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황제를 위하여 (4) >
"···이건, 꿈이야?"
구석에서 가티스가 어느 샌가부터 일어나 있었다. 내가 너무 약하게 쳤나. 하긴 황자라 조금 쫄리더라고. 그래도 싸움은 끝난 다음에 깬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아닙니다."
"아, 여기가 꿈이었어야 됐는데."
가티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쉬워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좋은 꿈을 꿨나보다. 언젠가부터 내 꿈은 현실과의 경계선에 있는 불협화음의 꿈이 됐는데, 어린 아이의 꿈에는 뭐가 나올까 문득 궁금해진다.
"토미는 왜 저렇게 걸레짝이 됐어?"
"레이스의 사체는 원래 걸레로도 씁니다."
"내가 물은 질문은 그게 아닌데···"
난 가티스를 품에 두고 다시 토미에게 물었다.
"이봐, 대답은?"
"···따라오너라. ···나의 소명은,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
토미는 천천히 땅 속으로 내려갔다. 이제 이 빈 사각형의 공간에는 나와 내 손을 붙잡은 가티스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난 이게 마지막 층인 줄 알았는데. 발을 살짝 굴렀다. 그래, 이렇게 강한 마나의 벽이 있으면 던전의 외곽이란 얘기인데. 한 번 엄청 세게 굴러볼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 토미가 땅 위에서 머리만 슬쩍 내밀었다.
"···오른쪽에 계단이 있으니···돌아와라···나의 추억이 서린 공간을 더 이상 부수지 마라···"
옘병. 몬스터 주제에 뭔 추억이야. 난 투덜거리며 가티스를 업고 오른쪽 방으로 향했다.
오른쪽 방을 열자, 확실히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이 내 기감을 감출 정도로 강한 결계라. 어찌됐든 심상치 않은 곳이겠네.
"저기 뭐가 써져있네."
가티스가 말했다. 나도 봤다. 딱 봐도 3줄 이상인 게 보기도 싫게 생겼다. 돌판 같은 곳에 문에는 여러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토미야, 나와서 열어라."
난 말했지만 분명히 듣고 있을 토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기연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석판이었다. 석판에 글씨가 음각된 솜씨만 봐도, 이 기연을 만든 이의 경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근데, 문제가 있다. 좀 어려운 단어가 섞여있어서 내가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난 가티스를 바라보았다.
"황자님, 이런 건 소리 내서 읽으셔야 합니다."
"이미 다 읽었는데, 난?"
"소리내서 읽으시지요."
가티스는 설마 내가 글자를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는지 입을 열어 소리를 내었다.
"태양의 사람아,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내 이름 외칠 사람아. 이 세상 온통 내 것이 아닌 게 없으니 하늘 끝에 적힌 내 이름을 보고, 땅 끝까지 온 순례자, 내 사람아."
가티스가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지. 그렇지. 저게 순례자라는 단어였구나.
"나는 오랜 여행에 지쳐, 여기 나를 뿌리째 묻으리니 내 영혼의 검불을 파헤쳐 나를 계승하라."
계승, 검불, 뿌리 등의 단어를 습득하고 있는 중에 가티스의 말이 이어진다.
"기나긴 시간의 거인이 너를 마주하리니 순례자인 넌 절대 겁먹지 마라."
아마 토미를 말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말고.
"나의 아이야, 나를 찾기 위해 망망대해와 벌판을 가로질러 땅 끝까지 찾아온 나의 아이야. 이제 너를 증명하고 너를 꺼내고, 나를 꺼내라."
석판의 줄은 마치 중국의 한시처럼 단어수가 맞춰져 있었는데, 마지막 줄은 그어져있는 금 다음에 써져 있었다.
"만약 네가 그저 나의 순례자가 아니고 지나가는 나그네라면 그냥 지나가시라. 시간의 거인을 마주할 용기가 된다면 너도 내 처소로 들어오라."
이건 메일의 PS 같은 것 같은데. 뭐 어쨌든 지금은 날 지칭하는 거겠네. 난 대제를 쫓아 온 적이 없으니.
"음, 나를 증명하고 나를 꺼내라는데?"
총명하네. 총명해. 여덟 살이면 순례자나 검불, 나그네 같은 단어는 모를 법도 한데, 역시 황자는 조기교육의 수준이 달랐다.
"어떻게 하지? 옷 벗어야 되나?"
"그게 증명입니까?"
"나를 보여야 되잖아. 제일 순수한 나를 보여줘야지."
내가 가티스가 웃통을 벗으려는 걸 손으로 말렸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얘야. 그런 허접한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을 리가 없지. 내 단련된 웹소설의 경력은 이 문의 해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굳이 음각되어 있는 글씨, 그리고 석판이 아닌 글씨에만 서린 마나가 그 답을 가리키고 있다.
"황자님, 손을 저한테 한 번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자."
가티스는 별 생각도 없이 손바닥을 쫙 펴서 내게 보여줬다. 나는 손톱으로 살짝 그의 손끝을 찢었다. 아주 살짝.
"악! 너 지금 뭐하는···"
난 그 피를 가지고 글이 적혀있는 문 앞에 이리저리 묻혔다. 그 작은 피 한 방울은 음각된 글씨에 닿자마자 푸른색 마나로 채워졌다. 글씨가 모두 마나로 채워져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판에 응집되는 마나의 기운. 석판은 땅 속으로 드르륵 내려갔다.
쿵!
석판이 땅 밑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뭔가 신기한데."
문이 열리자 다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아주 환했다. 조명도 조명이지만, 벽에는 반짝거리는 무언가들이 많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모두 고가처럼 보이는 보석들이었다.
"와, 예쁘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왜?"
"보석 뒤로 이상한 마나들이 흐르고 있습니다. 밑에 계신 분이 시험을 좋아하시는 분인 것 같군요."
내가 보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바로 그림 위의 떡이요, 백화점 명품관 진열장 뒤의 가방이지.
솔직히 나 혼자였으면 그냥 빼봤다. 근데 만약 함정이 이 던전이 무너지는 거라면? 이 150층의 던전이 무너지면 가티스는 살 수 없다. 내가 보호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아마 내가 공간을 보호해줘도 질식할 것이다.
우리가 끝까지 내려가자, 그곳에는 커다란 방이 있었다. 커다란 방문의 마주한 곳에는 석상이 우리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문맥상 트라프비체 대제의 석상일 것이 분명했다. 커다란 석상은 검을 하늘로 치켜들고 서있었다. 그 앞에는 다시 작아진 토미의 모습이 있었다.
"···어서 와라, 황족의 피야···"
"음."
아까와는 다르게 공손하네. 아마 피를 증명해서 그런 것 같다.
"···지나가는 나그네도···"
아까 죽도록 싸웠는데, 그래도 토미의 형상은 꽤 회복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온순해졌는데 때릴 수는 없겠지.
"···황족의 피, 나그네야···대제에게 영광을 바쳐라···"
토미의 말에 가티스가 기함을 했다. 난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 물론 가티스는 예상도 못했겠지. 석상은 대제전에 있는 조각미남과는 다른,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토미가 느리게 말했다.
"···13번째구나."
"뭐? 내가 첫 번째가 아니었단 말이야?"
가티스가 외쳤다. 솔직히 나도 김이 좀 샌다. 열 세 번째면 뭐 좀 했다고 하기도 애매한데. 하긴 천 년에 13번째면 좋은 거긴 하지만, 그래도 최초가 중요하지.
"···그래도 같은 세대에 두 명이 나오는 건 처음이란다···"
같은 세대에 두 명. 역시, 가테스가 다녀간 곳이다. 중반부 이후, 가테스가 마리나에게 마음을 열고 시시콜콜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대제전 앞이었지.
- 마리나, 난 대제님의 혼을 실제로 뵌 적이 있어. 이 목걸이는 그때 받은 거야. 이걸 너에게 줄게.
- 어디서 뵈었는데?
- 황궁도서관 지하.
난 그래서 가티스가 지하 던전을 얘기할 때, 나이스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이 구절에서 말한 그곳임이 분명했기에.
"···황족의 피야, 선친의 유물을 받거라···"
토미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눈까지 벌어지는 검은 구멍이 기괴해 보인다.
그곳에서 붉은색 줄이 나오기 시작한다. 아, 더러워. 뭔가 토하는 것 같잖아. 하지만 나오는 건 영롱하기 짝이 없다.
토미가 토해낸 건 목걸이였다. 물이 소용돌이치는 크리스탈 목걸이. 목걸이는 붕 떠서, 가티스의 목에 걸쳐졌다. 참고로 가테스는 화염이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크리스탈 목걸이다.
"기연이 아주 넘치는 곳이네."
13번째면. 내가 말하자 토미가 가는 눈을 떴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 유물도···"
헐. 마지막이었어? 그러면 좀 의미가 있는데? 원래 레이드에서 꽃은 막타잖아.
"그리고 여기 온 나그네, 외부인은 처음이고···"
하기야 그렇겠지. 가티스가 아직 사리분간을 못하니까 나를 그냥 여기로 끌어들인 거지, 10살만 되었어도 안 끌어들였을 걸.
"···이제 내 할 도리는 다한 것 같구나, 친우여···"
토미는 등을 돌려 동상을 보았다. 곧 토미의 입에서 무언가 연기 같은 게 흘러나왔다.
- 그때, 레이스 퀸이 연기를 내뱉었어. 나는 그저 독무(毒霧)인가 해서 소매로 얼굴을 가렸지만, 알고 보니 그건 트라프비체 대제님의 혼이었어.
토미의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게 보였다. 토미의 몸이 점처럼 변했을 때, 흘러간 연기는 대제 석상에게로 향했다.
곧, 삐걱거리면서 동상이 움직였다. 이건 나도 좀 놀랐다.
"···이름이 무엇인가."
동상에서 낮은 음성이 울려 퍼진다. 입이 안 움직이고 말을 하니, 영혼의 진동으로 말을 하는 듯했다. 가티스도, 나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람은 확실히 대제였다.
"가티스 트라프비체입니다. 대제님."
"에퍼리 션입니다. 가티스 황자의 근위를 맡았습니다."
"트라프비체 트라프비체다. 반갑다."
대제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리 어린 연자가 온 건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구나."
"근위병의 도움이 컸사옵니다."
"그래, 나그네가 근위병이라니. 신기하구나."
대제의 동상이 살짝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자네의 이름은 뭐지?"
"에퍼리 션입니다. 대제님."
"흠, 환영이란 뜻이구나."
고대 옌시어도 알고 있네. 아, 이사람 기준으로는 현대어겠지.
"재밌구나. 옌시 인이 온 것도 처음이고, 외부인이 온 것도 처음이다. 그 둘이 한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대제는 다시 내게서 관심을 거두고 가티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린 피야, 내 앞의 땅을 파 보거라. 너를 위한 마지막 것이 거기 있나니."
그 말에 가티스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티스는 동상 앞에서 극진한 예를 한 번 취하고, 땅을 두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작고 하얀 손톱에 흙먼지가 꼈다.
그 땅에는 하나의 목함이 있었다. 아, 저렇게 생긴 거 본 적이 있다. 아이리한테 기초탄탄 트라프비체어를 받았을 때 봤었지. 가티스는 익숙하게 그것을 꺼내서 자신의 스킬북으로 흡수했다.
"그걸 연마하라. 한 세대에 두 명의 연자가 나왔으니 세계가 어찌될지 궁금하구나."
"네, 알겠습니다. 대제님."
그리고 고개를 숙이는 가티스. 그때, 대제의 몸에서 연기가 푹, 하고 나왔다. 만두의 찜기에서 나오는 것 같은 연기였고, 가티스는 곧 그 자리에서 잠들 듯이 기절했다.
내가 달려들어 구할 새도 없었다. 너무 동상과 가까이 있어서.
대제는 검을 땅에 꽂고 허리를 굽혀 가티스를 자신의 등 뒤편에 놓았다.
"대제님, 무슨 행동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밖에 있는 석판을 보지 못했나. 나그네여."
대제가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영혼이 웃음을 섞으니 뭔가 공사장의 소음처럼 기괴했다.
"시간의 거인은 이미 마주하지 않았습니까?"
"아, 토미를 말하는 것이군. 그는 그저 거인의 시종일 뿐이라네. 그에게는 참 많은 빚을 졌어."
아, 그렇다면 시간의 거인은 따로 있군. 여기, 지금 내 앞에 말이야. 3인칭으로 자기를 칭하는 대제라.
"대제님께서 시간의 거인이시군요."
"그렇지. 나는 사실 내 후인들보다도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대제의 굳은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대제 석상의 눈이 깜빡거린다. 이제는 석상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딱딱해 보였던 그에게 관절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대제의 움직임이 유연해졌다.
"자네는 누구인가?"
"에퍼리 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니지, 다시 말하겠다."
대제가 고개를 저었다.
"이공간을 뛰어넘어온 강자여, 자네는 누구인가?"
난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내 정체를 알고 있었네. 이 세계에 들어와서 제일 놀랐다. 그렇다면 내가 예를 차릴 필요도 없었잖아.
"제가 이공간에서 뛰어넘어온 건 어찌 아셨습니까?"
"자네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라네."
석상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고유스킬 : 붕괴 저항 Lv MAX가 무력화됩니다. 】
그와 함께 내 몸이 꿰뚫리는 느낌이 나고, 허탈해진 기분을 받았다. 황제가 날 바라볼 때와 비슷하지만 훨씬 강하다. 아마 황족들의 고유 스킬인 듯했다.
"또 누가 있습니까?"
"나 때의 옛 사람이지. 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 어떻게 그가 이 세상으로 떨어졌는지는 모른다네."
"그렇군요."
"다만, 이방인들이 떨어질 때는 항상 위기가 왔지. 땅 속에서 난 그걸 느낄 수 있다네. 지금 내 예상이 맞다면 검은 나무가 한참 새순을 틔우고 있을 것 같네."
정확하다. 그렇다면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것과 검은 나무가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인데.
사실 이쯤 되면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늘 피해왔었지만,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질문.
하나는 내가 이곳에 왜 있느냐, 는 형이상학적 질문. 둘은 나의 존재가 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느냐는 형이하학적인 질문.
"이방인들은 세상에 대해 의욕이 없어 은거하거나, 세상에 대한 의욕으로 넘쳐 사람들을 지휘했지. 자네는 어디 쪽인가?"
난 그냥 연애하려고 왔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난 이 세계에 애정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니까.
"굳이 말하자면, 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저도 행복해지면 좋고요."
"그건 아주 우리 세상에 좋은 소식이군."
대제는 땅에 박힌 검을 꽂고 나를 향했다.
"자, 지금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도다. 최초이자 최후의 나그네야,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부숴라. 그게 내가 너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이자, 마지막 명이 될 테니."
대제의 육중한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 역시 눈을 감았다 떴다. 심장이 어느 때보다 느리게 뛰고, 피가 어느 때보다 빨리 돌아간다.