하지만 난 충분히 받을만한데 말이야."

대한민국 우리 집 와봐. 태극훈장, 을지훈장, 천수장까지 다 있으니까. 그런데 받아보니까 알 수 있는 게 있다.

"그런데 그런 건 별로 필요 없더라. 내가 생각하는 내 위치가 중요하지."

"···말이···많구나···"

"그러니까, 너도 친구의 약속에 기대지 말고, 네 인생, 아니, 마수 생을 살아라."

너무 심취해서 잘못 말했네. 정정.

"여기서 살 수 있으면."

가티스는 사탕과 과자의 궁전에 있었다. 이 궁전의 폐하는 자신이었고, 신하는 쿠키들이었다. 사람 모양의 쿠키들이 자신 앞에서 예를 차리다가 허리가 부러지고 두 조각의 쿠키가 되었다.

"여봐라. 초콜릿을 내오너라."

그와 함께 쿠키가 설탕으로 만든 목줄을 끌고 무언가 끈적이는 걸 끌고 왔다. 그건 슬라임처럼 생겼지만, 초콜릿이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전하."

또각!

"아, 가루 흘리면 쓸기 귀찮은데."

가티스는 한숨을 쉬고 진액을 듬뿍 흘리는 초콜릿을 맛봤다. 아버지가 허락해주지 않는 간식이었다. 지방 밖에 안 되어서, 황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라나 뭐라나.

초코색 슬라임은 빨면 빨수록 더욱 진한 땀을 흘려댔다. 곧 초콜릿의 진액이 강해져 써질 때쯤, 가티스는 입을 뗐다. 그의 입에는 초콜릿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살면서 이런 행복은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쾅! 쾅! 쾅!

누군가가 이 성에 포격을 가했다. 지붕부터 과자들이 무너져 내렸다. 가티스는 깜짝 놀라며 천장의 무너져 내린 과자들을 하나씩 주워먹었다. 너무 달콤하고 맛있었다.

쾅! 쾅! 쾅!

"누구지? 아버님인가?"

가티스는 겁도 없이 성문을 열고 바깥을 나갔다. 그곳에는 화려한 빛이 있었다. 화려한 빛이 가티스를 감쌌다.

팡! 팡! 팡!

아, 얘 때리는 타격감이 있다. 토미의 보자기는 이제 거의 해져있었고, 붉은 눈빛 역시 분홍색으로 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토미는 내 몸에 공격 한 번 해본 적 없다. 빠른 것과 움직임은 다르니까.

"···너의 움직임은···뭐지···"

이제는 지친 토미가 입을 느리게도 열었다. 다들 지성이 있는 몬스터들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는 했지. 다른 헌터들도 그랬고.

보는 눈 없는 B급 헌터 이하들은 내가 싸우는 걸 보면서 가장 평범하게 싸우는 S급 헌터라고 했다.

S급 헌터는 각자 연예인 같은 이명이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창피한 '환영살인마'였고, 구공환 아저씨는 '철의 요새'였다.

하지만 그건 기삿거리에나 나오는 단어고, 대중들이 부르는 가끔 바뀌기 마련이다.

나 같은 경우는 '보통 헌터'였다. 왜냐하면 싸우는 게 진짜 밋밋해보인다고. 그냥 슥슥 움직이면서 베는 게 끝이니까. 이펙트라는 건 없었고.

- 야, 보통 헌터. 넌 의뢰 언제 뛰냐?

- 철밥통 아저씨, 아저씨나 연예계 활동 그만하세요.

- 하여튼 근데, 사람들 보는 눈도 없어. 너만큼 허세 부리면서 싸우는 애도 없는데.

- 뭔 허세야. 무빙이지.

- 꼭 그 지랄로 떨어야만 무빙이 아니란다.

- 그런 걸 질투라고 합디다.

나도 그 움직임이 내 시그니쳐라고 생각하고는 하는데, 뭐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었지. 고작해야 같이 의뢰 뛰어본 S급 헌터 몇몇. 근데 S급 헌터가 의뢰를 같이 뛸 리가 거의 없으니까 진짜 친한 몇몇만 아는 거지.

중학생 S급 헌터 채린이는 나와 1:1 대련을 하고, 움직임에 대해서 그렇게 평했다.

- 아, 진짜 대련 개빡치게 하네. 위에 잔상 생겼다면 왼쪽에서 나타나고, 아래서 잔상 생기면 오른쪽에서 나타나고. 이따구로 할 거면 하지 마, 그냥.

- 이게 요즘 애들의 극찬이냐?

- 아, 하여튼 너무 야비해서 못 싸우겠다.

그 움직임에 대한 이름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이 세상에서 정해줬다.

【고유스킬 : 환영그림자 Lv MAX 개방】

토미가 뒤로 훅 빠지고, 커다란 검은 구멍과 같은 입을 벌리고 몬스터들을 토해냈다. 미처 토미가 소화하지 못한 혼이 뺏긴 몬스터들이었다.

꽤 멋있어 보이는 몬스터들도 있었다. 저거 중 하나 가져가면 그래도 5등 안에는 들겠다. 100층 아래서 먹은 몬스터들일 테니까.

"야, 맛있는 거 먹고 다니네."

"···조용히 해라···"

이제 토미도 알 것이다.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도망칠 힘도 없겠지. 그래, 이제 내게 주도권이 온 것이다.

"온순해졌네. 토미야."

나는 조롱하듯 말했다. 토미의 부푼 천은 이제 해지고 뻣뻣한 기미마저 없이 흐물흐물했다. 이럴 때 물어야 진실을 들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이 질문을 했다면 옳은 대답을 들을 수 없었겠지.

이제 천천히 내 입이 토미처럼 느리게 열리기 시작한다.

"트라프비체 대제의 혼은 아직 소화되지 않았겠지?"

내 기습적인 말에 토미의 분홍색 눈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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